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 부는 한 해의 마지막 날

2020년 12월 31일

by 천우주


다사롭던 1년을 갈무리하고 다가오는 새날의 희망을 품는 날 오늘, 1년의 마지막 12월 31일은 뭔가를 쓰기에 참 좋은 날이란 생각이 듭니다. 글쓰기의 길일이라고나 할까요.

이맘때면 늘 섭섭함과 기대가 한껏 뒤섞인 복잡한 마음이 교차합니다.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며 아쉽고 시원하기도 한 이 마음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요? 한껏 어우러져 흐릿한 형체가 되어버린 마음을 어떻게 다듬어야 할까요?

잠시 창 밖에 귀 기울여 봅니다.


웅웅 거리는 바람소리가 꼭 닫힌 이중창을 넘어 들려옵니다.

소리만으로도 그 세기와 냉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렇습니다. 바깥엔 지금 한겨울의 냉기를 한껏 품은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작은 도로엔 인적 없이 신호등만 깜빡입니다.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아 신호등이 없었다면 정지된 풍경이라 불러도 좋을만한 모습입니다.

그 정지된 풍경을 바람만이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건물에서 건물로.

신호등을 휘감아 돌고 거리에 남은 몇 안 되는 마른 잎을 하늘로 올리며 신나게 춤을 춥니다. 불 켜진 창에들러 거친 노크도 쉼 없이 두드립니다. 바람의 방문을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마치 철 모른 아이처럼 흥에 겨워 쉬지 않고 춤을 춥니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기쁜 건 아마도 바람인가 봅니다. 그렇게 춤추며 새해가 가까웠음을 바리톤 음성으로 웅웅대며 노래합니다.

바람이 점령한 거리 대신 아파트와 집들로 시선을 옮겨 봅니다.

네모난 사각 창들 곳곳에 작고 노란 등이 켜져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상자로 만든 트리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보이진 않지만 그곳엔 가족들이 모여 있을 겁니다. 벽과 창문의 보호를 받으며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집 안에서 아쉬움과 설렘을 나누고 있을 겁니다.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이들이지만 왠지 불빛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크고 작은 일들을 지나며 한 해의 마지막까지 애써 지나온 그들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몰아치는 찬바람을 맞으며 잠시 서있었더랬습니다.

바람은 몇 겹으로 꽁꽁 싸맨 옷들을 뚫고 피부로 들어왔고 바깥으로 드러난 맨살의 얼굴은 냉기의 얼얼함에 찌릿거렸습니다. 그렇게 아주 잠시 바람을 맞으며 온몸을 추위에 맡기니 겨울이란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들것 같은 냉기와 코 끝이 얼어붙는듯한 차가움. 그것이 겨울입니다

냉기의 칼바람이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세계. 그것이 겨울입니다.

나는 그렇게 차가움에 몸을 맡긴 채 잠시 겨울이 전하는 진한 향기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차갑지 않은 겨울만큼 시시한 게 있을까요? 무덥지 않은 여름만큼 지루한 게 있을까요?

나는 봄과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에 이르렀습니다.


2020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중 인연의 다함으로 생긴 헤어짐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나는 이른 봄에 겨울의 추위를 맞이해야 했고 그것이 주는 냉기를 안고 여름과 가을을 지나야 했습니다. 냉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습니다. 냉기가 준 상처 역시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섭섭함도 미움도 없기에 그렇습니다.

인연의 다함에 미움이 필요할까 나는 생각합니다. 헤어짐을 바라는 이는 없지만 누구라도 헤어짐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언제가 되었든 어떻게 되었든 우리는 하나의 시작이 끝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미움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인연이었기에, 좋아했기에, 사랑했기에 사랑해야 합니다. 시작 역시 사랑이었듯 마지막 역시 사랑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을 넘어서도 그래야 합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사랑해야 합니다. 지나온 것 역시 여전히 존재하기에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음을 향해 발을 디딜 수 있습니다. 선의와 용기만이 내일로 넘어가는 열쇠입니다.

그럼에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힘듬은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건 지나가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지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말. 지나는 중에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린다는 것.

하나에서 떨어진 조각이 되어버린다는 것.

영원함이라 믿었던 것이 실은 순간이었다는 것.

애써 쌓아 온 평화로운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

그런 것이 주는 충격과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혹독한 냉기가 겨울이듯 이별이 주는 힘듦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퇴근길, 온몸이 얼얼해지는 냉기 속에 잠시 멈춰 있을 때 나는 그 속에서 봄의 옅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따뜻함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 바람 속에서 봄의 푸름이 주는 향기를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 차가움 속에서 돌연 봄이 스쳐갔습니다.

이별도 그렇습니다. 인연의 끝남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주는 상처와 힘듦 속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 속에 새로운 시작이 숨어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언젠가 겨울이 끝날 것이란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때론 그것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날을 위해 나는 따뜻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언젠가 봄이 찾아왔을 때 새로운 싹을 틔우고 가꿔야 하기에 나는 남아 있는 온기를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은 바람과 함께 날려 보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바깥의 것. 냉기와 함께 돌아다니다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내가 지키고 가꿔야 하는 건 온기입니다.

그래야 한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책에도 나와있지 않고 누가 말해주지도 않았지만 그냥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구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겨울입니다.

새파란 차가움 속 봄의 씨앗이 숨어있는 추운 겨울입니다.

그리고 새해를 품고 있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왼발 다음은 오른발이 나가야 합니다. 왼발 다음에 왼발이 나간다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왼발과 오른발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 안정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만남과 헤어짐도 결국 왼발과 오른발입니다. 삶과 죽음도 그렇습니다. 만남, 헤어짐, 삶, 죽음 이런 각각의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균형을 이루고 잘 걸어가는 것. 왼발을 걸을 땐 왼발에 최선을, 오른발을 걸을 땐 오른발에 최선을, 둘이 따로가 아닌 하나임을 알고 넘어지지 않고 앞을 향에 기분 좋게 걸어가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걸어가겠습니다. 겨울을 잘 걸어가고 다가오는 봄 또한 잘 걸어 지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여름도 지나고 가을도 지나 다시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과정을 즐겁게 지내고 싶을 뿐이며 그렇게 살아가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지내려 합니다. 온기를 안고.



한 해의 마지막 밤. 부디 따뜻하고 평온히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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