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를 붙여 주세요
"이름 끝에 꼭 E를 붙여주세요"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상대를 보며 앤은 이렇게 부탁한다.
"그래야 덜 평범하게 보이니까요"
주근깨에 빼빼 마른, 거기다 끔찍한 빨간 머리.
"어떻게 이보다 더 안 좋을 수 있겠어요?"
자신의 단점을 말하면서도 마치 옷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듯 대수롭지 않다.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함. 그래서 앤에게 'E'는 특별하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특별함. 남들과 다른 단 하나.
앤에게 'E'는 'Anne'의 'E'가 아니라 'Hope'의 'E'다.
아이 같지 않음으로 아이임을 숨기는 'E'를 가진 소녀 'Anne'.
비참함과 고통의 현실을 버티는 방법은 '부정'이다.
그렇게 고통과 초라함을 두드리고 두드려 평평하게 만든다. 대수롭지 않게 만든다.
또 다른 방법은 '희망'이다.
판도라의 상자 가장 안쪽 깊숙이 숨어있던 가장 부끄럼 많은 것.
그렇지만 가장 고귀한 것.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이 지독하고 무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단 한순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앤은 그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의 현실을 두드리고 두드려 별것 아닌 평평함으로 위장하고 보석 같은 본성으로 환상과 상상의 나래를 편다.
오물 속에 허우적댈지라도 상상의 나래에선 궁전에 살고 있는 공주가 된다.
지루하고 평범한 풍경들이 아름다움 가득한 환상과 낭만의 세계가 된다.
앤의 보석 같은 상상력은 고난 속에 더욱 빛을 발하며 언제나 도피처가 되어준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 고난이 올 때마다 환상으로 도피하는 앤의 모습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언제나 위태롭다.
아이에게 주어진 가혹한 환경에서 그보다 더 가혹하고 지독하게 희망의 끄트머릴 잡고 안간힘을 쓰는 앤을 보면 절벽 끝을 아슬하게 걸어가는 아이를 보는 것 같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아슬함이다.
그래서 더욱 애처롭고 더욱 연민이 간다.
하지만 앤이 가지고 있는 보석 같은 본성은 상상력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솔직한 것.
그래서 타인에게도 솔직한 것.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아이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함에 앤은 지나친 예절과 격식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녹이며 그들의 삶에 새로운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고 잊어버렸던, 혹은 잃어버렸던 그들 마음 깊숙이의 순수함을 끄집어낸다.
드라마를 통해 처음 앤을 보았을 땐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어렸을 적 보았던 만화의 기억으론 분명 '씩씩한 소녀'였건만 수십 년이 지나 만난 앤은 기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신없고, 산만하고, 불안하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이상하고 제멋대로인 아이였다.
'저렇게 혼자만의 세계가 강한 아이였나?'
주변인은 개의치 않고 쉴 새 없이 자기 말만 떠들어대는 앤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이 세계의 인간과는 접점이 없는 별세계의 사람 같았다.
앤을 만난 사람들 모두 그런 눈빛이었다. 별세계의 사람을 보는듯한.
처음 앤을 데리러 왔던 매튜의 표정 역시 그랬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그의 눈빛엔 당혹과 함께 '연민'도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앤이 가진 본성 때문이 아니라 매슈가 가진 본성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앤의 순수한 본성이 매튜의 잊었던 본성을 일깨웠을지도.
(정말 별세계의 생물을 보는듯한 매슈의 표정)
정신없고 산만하고 제멋대로인 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가방 때문이었다.
시즌 내내 눈에 밟혔던,
손잡이가 떨어지고 여닫이는 고장 난 가방.
자신의 물건 전부를 채워 넣어도 결코 무거울 수 없는 가방.
그 낡고 더러운 가방을 보며 모든 게 이해되었다.
빨간머리앤 시즌1은 앤과 마릴라 남매가 서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세계와 세계가 만나고 싸우며 화해하는 이야기이다.
미운 오리가 조금씩 서서히 그냥 오리로 변해가는 내용이다.
시리즈를 보며 가족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나는 가족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엔 '존중'과 '용서'가 따르기 때문이다.
존중과 용서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밑거름이며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내게 해준다.
앤과 마릴라 남매는 초록지붕 아래 함께 살며 그렇게 사랑을 배우며 점점 하나의 가족으로 변해간다.
빨간머리앤에서 감동을 주고 변해가는 건 앤만이 아니다.
마릴라와 매튜 역시 그들만의 매력과 감동을 주며 함께 변해간다.
그들을 통해 앤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듯 그들 역시 앤을 통해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해 간다.
빨간머리앤은 그렇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사랑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 드라마다.
성장 드라마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그들이 성장하며 겪는 아픔과 기쁨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그런 에너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제 막 열세 살 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하면 늙고 외로운 노인이 된듯한 기분도 든다.
희망과 기쁨을 느끼는가 하면 용서와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가슴에서 사랑이 흘러나와 성장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빨간머리앤을 시청하지 않았다면 꼭 한 번 시청해 볼 것을 권하는 바이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가슴 뛰는 아이가 될 것이고 사랑이 넘치는 어른이 될 것이다.
보다 깊은 연민을 가질 것이고 보다 많은 사랑을 베풀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많이 울게 될 것이니 휴지나 손수건을 꼭 준비해야 한다.
눈물을 닦을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E'를 가진 소녀 Anne을 만나러 가면 된다.
앤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당신의 가슴 속 잠자고 있는 사랑을 발견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