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앤
'빨간머리 앤' 시리즈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주인공에만 집중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앤 뿐만 아니라 앤의 가족들, 친구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골고루 펼쳐지고 함께 변화하고 성장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살아간다.
이 문장에 나와 있는 '가장 밝은 것을 찾을 줄 아는 사람'
솔직히 시즌3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이 시리즈가 이대로 끝이 나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다.
행복의 기술을 가진 아이니 누가 보든, 보지 않은 어디서나 용감하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즌을 모두 시청한 지금, 말할 수 없이 먹먹한 기분이 든다.
불꽃의 아이가 그 불꽃을 흩날리며 앞장서 나아가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일까?
흙과 불의 머리칼로 웃고 떠드는 사랑스러운 불꽃의 소녀를 볼 수 없어서일까?
시리즈를 보며 울고 웃기를 수없이 반복하여 정이 들었기 때문일까?
때로는 가족처럼 때로는 나 자신처럼, 그렇게 앤을 느꼈기 때문일까?
내가 앤 이고 앤이 나여서일까?
어떤 이유이든 이 먹먹함은 한동안 갈 듯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이 시리즈를 10대나 20대에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좀 더 젊고 어린 시절에 이 시리즈를 보았다면 지금의 먹먹함을 감당하기가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빨간머리 앤'을 보면서 참 많이도 웃고 울었다.
이 리뷰를 쓰는 지금도 웃고 울고를 반복하고 있다.
시리즈가 모두 끝난 지금, 앤에 대해 내가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
시리즈를 보는 동안 알아챈 거지만 나는 처음부터 앤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기대란 앤이 '똑똑하고 용감하고 강하며 뛰어난 상상력과 순수한 솔직함으로 모든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이끌 것'이란 기대였다.
앤이 그런 자질을 당연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시즌 1을 보며 당황스러웠던 건 그런 이유였다.
앤은 그저 아이였다. 혹독한 현실에 그저 겁먹은 아이였고 사랑받길 간절히 원하는 떠벌이 고아 소녀였을 뿐이다.
그렇다. 앤은 아이였다.
또래보다 약간 더 힘든 경험을 한,
그래서 가슴에 조그만 불꽃을 품게 된,
살아남기 위해 또래보다 조금은 똑똑하고 그래서 연약한,
그런 아이였다.
사랑받길 원하고 사랑하길 원한 사람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내가 부끄러워졌다.
저 조그만 아이에게 내가 무슨 기대를 했는가?
단지 사랑받기만을 원했던 작고 연약한 아이에게 나는
남들보다 뛰어남을 요구했고
남들보다 용감함을 요구했고
남들보다 기발함을 요구했다.
이것이 내가 앤에게 사과를 하는 이유이다.
돌이켜보면 앤이 '미니 메이'를 치료하는 이야기는 정말 슬픈 이야기다.
도대체 어린아이가 왜 그런 걸 알아야 한단 말인가?
사랑이 필요한 아이가 도대체 왜 아이를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기에 앤이 더욱 빛난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상황에도 가슴속 불꽃을 소중히 지켜내었고 결국엔 그것을 살려내었으니까.
그녀가 빛나는 것은 특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작은 불꽃을 소중히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가슴속 불씨를 따뜻하게 살려내어 온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카퀫'이 말한 앤의 '강하고 용감한 마음'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불이란 다스리지 않으면 때때로 요동치는 법.
시리즈를 보면 앤이 가진 그 불꽃이 갑자기 엉뚱하게 터져 나올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참 좋았다.
레이첼에게 잔뜩 화가 나 독설을 날릴 때,
길버트의 얼굴을 칠판으로 후려칠 때,
불붙은 마음을 어쩔 줄 몰라 농장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또 달릴 때,
정말 불꽃의 아이고 사랑해 마지않을 수 없는 아이다.
앤이 말한다.
"나는 우리 엄마를 닮았어"
혼자가 아님을, 버려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그렇게 말한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