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를 가지고
시간은 편도행입니다.
오직 앞을 향해서만 나아갈 뿐 결코 뒤돌아가지 않습니다.
잠시 고개 돌려 뒤돌아볼 순 있지만 눈길이 향한다고 방향까지 바꿀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정신은 종종 시간을 역행하기도 합니다.
시간은 물질과 함께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지만 정신은 역행한 과거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기도 합니다.
고정된 정신, 멈추어버린 시간.
그곳이 괴로움이든 찬란함이든 기억과 선망이 강렬할수록 정신은 그곳에 더욱 강하게 머무르려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실제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은 물질과 함께 나아갈 뿐이니 육체라는 물질을 가진 우리의 존재는 결코 어느 한 곳에 고정될 수 없습니다.
정신이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물질이란 강력한 형태로 이루어진 세계이기에 우리는 결국 흐름에 떠밀려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정신이 계속해서 고정되고자 한다면 결국 우리의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유령이란 존재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신만 과거에 붙들린 채 껍데기만 한없이 나아가는 존재. 그것이 유령이 아닐까요?
그래도 되는 걸까요?
그것이 옳은 걸까요?
지나온 시간들이 종말을 노래할 때 그곳의 강렬한 기억에 머물러 어떻게든 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자 발버둥을 치는 것.
그것이 맞는 걸까요?
아니면 지나온 기억들의 아름다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며 굿바이 키스를 하고 온통 암흑 투성이인 미지의 세계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맞는 걸까요?
우리의 삶은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상은 각자의 환경과 개성이 오랜 시간 여러 번의 조정과 합의를 거쳐 만들어낸 한 개인의 반복적 삶의 형식 또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반복되는 일상은 지루할지언정 삶의 균형을 유지시켜주고 오류 투성이인 인간 세상에서 우리 정신이 살아갈 수 있게 지켜주는 고마운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은 한순간에 산산이 흩어지기도 합니다.
종잡을 수 없는 운명이란 이름의 신은 때때로 거친 폭풍을 몰래 준비해 아무런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우리 삶의 한가운데 장난스레 그것을 툭 하고 던져 놓습니다.
그렇게 던져진 엄청난 폭풍은 단단히 쌓아놓은 일상을 순식간에 파괴하고 정신을 뒤흔들어 지금까지의 삶에 작별을 고하라고 큰 소리로 외쳐댑니다.
운명이 던져주는 폭풍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너무도 강력하기에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난파된 배의 귀퉁이에 목숨만 간신히 붙은 채 매달려 파괴되고 사라져 버린 흔적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난파된 배의 잔해에 매달려 평생을 있을 순 없습니다.
폭풍이 지나간 후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조류를 따라 어디론가 다시 흘러가야 합니다.
운명의 폭풍은 파괴적이고, 시간은 편도행이지만 그것이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내 주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모르는 모든 사람들, 나아가 형태를 지닌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파괴와 흐름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함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오직 파멸일지라도 나아갑니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그렇게 함께 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오늘이 어제가 되고 먼 과거가 된다 해도 그곳에 남겨진 것들, 두고 온 것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인연의 길이 어느 날 문득 그 끝을 보이고 함께 온 길에서 벗어나 각자의 방향으로 떠나갈 때라도 함께 걸어온 그 시간은 사라지지도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
또한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감에도 서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을 함께할 거라 믿었던 인연을 더 이상 보지 못해도 우리는 어디선가 함께 가고 있으며 지나온 시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찬란히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를 미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인연의 다함에 괴로워하고 나와 상대를 괴롭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비록 이별이 주는 강렬함이 우리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고 두드려 상처를 낸다 해도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슴 아픈 헤어짐 속에서도 마치 학교를 마친 후 헤어지는 친구처럼 아쉽고도 정답게 활짝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별에 있어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서로와 지나온 삶을 모두 나쁜 것으로 만드는 일이며 그것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이 세상에선 바람직하지 못한 일일 것입니다.
서로를 아무리 미워하고 과거에 아무리 머물러 있고자 해도 시간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우리를 잡아끌고 묵묵히 묵묵히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괴로움에 잠식되어 미워하는 것, 괴로움을 받아들여 나아가는 것.
무엇이 맞는 건진 잘 모르겠습니다.
나무가 한 송이의 꽃을 피워내는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 아름다움이 세상에 머무는 건 잠깐입니다.
기나긴 우주의 시간에선 찰나보다 더 작은 순간입니다.
어쩌면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고 공을 들이는 모든 일이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유지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건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시행한 그 노력 때문이 아닐까요?
활짝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은 사실이지만 새눈의 싱싱함과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 그리고 죽어가는 나무의 비썩함에도 아름다움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우리의 것이듯 다가올 시간 또한 우리의 것입니다.
나는 유령이 되긴 싫습니다.
무엇이 맞는 건지, 앞으로의 시간에 어떤 일이 더해질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선의를 가지고 나아가고 싶습니다.
인연의 시간이 다했더라도 선의를 가지고 작별을 맞이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함께한 사람들, 함께할 사람들에게 선의를 가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삶의 목적과 의미가 모두 허상이라도 우리가 서로에게 선의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나아가는 우리 삶이 조금은 더 좋아질 것이라, 조금은 더 나아질것이라 나는 믿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매우 슬픕니다.
그럼에도 슬픈 채로 나아가보려 합니다.
선의를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