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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cdote Apr 21. 2016

인간관계

다들 이런 걸까? VS 내가 부적응자 인걸까?


/160420


체육시간에 친구가 나와 짝을 하지 않아서, 화장실에 함께 가주지 않는다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아침에 눈떠서 저녁에 잠들기까지 하루를 함께 하던 친구들과 공감하고 어떻게든 닮는 것이 내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대학교에 입학하여 '동기'는 학창시절 친구들을 대신 했다. 다른 점은 출신, 배경 등이 다양했고, 20살이라는, 성인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더이상 팔짱끼고 급식실로 뛰어가는 관계는 맺을 수 없어 보였다.  (운좋게도 나는 그런 관계를 대학에서 쌓았지만,)


또한 나를 사랑하고 무조건적인 지원을 해주는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노력이 필요함을 깨달았고, 그들을 위로 할 줄도 아는 어른의 역할이 주어졌다.



해가 거듭 될 수록
나의 관계 울타리는 자연스레 넓어졌다.
성별, 나이, 배경, 국적을 막론하고
다양한 이들이 들어와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본인만의 스토리를 지닌 이들과의 만남은 나의 가치관, 성격, 태도에 좋은 영향을 끼쳤고 나를 성숙하게, 나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한편 실연과 인간관계의 트러블, 고민, 회의감이 문득 끼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내 주변엔 좋은 이들이 많다!' 라고 다독이며 모든 관계에 열심이었다.





까닭은,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까닭은, 다른 이들의 삶은 흥미롭고

또 까닭은, 인간관계의 고민과 회의감은
 곧 '실패자' 혹은 '부적응자'일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페이스북 출처의 공감 글귀





나의 인간 울타리는 어느순간 더이상 커지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이상 열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집중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되려, 아등바등 챙기던 관계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그렇게 서서히 옅어지게 놔두곤 했다.)



많은 피로와 회의감이 나의 인간관계에 잦아들었고, 더이상 새롭지도 가꾸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잘못 된 것일까.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인가 라고,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 잘못된 상태라고 생각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나는 새로운 인간관계에 국면한 것이다.  

이건 또 다른 모습의 인간관계이다.






1) 친구 관계.

우정에 관한 글 하나를 읽었다.

어떤 관계에서 8할이 스트레스인 고된 무게를 견디면서도 남은 2할의 뭔지 모를 것들.
아마도 함께 한 시간으로 쌓은 정?
아무튼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나를 희생하던 때가 있었다. 그 관계를 끝내면 우정도 끝나고, 인생도 시시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그 관계를 벗어나니 내 인생은 훨씬 더 행복해졌다. 주변에 좋은 사람만 두는 적당한 필터링도 나 자신을 위해선 확실히 필요한 것이다.


 '오랜 친구들' 은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고, 나의 모든 것을 공유해온 이들이기에 그들이 없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며 서로가 소홀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기도 했지만) 그들은 내게 있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믿는 구석'임과 동시에 그냥 '늘 원래 있던 사람들' 이었다. 어떤 의심이나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함께 해 온'이라는 수식을 빼면 그들은 나와 참 다르다고 느꼈다. 우린 각자의 삶에서 변했고, 심지어 어른이 되어 만났다면 이 정도로 까지 친해졌을까? 싶은 의문도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나쁜 애이고, 오랜 친구를 지켜내지 못하는 나는 인간관계에 젬병이란 생각에 슬펐다.


분명 위의 글 처럼 8할 이라는 친구들의  부재는 시련 앞에서 기댈 곳 없이 느껴져 외로울 터지만, 반대로 그들이 있어도 외로웠고 삶은 온전히 혼자 견뎌야 했고, 또 잘만 굴러갔다.




고로,
나는 '베스트 프렌드' 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독고다이 마이웨이가 아니라
스스로 '오랜 친구' 라는
타이틀을 붙여 인내와 깊은 의미를
부여하던 일을 멈추기로 했다.

그들도 내 삶에 한 부분 정도로 남겨두니
훨씬 상처받거나 회의감 드는 일이 줄었다.




2) 가족 관계.

엄마도 상처 받는다.

엄마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싸웠지만 늦은 저녁 귀가한 나에게 "밥은?" 이라고 묻는 사람이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만,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도 여자이고, 엄마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라는 것이다.


엄마에게 보낸 카톡 중 한 사진.

부모님을 이해하고 돌봐드려야 하는 관계는 낯설다. 여전히 스스로를 어리다고 생각하고 나의 버팀목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일을 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


늦잠잔 것을 깨달았을 때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하는 데 내 물건들이 어디 갔냐며 짜증을 퍼붓곤 한다. 아마 난 죽을 때 까지 그리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어서도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치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위하려 노력하고 있다.
1) 표현하고 2) 연락하기

온전히 헤아릴 수 없다해도 혹은 굳게 먹은 마음마음이 온데간데 사라져 버럭해버린다 해도, 할 수 있을 때 해드릴 수 있는 것들을 해드리면서 이해하려 노력하고 오래 함께이고 싶다.




3) 직장 내 관계 (사회 속 관계)

이런 생각이 든다.

매사에 착한 사람도 없고,
날 때부터 나쁜 사람도 없다.
상황에 따라 자기 삶 사는 사람들일 뿐


이런 일이 있었다(1)

입사 한 지 한달이 좀 넘었을까, 일 하나를 처리 했는데, 어찌되었든 규정을 어긴 것은 아니었으니 망쳤다는 생각은 안했다. 그치만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귀찮아 졌으니 그건 죄송했다.


나를 부른 부서 사람은 내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해야 했는지' 대신 짜증을 냈다. 나는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당황 했으나 규정에 적힌 항목을 짚으며 결백을 주장하는 대신 내 잘못이니 죄송하다 하였다. 나는 어리고, 두달 된 신입이었으니 그의 짧은 말을 참아야 하는 게 맞는 걸까? 인사를 잘하라는 말 등 업무와 동 떨어진 부서 사람의 말에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답했다.


나는 그를 예민하고 불쾌한 사람이라고 욕을 했을 수도 있다. 과연 그는 이상한 사람일까 ? 그렇지 않다. 딸 아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해내는 누군가의 아버지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 당시 상황 속에서 그는 그냥 화가 났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2)

면접 날, 먼저 면접을 보고 온 사람들은 까칠하고 날 선 질문 많이 하신 분이 계시다고 귀뜸해주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면접실에 들어섰고, 긴장한 탓인지 전해들은 이야기를 신경 쓸 새 없이 답변 하기 바빴다.


입사 후 나는, 자칭 '까칠하다던 면접관' 을 상사로 두게 되었다. 그는 목소리가 크고 사투리를 쓰기에 자칫 들으면 엄해보이는 말투다. 그러나 다정하진 않지만 본인의 일을 성실히 하시고, 서툰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컴퓨터를 하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시곤. 진지한 태도로 메모를 하신다. 그래, 나의 상사는 까칠 하지 않다.


업무를 맞춘 지 3달 째, 큰 회의를 준비했다. 큰 회의인 만큼 준비 기간도 길었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살가운 농담들 대신 실수를 줄이기 위한 재차 확인 물음에 예민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냥 사람이다. 누군가에겐 자랑스런 아들, 든든한 남편, 사랑하는 아버지, 재밌는 친구.


나 역시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기분이 좋은 날 긍정적이고 살가운 사람이라면

몸이 아프거나 일이 꼬이는 날엔 한 없이 우울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럼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이상한 사람인가?




"원래 그런 사람이니 상처받지 말라",
"관계에 있어 쿨해져라" 란 소리가 아니다.

나 자신을 떠올리며 타인을 생각하니
여전히 흠칫 상처를 받되,
사람을 미워하진 않더라

우리 모두 그냥
'자기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4) 연인 관계

나를 버리지마! 내가 잘해줄게!

애타는 마음과 눈물 없는 연애는 뜨겁지 않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것은 함께하는 연애가 아니라 생각했고, 쿨한 척하는 연애라 여겨왔다.


그래서 일까 나는 매 연애에 최선 그 이상으로 목숨을 걸어왔다. 상대에 대한 마음이 커서이기도 했고, 인연을 만남과 동시에 혼자 였을 때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아서 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웠다.




서로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나는 마음이 아직 남았는데, 이제 아니야 라며 선을 긋고 나를 몰아내는 그 앞에서 내 자신을 늘 잃어 왔다. 한 발짝 떨어지기 보다 더 매달리고 가까워지려 했다. 이미 떠난 걸, 내 노력과 별개인 걸 알면서도 마치 "더 잘할게! 날 두고 가지마!" 라고 외쳤던 것 같다.



유치한 자존심에 후회 하는 꼴이 싫어, 나빴다면 경험이라고 포장하지만 겪지 않아도 배울 수 있다면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만남들에서도 나를 잃어버렸던 것은 분명 내 안의 고질적인 연애 습관 때문 일 것이다.


나의 연애,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남을 탓했던 시간동안 '좀 더 힘내보자, 이번엔 다를거야' 라고 스스로를 토닥여도 보고, 속내를 숨기고 마음을 주지 않아보기도 했다.


말 그대로 별 짓(?) 을 다 해보는 데,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모든 것을 멈추었다.


내가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 라며 다른 이를 붙잡고, 친구에게 위로를 바라며 울고 불고 하는 동안



내 곁에 늘 있던 건 '나'
안아줘야 했을 사람도 '나'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도 '나' 였다.



이별 후 성숙해 진다는 말, 나에겐 조금 다르게 와 닿는다. 매 순간 헤어짐의 감정을 참아내면서 나를 더 마주하고, 다독이며 괜찮을 거야 라고 버텼다. 그 과정이 내겐 끝나지 않을 거 같은 긴 시간이었지만 타인들은 그 시간의 나를 그 어느때보다도 몰두하고 반짝 빛나던 나로 기억하는 걸 보면. 분명 나는 헤어짐 뒤에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가 보다라고.


헤어짐 앞에 무뎌질 날이 올 리 만무하지만, 아직도 관계에서 쿨한 척못하고 싫은 소리 못해서 예스맨 노릇을 할 지 모른다. 그치만 적어도 자신을 잃지 않는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발전된 관계를 맺는 태도로 이정도면 만족한다.




정답 없는 관계들,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계속 될 것이다. 그냥 다들 이런가보다 하고 가식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다 정리하고 혼자 살아갈 수도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엉 울수도 있지만. 우린 결코 혼자 살 수 없다.


어쩌면 오늘도 '나는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일까?', '더이상 어린시절처럼 진정한 관계는 없는 걸까?' 라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글을 나누며!




"저도 그래요.
저도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일이
어렵고 지칠 때가 있어요.
겉보기엔 문제 없어 보이지만
고민이 많아요.
우리 다 똑같아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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