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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통 전하

3일간의 왕림

by 천우주


언젠가부터 어금니 쪽이 시큰 욱신거리는 게 조만간 뭔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아 얼마 전 부랴부랴 없는 돈에 치아 보험을 가입했다.

아무래도 2년안엔 치아 대공사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적금 넣는단 생각으로 가입을 한 것이다.

보험료가 부담되긴 했지만 그래도 넣고나니 마음이 좀 든든해 지는게 '넣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가만히 앉아 면책기간만 지나면 된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뜻대로 흘러가는가....

인생사 불행이란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 오는 법.





치통 전하 납시요~~~



며칠 전 금요일 밤, 티비를 보던 중 난데없이 소문 없이 치통 전하가 불시에 납시었다.

지금까지 조무래기 대신들만 보내시더니 갑자기 아무런 연통 없이 본인이 몸소 찾아오신 것.

하... 이 미천한 백성 하나 보자고 몸소 이렇게 왕림하시다니...

나는 전하의 갑작스런 방문에 감개무량하고 성은이 지극히 망극하여 몸둘바를 몰라하며 하던 일도 팽개치고 버선.. 아니 맨발로 뛰쳐나가 납작 엎드려 절한 뒤 광휘로 뒤덮인 옥채에 경배드리곤 급히 준비해 두었던 진통제를 즉시 상납해 바치며 전하가 얼른 돌아가시길 바랐다.

귀한 옥채를 이런 누추한 곳에 오래 뫼실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아....그런데....생각해 보면 내 실수였다.

그때, 치통 전하가 처음 왕림하셨던 바로 그때, 전하의 마음을 진즉 알아차리고 문안을 올린 후 진통제 따위를 상납할게 아니라 치과로 바로 뫼셨어야 하는건데...

그놈의 면책 기간이 뭔지....

나는 그만 보험 면책 기간은 좀 지나보자는 얄팍하고 경솔한 생각에 빠진 나머지 무엄하게도 집에 고이 숨겨두었던 진통제 따위들로 전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뭐.. 첫날은 괜찮았다.

아프긴 해도 잠을 아주 못 잘 정도는 아니어서 전하께서도 필시 잠시 머물다 떠나실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둘째 날 부터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첫날밤이 지나고 떠날 것 같던 전하는 무슨 연유에선지 서서히 진노가 커지시더니 급기야는 밤이 되어선 잠자는 것을 불허하시는것이 아닌가!!

나는 그제야 사태의 시급함을 알아채고 서둘러 집에 있는 진통제들을 마저 탈탈 털어 전하께 갖다 바쳤으나 이미 때는 늦어 그것만으론 전하의 진노를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렇게 전하의 진노는 새벽 6시까지 계속되었고 그 진노앞에 밤을 꼴딱 새운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한 '아세트 아미노펜'과 '이부프로펜'의 혼합 필살기 선물을 받으시고 그제서야 불같은 진노를 좀 거둬들이시면서 잠들것을 허락하셨다.

나는 잠자기를 허락한 전하의 너른 아량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한숨 자고 일어나면 꼭 병원으로 뫼실 것을 약속드리며 쏟아지는 잠에 몸을 풍덩 던지려는 찰나.....

아뿔싸!!

허...내가 토요일 밤을 새고 일요일 새벽에서야 통증이 가라앉았으니....오늘은 일요일이구나....

자고나도 일요일이구나....

순간 절망감이 밀려왔다....아직 27시간은 더 있어야 치과 문을 여는 것이다....

하지만 절망에 나를 맡길 순 없기에 이내 정신을 차리곤 남아있는 희망의 끈을 붙잡기로 했다.

내게는 최후의 비책으로 사용한 아세트 아미노펜 + 이부프로펜 조합이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것만 있다면 어찌어찌 월요일까진 버틸 수 있으리라.


그리고 셋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나는 점심즈음에 눈을 떠 우선 입 안에 통증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다행이다.

없었다.

약효는 아직까진 유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후 3시경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틀리다.

앞선 통증이 그냥 파도였다면 이번 건 태풍을 동반한 파도였다.

나는 서둘러 아미노펜 + 이부프로펜 조합을 다시 털어 먹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계는 오후 3시.

병원에 가려면 아직 18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복용량을 1.8배로 늘렸다.

새벽에 먹었던 건 아미노펜1알+이부프로펜2알 총 3알이었지만

이번엔 아미노펜2알+이부프로펜3일 총 5알을 먹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휴우........

생각해 보니 한 번 복용에 9시간 정도 약효가 지속되니 다음 통증은 밤 12시.

그렇다면 앞으로 한 번만 약을 더 먹으면 병원에 갈 때까지 무사히 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렇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전하의 분노엔 그깟 산술적 계산이 무의미하다는 걸 내가 깜빡했었다.

다시 찾은 진통은 밤 12시가 아니라 오후 8시였다.

예상보다 4시간이나 일찍 찾아온 것이다.

이번 진통은 정말 제대로였다.

앞선 것들은 어쨌든 파도였지만 이번것은 쓰나미였다.

고통의 쓰나미.

당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하악과 상악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그 고통.

나는 서둘러 진통제를 먹었고 잠시 기다렸지만 통증은 그대로였다.

복용량을 늘렸다.

아세트아미노펜 4알에 이부프로펜 4알, 도합 8개를 털어먹었다.

하지만 쓰나미 앞에 그깟 진통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란 게 죽으란 법은 없는 것.

약을 먹기 위해 냉장고에 있던 물을 마시면서 이상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차가운 물을 먹으니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다.


'어? 이게 뭐지?... 그럼...??'


통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서둘러 다시 찬물을 머금었다.

가라앉았다.

그런데 입안에 들어간 찬물은 몇 초만에 금세 냉기를 잃고, 그 틈을 타 통증의 쓰나미가 다시 밀려왔다.

지속시간이 너무 짧았다.

나는 얼른 냉동실에 있는 얼음트레이에서 얼음을 하나 꺼내 물었다.

내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얼음과 물을 함께 머금고 그 냉기가 유지되는 동안은 통증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이다.


됐다. 이렇게 버티면 되겠다!!!

나는 병원이 문을 열 때까지 남은 12시간을 얼음과 찬물로 버텨보기로 했다.

그런데 2시간가량을 그렇게 지내보니 그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통증은 가라앉으나 얼음을 자주 갈아줘야 했고 얼음과 물을 함께 먹으니 강제로 마시게 되는 물의 양도 어마어마 했다.

물은 넉넉했지만 냉동실 트레이의 얼음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론 1시간내에 얼음이 바닥날 것이고 나는 밤새 고통의 쓰나미에 몸부림쳐야 한다.

그럴순 없었다.

결국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약국 진통제의 왕이라 불리는 '탁sen'을 사러 가기로 했다.

다행히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자정까지 영업하는 심야 약국이 하나 있어 남은 얼음과 찬물을 싸들고 약국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그동안 얼음과 물을 계속 먹어댔음은 물론이다.

(한순간이라도 먹지 않으면 통증이 엄청났다.)

마침내 약국에 도착해 탁sen을 구입한 나는 정량을 무시하고 바로 4알을 털어먹었다.

약사님은 장기에 부담이 갈 수도 있다지만 지금 내가 그런 거 따지고 있을 땐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진통제의 왕이라 불리는 탁sen도 이 고통 앞에선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남은 진통제를 다 털어먹어볼까도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먹은 것만 12알인데 거기서 더 먹는다고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결국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얼음과 물로 밤을 버텨내기로 다짐했다..

각오를 한 나는 집으로 들어가는길에 곧장 편의점으로 달려가(역시 얼음과 물을 들고 수시로 먹으면서 갔다) 아이스컵 4개와 3kg 돌얼음 1 봉지를 사서 돌아와 냉장고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잠은 이미 포기하였다.

아니, 턱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이 고통 속에 잠든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나는 그렇게 적진에 홀로 뛰어든 장수처럼 굳건하고 담대하게 냉장고 앞에 버티고 앉아 얼음과 물만으로 8시간을 버텨내었다.

그 시간 동안 얼음컵 2개를 제외하곤 모든 얼음은 바닥이 났고 물은 2리터 물병 8개를 비웠다.

화장실을 스무번은 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시간은 흐르는 법.

결국 8시간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왔다.

오전8시 30분. 내가 다니던 치과가 문여는 시간은 9시30분.

난 남아있는 얼음과 찬물을 싸들고 다시 비장한 각오로 치과로 향했다.

그러나 세상은 냉혹한 법.

9시 30분에 치과에 도착했지만 이미 예약자들이 있어 나는 치과에서 다시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게 치과엔 얼음 정수기가 있어 계속해서 얼음물을 머금을 수 있었다.

그래도 치과 직원분들이 30초에 한 번씩 얼음과 물을 흡입하는 나를 안쓰럽게 봐줘 빠른 조치를 받게 해 주셨고 다행히도 지금은 모든 진료와 고통을 끝내고 이렇게 편안히 지내고 있다.

내가 방문한 치과의 의사 선생님과 치위생사님들께 거듭 감사에 감사들 드리는 바이다.


진료 결과는 발치다.

아래쪽 어금니, 위쪽 어금니 각 1개씩을 발치했다.

앞으로 (보험 적용도 안 되는) 임플란트도 하고 치료도 더 해야 돼서 빚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지만 그래도 안 아프니 살 것 같다.

이빨을 뽑고 돌아온 집으로 돌아온 나는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었다.

눈을 뜨니 오후 6시. 아프지 않은 세상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한숨자고 일어나니 피로도 좀 가시고 해서 바람도 쐴겸 잠깐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무더위 속에 불어오는 아주 미약한 선선한 바람과 햇빛이 저무는 하늘. 그리고 사람들.

아.....아프지 않고 길을 걷는다는게 이렇게 감동스러울 줄이야.

고통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상 모두에게 감사와 자비의 마음이 흘러넘쳤다.


그리고 세상이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플 때가 있으면 안 아플 때도 있고, 힘들 때가 있으면 괜찮을 때도 있고.

올라가면 내려오고, 내려오면 올라가고.....

세상엔 좋은 것만도 없고 나쁜 것만도 없고....

참 공평한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도 괜찮다 싶다.

보험가입 한 달만에 이빨을 뽑아 보험료도 못 받겠지만 그것도 괜찮다 싶다.

앞으로 임플란트니 뭐니 해서 빚이 또 늘어나겠지만 그것도 괜찮다 싶다.

정 안되면 주말 알바라도 뛰면 되겠지.

살아가다 보면 또 어떻게든 잘 해결되겠지.


그렇게 치통 전하는 화를 거두시고 돌아가시고 나는 다시금 평화를 찾았다.

마마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는 모르지만 머지않아 반대편 어금니에도 오실게 분명하다.

바라건데 제발 그때는 면책 기간은 좀 지나고 오셨으면 좋겠다.

이러나 파산하겠으니....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대한민국의 모든 치과의사 선생님과 치위생사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당신들은 진정 나와 인류의 영웅이십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이번 치통으로 알게 된 사실


1. 아세트아미노펜 진통제와 이부프로펜 진통제를 같이 먹으면 강력한 진통효과가 있다.

단, 복용시 약사와 반드시 상담할 것.


2. 진통제로도 듣지 않는 치통은 얼음물로 가라앉힐수도 있다.

양치, 가글, 치실, 진통제 어떤걸로도 가라앉지 않았던 진통이 얼음물로는 가능했음

단, 개인 경험이니 상황에 따라 안 될수도 있음.


3. 매주 중요.

치아에 뭔가 좀 이상이 있는 것 같으면 바로바로 병원에 가는게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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