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함에 관하여
원더(2017)
감독: 스티븐 크보스키
출연: 제이콥 트렘블린, 줄리아 로버츠, 오웬 윌슨, 이자벨라 비도빅 외
여기 우주 비행사가 꿈인 한 아이가 있다.
아이스크림과 자전거 타기와 게임과 헬러윈을 좋아하는 남들과 똑같은 10살의 여느 평범한 꼬마 아이다.
단 하나, 외모를 빼곤
뜨거운 한여름인 August란 이름을 가진 이 소년을 사람들은 '어기'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어기는 10살 때까지 가족들의 전폭적인 보살핌을 받으며 집안에서만 지내왔다. 어쩌다 한 번 있는 외출땐 생일 선물로 받은 커다란 우주인 헬멧을 쓴다. 어기에게 집 밖은 '우주'였다. 미지의 세계인 동시에 죽음의 세계. 우주인 헬멧을 쓰지 않으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세계. 어기가 이처럼 또래와 다르게 유난을 부리는 까닭은 선천적으로 기형적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원더'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주인공인 어기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겪는 갈등과 화해, 그리고 성장을 보여준다.
원더의 이야기는 비단 영화 속 등장인물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기형'을 '결핍'으로 바꾼다면 우리 역시 어기와 마찬가지로 평범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어기는 곧 우리 자신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어쩔 수 없는 일들로 헤매고 괴로울 땐 어떻게 해야 하나?
행복해지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나?
나쁜 것들과 마주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나?
이런 질문들에 대해 영화가 주는 답변은 간단하다.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라
우리 모두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도 들여다보면 각자의 사연으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어기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상처받은 이들이며 선천적 기형을 지닌 이들이다. 기형은 결핍이며 결핍은 삶에 있어 누구나 가질 수 밖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친절해야 한다. 그러므로 친절해야 한다. 영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영화는 챕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챕터별로 중심인물을 각각 따로 설정하여 하나의 상황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며 각자의 방식으로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들이 각자의 갈등 속에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 겨울의 세찬 추위'가 떠올랐다.
전기도 불도 없는 겨울의 깜깜한 밤. 낡고 텅 빈 방안으로 매서운 한기가 쉴 새 없이 들어온다. 오래 입어 낡고 닳은 옷은 너무 얇아 추위를 감싸기엔 턱도 없다. 온몸을 감쌀 두툼한 담요도 사라진 지 오래다. 며칠째 해도 뜨지 않는다. 눈과 얼음에 막혀버린 바깥엔 아무도 올 수 없고 아무도 나갈 수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서로 뿐. 추위에 오들 거리는 작고 여린 몇 개의 몸들 뿐.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는다. 냉기에 닿는 면적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은 채로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동면에 들어간 하나의 생물 같다. 그들은 그렇게 추위를 버텨낸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간 뜨게 될 태양을 기다리며, 봄을 기다리며.
나는 그들의 싸움을 보며 위와 같은 장면이 생각났고 서로의 온기가 곧 친절이라 여겨졌다.
어기가 처음 학교 수업에 들어가던 날 교실의 칠판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택하라
영화의 전반을 관통하는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말 옳음보다 친절함이 우선인지.
정의보다 친절함이 우선인지.
왜 친절이 옳음과 정의를 능가하는지.
우리가 싫어하가 미워하는 모든 것들엗고 친절해야 하는지.
세상의 악과 거짓에도 친절해야 하는지.
그것이 과연 가치 있는 행동인지.
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섣불리 답을 해선 안될 것이다. 깊게 여러 번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결국 '친절'말곤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가진 결핍, 우리가 가진 공허 속에 틀림에 대한 분노, 다름에 대한 혐오, 거짓에 대한 괴로움이 가득 찬다면 그것만큼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증오와 미움만큼 나와 상대를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이 또 있을까?
악의는 오염되고 전염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피폐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건 복수와 미움은 결코 아니다. 복수와 분노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미움의 크기만큼 자신의 삶은 줄어들게 된다. 친절한 사람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미움이 많은 사람은 그 크기만큼 자유를 잃어버린다.
모범적이고 선한 일을 한 학생에게 주는 상인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메달을 어기에게 수여하며 교장 선생님은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위대함은 강함에 있지 않고 힘을 바르게 쓰는 것에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은 그 힘으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직접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올바른 힘이 바로 '친절함'이다.
그리고 친절함이 곧 위대함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친절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세상이 영화와 같지는 않다.
어기처럼 자신을 헌신하는 가족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지도 않고, 소외된 학생을 따뜻이 감싸주고 길을 열어주는 선생님도 어디에나 있지는 않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손 내미는 친구 역시 흔하지 않다.
그 사실을 원더를 만든 감독도 알고 우리도 안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지 '기다리는 친절'이 아니다.
자신부터 친절해지는 것.
나를 바라보는 그릇된 시선들을 용기를 가지고 대하는 것.
그들에게 먼저 친절을 베푸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과 사회를 올바르고 위대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친절함'을 포기할 순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믿음이 사라진 세상에선 누구도 살 수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갈 수 있는 건 누군가의 친절 덕분이다.
삶의 어느 순간 행해졌던 누군가의 작은 친절, 내 잘못과 실수를 가만히 덮어줬던 어떤 친절, 외롭고 슬플 때 건네졌던 어떤 이의 작은 손, 무엇보다 어린 시절 우리를 보살폈던 그분들의 손길.
그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친절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친절의 증거이며 친절함이 옳음을 능가하는 이유이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