계절은 들불로 탔다

아사달의 봄_02

by 이봄


계절이 바뀔 때면 제대로 여물지 못한 바람이 때때로 불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이름을 갈아타는 시간에는, 골짜기마다 패잔병으로 남은 겨울이 두텁게 진을 치고서, 냉기 가득한 바람을 몰아가게 했고,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간에는 꽃향기 어지러운 바람으로 계절을 붙들기 마련이었다.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사이로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서, 최후의 일전을 벼르듯 제법 대열을 유지한 채, 겨울이 머물던 때에도 어김없이 꽃은 봉오리를 맺었고, 나무는 움을 틔워 계절을 불렀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시간은 있게 마련이었고, 그렇다고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듯 억지로 계절을 입힐 수는 없었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이는 벌써 자기주장을 하게 마련이었다. 새로 산 노란 옷을 입히고 싶은 욕심에 엄마는 꼬드겼지만, 어쩐지 꼬맹이 녀석은 싫다며 달아나기 일쑤였다.

"엄마가 뭘 사 왔나 볼까? 어머, 예쁘기도 해라. 우리 순이가 입으면 정말 예쁘겠는 걸. 어디 한 번 입어볼래?"

잡힐 듯 말 듯 장난을 치기도 하고, 때로는 싫다며 방바닥에 벌렁 누워 발버둥도 쳤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기의 반응에 당황하는 건 오히려 엄마였다. 계절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커다란 종이에 숫자 몇 개를 적어놓고는 여기까지는 겨울이고, 여기부터는 그러니까 봄인 거야. 아무리 선을 긋고 옷을 갈아입히려고 해도 호락호락 물러설 계절은 없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물러나고, 다가올 것을 조바심으로 화를 돋우는 건 무모했고, 어리석었다. 어디에든 퇴로는 필요했고 그만큼의 시간도 줘야만 했다. 성미 급한 녀석들은 알아서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반대로 거북이가 가슴을 치며 답답해 죽을 것만 같은 느림보도 있었다. 몇 달을 눌러앉아 정이 들었던 녀석은 미련이 붙들고 엉덩짝을 놓아주지 않아 머물기도 했다. 종일 가봐야 노루꼬리만 한 햇살이 잠깐 어른거리다 마는 골짜기엔 본진을 놓친 패잔병들이 득실득실 모여있었다. 엄동설한이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은 밀려드는 꽃 무더기에 밀려 자리를 내줘야만 했고, 모르지도 않았다. 허세라도 부려야만 퇴로를 열 수 있었고, 물러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헐겁게 묶인 시간이 제멋대로 움직인다고 입을 네댓 발 빼문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양지바른 언덕에 노란 복수초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면 겨울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제법 먼 길을 가야 했으므로 그만큼 짐도 많아서 한 날 한 시에 모두 떠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섣부른 선택은 허무하게 무너질 봄날의 꿈이었다. 높다란 봉우리엔 단단히 쌓아 올린 겨울이 기세 등등 으름장을 쏟아내고 있었다. 얼기설기 목책 몇 개를 세워둔 성채가 아니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들을 지나고 강을 건넌 바람이야 고작 남녘의 어디까지 봄이 왔다거나, 머지않아 추풍령을 넘어 파죽지세로 북상할 거라며 풍문을 퍼 나르기에 바빴지만, 풍문에 기댄 채 외투를 벗기엔 미덥지가 못했고, 때가 아니었다. 물론 한 번 북상하기 시작한 봄이 물러설 일은 없었다. 마을을 지나고 골짜기를 건널 때마다 숨은 복병과 교전을 치러야만 해서, 기대보다는 속도를 내지는 못했다. 높을 산을 끼고 있는 마을에선 몇 날이고 발목이 잡혀 옴짝달싹을 못했다. 그렇지만 결국은 오는 봄을 어쩌지는 못했다. 남녘에서는 이미 매화가 피고, 유채꽃이 바다를 이뤄 파도처럼 일렁인다고도 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소문의 진위여부에 관계없이 귀를 기울였고, 입소문에 민감한 아낙네들은 바람처럼 소문을 퍼 날랐다. 소문은 소문을 부르고, 말은 말을 낳았다. 빨래터 아낙들은 쥐어짠 빨래보다도 많은 말들을 이고 날랐다. 바지랑대 높다란 곳엔 소문이 펄럭였고, 젖먹이 아이들은 젖보다도 먼저 소문을 빨았다. 온갖 말들이 휩쓸고 간 들판엔 온전히 남은 겨울은 이미 찾아볼 수가 없었다. 들불처럼 번져가는 소문은 봄보다 못해도 예닐곱 날은 먼저 북상을 하며 패잔병들을 궁지로 몰았다. 더는 도망칠 곳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겨울은 전의를 상실하고, 백기를 흔들었을 뿐 더는 저항하지도 못했다. 마침내 봄은 온 대지를 점령하고서 앞다퉈 꽃을 피웠다. 볕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포근했다. 무겁고 칙칙한 외투를 벗어도 좋은 시간이 한껏 기다리고 있었다.


꽃은 피었다. 꽃으로 피기도 전에 들불로 먼저 매캐하게 타올랐고, 마을로 이어진 길을 따라 봉화처럼 말들이 피어났다. 골짜기마다 연기가 가득했다. 날짐승은 하늘을 배회하고, 들짐승은 밤마다 능선을 넘었다. 머물지 못하는 것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길에 늘어섰고, 건너편 길가에는 마중을 하기 위해 나온 것들로 북적거렸다. 알아서 편이 나뉘고 자연스럽게 길을 떠났다. 몇 개의 숫자나 인위적인 선긋기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강력한 힘이 있었다. 잠시의 머뭇거림은 퇴로를 여는 열쇠였고, 잠시의 동거를 통한 원만한 결별이었다. 멱살잡이로 번질 꼬투리가 아니었다. 물 흐르듯 바통을 주고받는 묘미라고 해야 할 터였다., 계절이 바뀐다는 건 그런 거였다. 어디 겨울에서 봄으로의 바뀜만 그랬을까? 봄과 여름의 길목에서도 그랬고, 여름과 가을이 바뀔 때에도 진통은 있었다. 한 번은 겪어야만 하는 통과의례였고 성장통 같은 거였다. 천지를 희롱하던 봄날은 허무하게 무너지기 일쑤였다. 잠들지 못한 봄비가 추적추적 새벽으로 이어지면 꽃들은 향기를 잃었고, 바람은 후덥지근한 남도의 열기를 퍼 나르기에 급급했다. 고양이 한가롭게 졸던 봄볕은 숨겼던 발톱을 드러냈다. 정수리의 햇살은 뜨거웠고 초록은 스스로 짙어져 그림자를 키웠다. 잠들었던 모든 것들이 순간으로 깨어나 아우성치는 시간에 계절은 여물었고, 이름을 바꿔 달았다.

멈췄던 숨골이 트이고, 잠자던 본능은 어린애처럼 깨어 울었다. 발정 난 고양이가 밤이 깊도록 울었고, 고라니는 덩달아 꽥 꽥 산에서 울었다. 소란스러운 밤이 지나고 햇살 퍼지면 비둘기는 비둘기 대로 암컷을 희롱했다. 마른 갈대가 바삭거리던 개울가에는 어른 키보다 훌쩍 키가 큰 갈대가 새들을 불러 모으고, 조막만 한 새들은 잔뜩 우거진 갈대숲에 의지해 둥지를 틀었다. 구애의 시간이었다. 짧은 해가 모자랐던 것들은 저녁이 이슼할 때까지 종종걸음으로 짝을 찾기에 바빴다. 맨 정신으로 동네를 어슬렁대는 건 바람이 전부였다. 먼 남쪽에서 온갖 소문을 퍼 나르고 숲이 술렁이기 시작했을 때 정작 바람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방관자의 하루는 바쁠 것도 없었고, 마음 휩쓸릴 것도 없이 유유자적 거들먹거리면 그만이었다. 알게 모르게 사방 천지에서 불꽃이 튀고, 밤이면 안개처럼 연기가 산허리를 감싸는데도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마른 풀숲에 기름을 끼얹고는 살살 부채질로 꼬드기더니만, 정작 숲이 들끓을 때부터 딴청만 부리고 있었다. 수다스럽던 입에는 자물쇠가 굳게 닫혔고, 참새 방앗간으로 드나들던 빨래터며 당산나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다가 발병이 났는지 더는 소문도 돌지 않았다. 바람이 어슬렁거리며 동네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논둑에 앉아 까박 까박 조는 날이 많아졌을 때부터 마을은 조용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밭에 심어놓은 콩은 손바닥만 하게 자란 이파리를 너풀거렸고, 꾀꼬리가 나오기 시작한 옥수수는 잔뜩 키를 키웠다. 그만큼 사람들의 손은 바쁘고 고단했다. 김을 매는 아낙들은 종일 밭고랑에서 기어 다녔다. 허리 몇 번 펴고 나면 저녁밥을 지어야만 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벼의 포기가 벌어지기 시작한 논에서는 개구리가 첨벙거리며 놀았지만, 피사리에 허리가 끊어져야만 해가 저물었다. 두런두런, 소곤소곤, 숲이 대신 시끄러웠고 군불도 때지 않은 구들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꽃잎을 떨군 나무들은 덩달아 붉은 열매를 잔뜩 매달고서 바람에 흔들렸다.


마당 가득 백합이 피던 날에 낫으로 꽃을 베었다. 마루에서 나뒹굴던 신문지 서너 장을 펼쳐놓고, 백합 몇 송이를 가지런히 키를 맞춰 둘둘 말았다. 잔뜩 멋을 낸 꽃다발이었다. 소년의 눈에는 그게 좋아 보였다. 개구리 입처럼 잔뜩 부푼 가슴으로 신작로를 내달렸다. 한 시라도 빨리 순이의 손에 꽃다발을 쥐어주고 싶은 마음은 조바심을 냈다. 평소보다 길은 곱절 멀기만 했고, 자전거는 또 어찌나 느려 터졌는지 몰랐다. 그나마 휘날릴 머리카락도 없었지만 스치는 바람은 시원했다. 페달을 밟는 소년의 장딴지엔 힘줄이 솟을 만큼 힘이 들어갔고, 가슴을 파고드는 꽃바람은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소년의 가슴에도 꽃은 피었고, 여름밤이 후끈거렸다. 마주오는 자동차는 불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오고, 계집아이가 눈에 삼삼했던 까까머리 사내 녀석은, 계집애 뽀얀 얼굴 떠올리며 헤벌쭉 웃었다. 지천으로 꽃은 폈고, 말들은 낯 뜨거운 구애의 몸짓으로 얼굴을 붉혔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은 턱수염이 까맣게 변했으며 계집아이들은 젖가슴이 눈에 띄게 봉긋해졌다. 계절이 바뀌듯 꼬맹이들의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연두의 여린 날은 저물었다. 계절은 짙푸른 초록으로 변했고, 연애편지를 쓰다 쾡한 눈으로 새벽을 맞은 소년은 제법 목소리가 굵어져 있었다. 성장의 계절이었다. 마디마다 숨겨져 있던 것들이 알아서 일어났다. 마디 하나가 굵어지면 솜털이 수염으로 자랐고, 목소리는 점점 사내의 것으로 변했다. 없던 목젖이 생겨 신기했던 날에는 몇 번이고 불거진 목젖을 만져보기도 했다. 대나무의 마디마디가 몸집을 키우듯, 한껏 들뜬 날들이 뼈마디를 단단하게 성장시키고 있었다. 몸살로 끙끙 앓아야만 하는 날들도 있었다. 성장통 없이 계절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수컷은 암컷을 찾았고 나비는 꽃을 찾았다. 여물어 이름을 찾는 밤에 고양이는 애 울듯 울었다.


백합꽃 받아 들고 말도 없이 달아난 계집애는 여전히 예쁘겠지? 어김없이 계절이 돌아오고, 익숙한 꽃이 필 때면 주절거리게 된다. 입술 달싹거리며 아주 오래된 기억이 하나 둘 고개를 쳐들고는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봄날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여름은 뜨거웠다. 옛집을 헐어내고 들어선 양옥집이 그 터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고, 그때부터 계속 피고 지는 백합은 여전했다. 은은한 달밤에 맡는 백합 꽃향기는 몸서리치게 짙고 그윽해다. 지금이라도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굴려 소녀에게 꽃다발을 내밀고 싶었다. 낫으로 쓱쓱 베어낸 백합은 희고 깨끗할 터여다. 문구점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온갖 포장지는 여전히 필요치 않았다. 보고 접어놓은 신문지 몇 장이 더 어울릴 꽃이다. 어설프게 말아놓은 꽃다발이 눈에 아른거렸다.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달아나던 소녀의 홍조 띤 얼굴이 좋았다. 촌스럽고 어설픈 말들이 예뻤고, 여전히 방죽으로 이어진 둑길을 걷는 게 편하고 익숙한 촌놈이 있을 뿐이다. 몇십 년을 사이에 두고 단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까까머리 사내 녀석은 막 피기 시작한 백합 몇 송이 낫으로 베어다가 신문지에 둘둘 말아 들고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다만, 오늘 너는 말도 없이 돌아서지 마라! 계집아이에게 다짐이라도 받듯 말을 웅얼거리며 그때 그가 달렸던 길을 달렸다. 계절은 늘 아우성치며 이름을 바꿔 달았다. 때로는 온산을 다 태워버릴 기세로 들을 점령하고 산기슭을 기어올랐다. 들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