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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미사 - 넷플릭스

by 천우주
어둠 속의 미사(2021)


감독: 마이크 플래너건

출연: 케이트 시걸, 잭 길퍼드, 헤미시 링클레이터, 헨리 토마스, 크리스틴 리먼 등

형식: 7부작 미니시리즈



'어둠 속의 미사'란

제법 뻔한 제목과 제법 뻔한 포스터에 속아 하마터면 보지 않을 뻔했지만 '유령'시리즈의 마이크 플래너건이 연출했다는 이유로 시청하였다.


공포를 일으키는 분위기나 기묘하게 어긋나 있는 현실성, 그리고 어딘가 아주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는 등장인물들은 마치 '스티븐 킹'의 소설들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원작인가 생각해 검색해 봤는데 그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마이크 플래너건이 스티븐 킹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던 것만은 틀림없을 거라 생각한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들은 모두 죽어있다.

죽어있지만 살아있다.


마치 모든 인물들이 걸어다니는 시체 '워킹 데드' 같다.

드라마는 삶에 대해 더 이상의 열정도 불꽃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이 과거의 화려한 시절을 지나 이제는 서서히 기억 속에 잊혀가는 섬에 모여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드라마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단지 숨을 쉬고 먹을 수 있기에 목숨만 유지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숨길을 불어넣어 주려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불어 넣어주려는 새로운 희망 또한 이미 죽은 것에서 도래했기에 그 끝의 비극은 너무도 자명하다.

드라마 마지막에 남게 되는 사람들은 어쩌면 죽은 것에선 더 이상 아무것도 구할 게 없다는 걸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힐하우스의 유령'과 '블라이 저택의 유령'에서 보여주었던 감독의 호러 감각은 이번 작품에서도 여실히 빛을 발한다.


불길한 슬픔, 치유되지 않는 아픔, 포만을 모르는 기만 등이 각각의 개인에 빼곡히 채워져 꾹꾹 눌러 담겨있다.

이런 것들은 너무 꾹꾹 눌러 담겨있기에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 내부에선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형태의 부패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회복할 수 없는 부패의 시작부터 진행된다.

부패는 그들을 하나 둘 서서히 몰락하고 사그라지게 만들며 결국 순식간에 쓰러져 사라지게 한다.

마치 썩은 나무 기둥이 한순간에 무너지듯 급격히 혼돈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것이다.


이야기는 어느 교통사고의 직후부터다.

사고를 내고 넋을 잃고 앉아있는 가해자와 죽어버린 피해자. 그리고 그런 사고 현장과 어울리지 않는 배경음악.

그 어울리지 않는 부조리는 우리 삶의 부조리와 맞닥뜨려 있고 신의 존재에 관한 지극히 원초적인 의문과도 닿아있다.


신이 있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신이 없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어둠 속의 미사'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카톨릭에 관한 것들이 소재의 배경을 이룬다.

각 챕터의 제목 역시 성서의 챕터들을 그대로 쓰고 있다.


창세기, 시편, 잠언, 애가, 복음, 사도행전, 계시록.


오래전 성경을 읽어보긴 했지만 기억하는 건 없기에 성서의 챕터를 인용한 제목들이 각 회차와 어떻게 부합되는지는 드라마의 내용과 연관해 막연하게 느낄뿐이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는 분들이라면 챕터별 제목들과 드라마의 내용이 연결되는 부분을 찾아보는 것도 시청의 재미를 높이는데 한 요소가 되지 않을까 한다.



주여,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냉정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 중 시작 부분에 해당되는 이 문장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이며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오는데 신자가 아니더라도 곱씹어볼 말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얼마나 헷갈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바꿀 수 없는 일들에 대해 괴로워하고 바꿀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선 미루고 마는.

지금 쓰고 있는 리뷰 역시도 한 달도 더 전에 쓰려고 했지만 미루고 미루다 지금에야 쓰고 있는 것이다.

바꿀 수 있음을 알기에 머뭇하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기회가 미래에도 지금처럼 그대로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미래란, 내일이란 알 수 없는 세계이고 불확실한 세상이다.

오직 확실한 건 지금 바로 이 순간뿐인 것이다.


어둠 속의 미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라일리와 에린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죽음'을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오직 과학적 관점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설명하는데 그 속에는 생을 끝낸 존재가 다시 다른 것으로 변하고 흩어지는 환희와 환상이 있다.

존재가 사그라들며 다시 다른 존재로 퍼져나가는 것.

그것에 대한 설명을 별다른 미사여구나 신비주의적 관점 없이 그저 과학적 사실들로 묵묵하게 이야기한다.

그런 담담함이 오히려 '죽음'을 보다 더 의미 있고 종교적으로 들리게 한다.


허나 어쩌면 그런 환희와 환상도 삶을 담담히 살아냈을 때에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보여준것처럼 햇볕에 타들어 순식간에 재가 된다 하더라도 그 찰나의 순간에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생명의 탄생이 고귀하다면 생명의 죽음 역시 고귀하여야 하지 않을까.

죽음의 고귀함을 위해선 삶의 어느 지점에선 우리도 조금은 고귀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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