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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발생

2020년 06월 16일

by 천우주

우렁찬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알람이 울 때마다 느끼지만 나의 알람 소린 위아래 옆집까지 깨울 만큼 너무 크다.

손을 더듬어 휴대폰의 알람을 진정시키고 덜 깬 눈으로 흐릿한 방 안을 둘러봤다.

구석구석이 환한걸 보니 바깥 날씨가 짐작되고도 남았다.

일어나 창 밖을 보니 그야말로 쾌청한 날씨. 구름 한 점 없다.

시간은 말 그대로 해가 중천에 가까운 때. 그럼 어떠랴. 휴일인데.

오랜만에 늦게까지 잠도 잘 잤다.


그래서 그랬을까?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부스스한 몸을 이끌고 소파에 앉아 어디로 가볼까 생각해 본다.

떠오르는 곳은 A와 B 두 군데.

둘 다 1시간 내외면 갈 수 있는 거리고 바다가 있는 곳이다.

A와 B 모두 같은 방향이지만 B가 1~20분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잠시 생각하다 조금 더 가까운 A에 가보기로 한다.


쾌청한 날씨와 따뜻한 기온 속에 즐겁게 나섰지만 한참을 가다 보니 왠지 A로 가는 게 싫어지기 시작했다.

B로 갈까 몇 번을 망설이다 운전이 귀찮아 조금 더 가까운 A로 가기로 원래의 마음을 굳힌다.

이윽고 A에 다다를 무렵 저만치 앞쪽 도로에서 공사가 한창인 게 눈에 들어왔다.

아스팔트 재포장 공사였다.

그때 차를 돌렸어야 했다.


공사 구간은 줄잡아 1km 정도였는데 도로의 반을 뜯어내고 시커먼 아스팔트를 잔뜩 부으면서 다지고 있었다.

통행을 막아놓은 공사 구간 도로엔 악마의 반죽 같은 시커먼 아스팔트가 허연 김을 펄펄 내며 죽은 용암처럼 흐르고 있었고 통행을 열어놓은 공사 전 도로엔 부서진 도로 파편과 자갈들이 난무했다.

거기다 악마의 사체에서나 나올법한 시커먼 타르가 바닥 군데군데 흐르고 있었다.

느낌이 왔다. 저 구간을 차가 무사히 빠져나가진 못할 거라고.

하지만 어쩌랴.

왕복 4차로 도로에서 두 개 차선을 막고 두 개 차선만 열어놓은 편도 1차로에서 차를 돌리기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천천히 달리며 공사 구간을 빠져나와 갓길에 차를 세우고 피해를 살펴보았다.

피해는 예상대로였다.

아니 예상을 훌쩍 넘어버렸다.

바퀴와 물받이는 물론 양문짝과 범퍼까지 아주 꼼꼼하게 타르 범벅이 돼있었다.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하얀색 새 차가 순식간에 투톤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난감함과 속상함이 교차했지만 어떻게든 이놈을 닦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가까운 세차장을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없다. 도시의 외곽에서도 좀 떨어진 곳인지라 이런 곳에 세차장이 있을 리가.

그렇다면 아는 데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세차장은 집 근처 있는 셀프 세차장 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차가 엉망이 된 상황에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일단 집으로 차들 돌리기로 했다.

물론 좀 전의 공사 구간을 다시 지나쳐야 한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이미 차는 엉망이 되었으니 한 번 더 지옥의 길을 지나는 것쯤은 말 그대로 사소할 뿐이었다.

그래도 이왕 나온 거 그냥 돌아가는 게 아쉬워 예전에 한 번 가본 적 있는 근처의 경치 좋은 휴게소에 잠깐 들러 바다를 보았다.

그렇게 잠시 숨을 돌리니 타르 범벅 차를 보며 받았던 충격도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잠깐 숨을 고른 후 세차장으로 향했다.

세차장으로 가는 중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물과 세제만으로 타르를 지우기는 힘들 것 같아 중간에 마트에 들러 타르 제거제와 타월 몇 개, 그리고 모든 때를 지워준다고 적혀있는 만능 클리너 티슈를 한 통 사서 세차장으로 갔다.

이제 지우기만 하면 되었다. 노력과 수고만 더한다면 모든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것이다.

하. 지. 만.

인생사 어디 내 생각대로 흘러가는가.

물과 세제론 기름 덩어리인 타르가 지워질 리 없었고 타르 제거제는 타르를 녹이긴 하나 그것을 차의 도장면에서 완벽히 떨어져 나가게 해주진 않았다.

결국 녹아내린 타르를 닦아낼 수밖에 없는데 들러붙은 타르의 양이 너무 많아 걸레 몇 장으론 도저히 닦아낼 수 없었다.

오히려 녹아내린 타르를 닦아내느라 문지른 부위가 더욱 광범위하게 퍼져 차를 더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난감했다.

도저히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타르 범벅이 된 손에 타르 범벅이 된 걸레를 들고 망연자실해 있는 내게 보다 못한 세차장 사장님이 다가와 말씀하셨다.


"이건 세차로는 못 지웁니다. 광택 가게에 가서 지우셔야 될 겁니다."


'지울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사장님께 정말 이 타르 덩어리들을 지울 수 있는지 재차 물었다.

사장님은 다시 한번 친절하게 오염이 심한 차는 광택 가게에서 지우는 거라고 말씀하시고 근처 잘 아는 광택 가게까지 알려주셨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스무 번쯤 한 뒤 나는 서둘러 사장님이 알려준 그 가게로 향했다.

가게는 가까웠다.

그곳에 도착해 사장님을 만나 오염 경위를 간단히 말씀드리고 ㅇㅇ셀프 세차장 사장님 소개로 왔다고 얘기하였다.

내 말을 들은 후 광택 사장님은 차를 한 번 스윽 둘러보시곤 이렇게 말했다.


"좀 지우다 오셨나 보네요"

"예, 세차장에서 지워봤는데 도저히 안 지워져서 이렇게 왔습니다."

"흠. 그럼 그냥 그렇게 지우시면 됩니다. 제가 지워드릴 순 있는데 그러면 괜히 돈 쓰시는 거고 그러지 말고 저쪽 그늘에 가서 살살 한 번 지워보시지요. 여기 걸레도 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무상으로 거의 스무 장 가까이 되는 깨끗한 세차용 타월을 내 손에 쥐어주시곤 지우는 방법과 요령까지 설명해 주셨다.

다만 아까 사놓은 타르 제거제를 거의 다 써버려 난감했지만 다행히 그곳에도 타르 제거제를 팔고 있어 그것만 두 통을 더 사서 나는 광택 가게 앞 공터의 그늘에 차를 세우곤 타르 제거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4시간가량 타르와의 사투 끝에 드디어 눈에 보이는 자국들을 모두 지울 수 있었다.

사장님 말대로 괜한 돈 안 들이고 혼자서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100% 완벽하게 제거한 건 아니다.

바퀴 안쪽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부 부분, 그리고 틈새 부분 부분까진 완벽히 지워내진 못했다.

그래도 겉으론 멀쩡한 차처럼 보일만큼은 충분히 닦아냈다.

드디어 해결이 된 것이다.




문제 발생.

오늘 내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던가.

타르 범벅이 된 차?


맞다. 구입한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는 새 차가 타르 범벅이 된 사건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은 두 번째 문제밖엔 되지 않는다.

오늘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타르 범벅이 된 차를 보고 그보다 '불안'이란 이름의 타르로 더욱 범벅이 된 내 마음이었다.

타르가 잔뜩 묻은 차를 바라보며 나는 자책감과 분노가 번갈아 일어났다.


'내가 거길 왜 갔을까?'부터 시작해서 쓸데없이 길을 나선 것에 대한 자책, 굳이 공사 구간인걸 알면서도 그곳을 지나간 것에 대한 자책, 되는 일도 하나가 없다는 자책 등 자책이란 자책은 모두 다했고 공사를 하며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은 그곳의 사람들과 해당 지역의 공무원들에 대한 분노도 일어났다.

나아가 차를 괜히 바꿨다는 생각도 했고 돈을 버린 것만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하루종일 나를 엄청나게 괴롭혔다.


사실 차가 뭐 별 거 있겠는가?

원하는 곳까지 조금 편하게 조금 빠르게 이동시켜 주는 수단에 불과한데.

거기다 오염 좀 되면 어떤가. 사고만 안 났으면 됐지.

아무리 새 차라도 사는 순간 중고차인 거고 갈수록 더욱 중고차가 되어갈 건데 타르 좀 묻었다고 뭐 어떤가.

만일 사고라도 나서 사람이라도 다쳤으면 어땠겠는가. 그것보단 훨씬 낫지 않는가.


맞다.

그런데 머리는 이걸 맞다고 하는데 마음은 아니라고 한다.

이걸 어쩔 거냐?

차를 팔아야 하나?

비싼 광택과 코팅을 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다가 다시 자책과 분노로 넘어가는 무한 반복을 하루종일 했다.

예전엔 이런 상황에 지금보단 의연히 대처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으니 어째 마음이 예전보다 더 쪼그라든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고 현명 해지는 건 진짜 아닌가 보다.

예전엔 이런 상황에 좀 의연하게 대처한 것 같았는데 나이가 들어 그런지 마음이 좀 쪼그라든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고 현명 해지는 건 진짜 아닌가 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마음 졸여봐야 아무 소용도 없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은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하지 않는다.

마치 악동같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 같이 그냥 냅다 치달릴 뿐이다.




마음이 가라앉은 지금, 정신없이 보낸 하루를 생각하니 조금은 우스워진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일에, 무엇보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도움도 안 되는 허둥거림만 하였으니 말이다.

마음이 가라앉은 이유 중 하나는 좀 전에 본 외국 드라마에 나온 대사 때문이다.

'한니발'이란 드라마인데 거기서 이런 대사가 나왔다.


'우리 일은 모든 걸 받아들일 순 없어. 나에게 해가 되는 것들은 전부 흘려보내고 본질만을 바라봐야 해.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제정신으로 버티지 못할 테니까'


정확하진 않지만 이 비슷한 내용의 대사였다.

참 신기하게도 그 대사를 들으니 왠지 마음이 가라앉고 정신없던 오늘 하루가 조금 흐릿해졌다.


'그래 마음이 어지러울 땐 본질만 바라보자'


생각지 않게 드라마가 내게 답을 주었다.

때때로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은 참 엉뚱한 곳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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