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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은 공공을 만든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연습하는 일

by 파랑


많은 사람들은 감상이 자격의 문제라고 여긴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제가 이렇게 느낀 게 맞을까요?” 전시가 끝난 후, 박물관 수업에서 사람들에게 감상을 물으면 으레 따라오는 반응이다. 그 물음에는 자격을 의심하는 마음이, 틀릴까 망설이는 태도가 들어 있다. 나는 그 조심스러움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태도야말로 지금 우리가 ‘감상’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배워왔는지를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감상은 누군가에겐 익숙한 언어이고, 누군가에겐 허락되지 않은 문법이다. 유물 앞에 서서 침묵하는 사람들, 자신의 언어로는 전시를 해석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들이 감상을 망설이는 이유는 감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각을 말해도 될 언어적·사회적 공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애초에 공평하게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감상을 ‘연습’이라고 부르고 싶다. 감상은 단번에 완성되는 능력이 아니라, 반복해서 구성해가는 실천이다. 나는 사람들이 감상의 연습을 통해 자신에게 묻고, 자기를 해석하고, 그 언어를 타인에게 건네는 순간들을 믿는다. 그때 우리는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얻어간다.

박물관은 이러한 연습의 장이 될 수 있다. 반드시 전문가의 해석을 따라야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나의 언어를 구성해보는 실험의 장소가 될 수 있다. ‘훌륭한 해석’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감상을 말할 수 있게 된 사람이 되는 것. 감상이란 그런 연습을 통해 자신이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의 하나로 확장될 수 있다.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공공 실천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간다는 것, 자신의 감각을 언어로 바꾸어 내보이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 그리고 그 말들이 서로 닿고, 흔들고, 다르게 보는 눈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인프라보다 강한 공공의 조건이 된다.

공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제도와 시설, 시스템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감상이 타인의 감상과 연결될 수 있을 때, 누군가의 감각이 사회 안에서 설명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커먼즈를 경험하게 된다. 그 감각은 연습을 통해 쌓이고, 공유되는 언어를 통해 살아난다. 이 감상을 우리는 함께 나눌 수 있다. 나는 그것이 감상의 윤리이고, 동시에 박물관을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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