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 조소, 읍소, 연소
"죽이는 SNS를 만들러 왔습니다"
특이한 일이다. 국비지원 교육과정은 받는 내가 말하긴 뭐하지만 1차 지식노동자 보급체계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공고를 나와서 생산직 실습 보내는 거랑 비슷한. 그런 면에서 죽이는 SNS라는 건 마치 동네 복싱체육관에 등록한 학생이 복싱은 왜 배우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메이웨더 좀 줘 패려고요. 와 같은 느낌이 든다. 젊은이의 패기는 즐겁지만 시선에는 냉소가 서리고, 직업병처럼 웃는 강사는 역시 직업병처럼 웃으며 열심히 해보라는 말을 남긴다. 열심히.
세상 사람들은 간혹 지식노동이 당장 열심히 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것 같다. 혹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다고 믿게끔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지식노동도 육체노동도 완전한 초심자를 위한 판은 없다. 노가다도, 청소도, 출장뷔페도 근무 첫날, 이튿날, 일주일, 한 달 정도는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피로감이 전신을 짓누르며, 요령껏 쉬고 요령껏 일하고 요령껏 효율적으로 몸을 굴리는 일은 그 이후의 일이다. 몸을 꾸준히 단련하거나 써 온 사람은 한 달이 하루나 이틀로 줄어들 수 있고, 몸을 전혀 쓰지 않은 사람은 꽉 차게 한 달이 걸릴 뿐이다. 그리고 어떤 절박한 이유가 없다면, 대체로 후자는 한 달이 되기 전에 다른 일을 하러 떠난다.
그 친구는 지식노동에 있어서는 정확히 같은 상황이었다. 대체로 지식활동을 어떤 식으로든 꾸준히 해 온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자신의 학습능력을 파악하고 있고, 모르는 것을 익히는 자기만의 방식들을 나름대로 체화하고 있다. 누군가는 여러 번 읽는 걸로, 누군가는 쓰는 걸로, 누군가는 쓰고 읽고, 설명하고, 개념도를 그리고, 문제를 풀고, 복습 시간은 얼마나 잡아야 하고, 오늘 미루면 내일 얼마나 버벅 일지를 알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당히 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친구는 아니었다. 모르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했고, 이해하기 위한 작업 역시 더뎠다. 누가 봐도 열심히 한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누가 봐도 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못했다.
하루 9시간이 넘는 지식노동을 강제받는 상황에서, 그 친구는 자신에게 할 수 있다는 말을 해 준 강사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이미 교실에서는 지식노동에 익숙한 이너 서클 그룹의 냉소와 비웃음에 한참 노출되어 있었고, 또 다른 나머지에게는 그 친구의 질문이나 버벅거림이 방해처럼 느껴졌으며, 이도 저도 아닌 이들에게는 그저 프로젝트에서 엮이고 싶진 않은데.. 하는 소극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고립되어 있었고,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그러한 공기와 자신을 짓누르는 이해하지 못한, 따라가지 못한 지식의 양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하는데 안됩니다. 뭇사람들은 거기에 또 한 번 냉소를 보냈고,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찡그린 얼굴을 삼을 뿐이었다.
낙오의 경험은 어떤 것인가. 그건 공포이기도 하고 혐오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가치는 땅바닥 위로 철퍼덕하며 떨어지고, 힘겨운 존엄의 포기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공포는 이를 악물게 한다. 이를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악물다가 이내 낙오해 버릴 때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낙오의 경험이 없는 이는 축복받은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순간에 낙오를 한 경험이 있었고, 다만 운이 좋아 잘 지나왔다는 생각을 한다. 이를테면, 나이 서른이 다 된 이가 누군가를 붙잡고 펑펑 운다는 것은,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직전인 나를 제발 구해달라는 비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시스템은 낙오자에게 낙오하게끔 만든다. 그것이 모두에게 공적 이익을 가져다주므로- 강사는 그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고, 사람들은 그 사람의 낙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이 내가 아니라 오로지 다행일 뿐. 그것이 '공적'이라는 이름이 붙을만한 이익인지는 사실,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강사는 결국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될 거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고 싶었다. 대체로, 처음 접하는 영역도 들이받다 보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쌓이고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점점 되게 된다. 저 사람은 그때까지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시기는 언제 오게 될까. 모두의 삶이 달랐던 만큼 모두에게 다른 시간은 과연 그에게 언제쯤 손을 내밀어 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때 즈음, 그에게서 아직 통곡의 기운이 가시기도전에 사람들의 원성 어린 눈빛과 함께 진도를 나가기 시작한다. 나 역시, 프로젝트로 비추어지는 화면을 따라 바삐 손을 움직인다. 나의 낙오가 지금이 아님을 안도하며. 비릿하게 상해 가는 마음을 숨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