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by 지혜

2026년 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고 처음 맞이하는 토요일, 겨울 햇살은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을 뿜어낸다. 화창한 주말, 오래전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꺼내 들었다. 책을 펼쳐 든 순간 묵은 종이 내음이 물씬 코끝을 자극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선과 악, 빛과 어둠, 질서와 혼돈을 넘나들며 「데미안」을 읽은 후 책을 덮었을 때, 위 세 개의 문장이 내 안에서 나를 울리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데미안(Demain)은 데몬(Demoan), 즉 악마라는 뜻이다. 기존 질서인 알을 깨치고 날아 오른 데미안은 악마일까, 비상을 꿈꾸는 카인의 후예일까.

칼 구스타프 융은 「죽은 자를 위한 7가지 설법」이란 책에서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질서와 혼돈 등의 대립하는 개념들 그 너머에 존재하며, 어떤 신보다도 가장 불분명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설명한다. 「데미안」에서 아브락사스는 인간이 내적으로 성장해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통합과 성숙, 그리고 일체화의 과정을 추진하는 힘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아브락사스의 상징성에 눈을 뜬 싱클레어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모습을 통해 주인공이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세계를 깨고 날아 올라 온전한 새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고 아이 적의 미성숙한 사고를 버리지 못한 건 아닌지, 한동안 생각해 보았으나 거듭남에 대한 마음의 확신이 서진 않았다.

이제 만으로 마흔셋이 된 나는 삶이란 기나긴 여정의 절반쯤 살았을까. 돌이켜보면 목숨 바칠 만큼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기도 하고, 꿈을 향해 열정을 바쳐 달려가기도 했거니와, 한편으로는 깊이 꺼져가는 낙심 가운데 지독하게도 게으르고 권태로운 나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에도 지금껏 그래왔듯이 무수히 많은 오르막과 내리막길, 깊은 물웅덩이와 늪과 진흙탕 길, 때론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사막과 가물어 쩍쩍 갈라지는 논과 같은 메마른 땅들을 밟아야 할 터이다.

이제껏 지나쳐 온 길을 돌이켜보면 후회하는 순간이 참으로 많았으나, 이제 나는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걸어왔든, 메마르거나 질펀한 길이건, 바르고 곧은 길이건 간에 그때마다 순간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결론내리기로 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얼마쯤 자신을 속이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해 가을, 불과 두어 달 전 일이다.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남편과 단둘이 동유럽의 크로아티아를 다녀왔다. 수도인 자그레브에서부터 크로아티아 최남단 두브로니크까지 순례하고 귀국을 위해 다시 자그레브로 돌아오는 여정은 숨 가쁘면서도 일상에서 생각지 못한 것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여행은 매번 내게 깨달음을 주었듯이 지난 여행 또한 일상에 지친 영혼에 깊은 자극이 되었다. 그건 순조로운 여행이 아닌 추위와 씨름하면서 얻어낸 마음의 다짐이자 각오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여행은 무엇보다 추석 연휴를 두어 달 앞두고 급하게 주선하는 바람에 준비가 미흡했다. 무엇보다 현지 기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에 스웨터 등 두툼한 옷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한국과 거의 비슷한 기후라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따라서 수도인 자그레브와 꿈에도 그리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걸을 땐 현지에서 구매한 스카프를 두르고도 어깨를 움츠리며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허나 그런 추위 속에서도 우린 일정을 변경하거나 계획을 취소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온전히 추위를 견디며 여행을 강행했다. 심지어 밤에 숙소에서 감기약을 먹으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나는 평소엔 느끼지 못한 색다른 감정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세로로 길쭉하게 뻗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추위에 싸우고 더위에 겉옷을 벗기도 하는 경험은 굽이치는 강물과도 같은 굴곡진 人生 길에 대해 명상의 시간을 갖게 했다.

추위가 나를 엄습해도 여행에 대한 동경은 식지 않구나, 열정만으로 충분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난 아직 젊은 축에 들지도 몰라, 내 속에서 내가 하는 말이었다. 국토의 가운데쯤 스플리트에서 한 시간쯤 페리를 타고 들어간, 아드리아해를 품은 흐바르섬에서 우린 몇 시간 동안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았다. 꼭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인위적인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자연이 주는 소리와 음성에 귀 기울이기 위해 우린 해변의 카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머물러 있는 시간 내내 흐리고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하늘과 검푸를 바닷물결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끝없는 상념에 잠겨있었다. 낯선 땅, 낯선 곳에서 유럽인들 속에 섞여 그들과 함께 비 오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나는 왜 쓰는가, 내게 쓰는 행위는 숙명인가, 강박관념인가, 아니면 내가 정말 좋아서, 간절히 원해서 하는 일인가, 스스로도 그것을 알 수 없어 나는 가느다란 눈으로 수평선만 응시했다.

그것은 아마 셋 다일 수도 있고, 셋 다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확실한 건 무엇인가? 어찌 되었든 뭔가를 쓰고 있고,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리라.

연거푸 석 잔을 연속으로 비운 에스프레소 커피와 하이네켄 병맥주, 그리고 친절한 웨이터와 헤어스타일이 독특한 유럽인들이 해변 카페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크로아티아 최남단인 두브로니크에서 우린 아침 일찍 성벽을 올랐다. 조금만 지체하면 관광객이 몰려올 것을 염려해 서둘렀더니 정상까지 단숨에 오를 수 있었다.

성벽의 정상엔 요새와 같이 생긴 조그만 문이 있었다. 나는 그 문을 통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 아드리아해의 푸르른 물결과 물결에 닿아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난 그동안 내 안에 보이지 않는 벽 한 겹을 쌓고 살아왔단 사실을 자각했다. 살면서 알게 모르게 성벽만큼이나 높고도 견고하게 쌓아 올린 벽.

그것이 편견이든 선입견이든 부족한 자존감이든 간에 한번은 부서뜨리고 가야 할 벽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앞으로 삶에 대한 미미한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이 벽만 깨면 되는 건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벽을 깨고 내가 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기꺼이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새가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듯, 나도 내 앞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미지의 세계로 성큼 다가서리라.

매거진의 이전글(수필) 고산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