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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행복할 수 있을까?

내일(來日)은 ‘내 일(業)’로 가득차야 한다

by 저스틴


나는 어릴 때 왜 행복했을까?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것은 어떤 자리, 조건, 돈, 명예가 아니라,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마구 떠올렸고,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부모의 도움이었건, 어떤 환경의 부유함이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들이 도움을 준 것은 맞지만, 그 조건이 동일하게 부여받는다고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었고, 내 하루를 온전히 나의 의지와 열정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했고, 하루종일 뛰어놀아도 지치지 않는 원동력이었다.


지금은 왜 행복하지 않을까?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어서 행복하지 않다. 왜 할 수 없을까? 자리, 조건, 돈, 명예, 외부의 시선이 나의 순수한 의지와 열정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열정을 죽이라고 배웠고, 하고 싶은 건 뒤로 미루라고 배웠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면 먼저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성실히 수행하라고 배웠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뒤로 미루게 되었고, 미루고 또 미루자 이제는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 모든 질문들에 선뜻 답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순수하고 맑은 눈으로 ‘대통령이요!’라고 외치던 어린 나의 모습과 정반대로, 나의 눈은 흐리멍텅하게 초점을 잃었고 ‘잘 모르겠어요’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저그런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다시 행복할 수 있을까?

나의 의지와 열정을 다시 살려야 한다.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마주해야 하고, 싫증나고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멀리해야 한다.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합리화시키지 말아야 하고, 머물고 싶지 않은 공간은 머물지 말아야 하며, 나의 기분을 망가뜨리는 사람과의 만남은 피해야 한다. 나의 꿈과 열정을 폄하하고 짓누르는 지인과는 관계를 끊어야 하며, 집안이 갑갑하면 부모에게서 자립할 수 있는 굳건한 용기와 끈기도 필요하다. 무엇이든 내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내가 그 누구보다 행복해야 하고, 내 오늘 하루가 그 어떤 어제보다 가득차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 내일을 꿈꾸며 미소 가득 머금은 채 잠들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일을 기다리는가, 내일을 걱정하는가.


내일(來日)은 ‘내 일(業)’로 가득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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