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함'에 대한 소고 (小考)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될까?

by 신쥰

이과감성 주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될까?


최근 나는 내 스스로가 아주 조급한 사람이라는 걸 아주 철저하게 깨닫는 중이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내가 정진하고 있는. 어쩌면 업 (業)으로 삼을 수도 있는 연구자라는 직업이 과연 '나라는 사람에게 적합한 직업인가'에 대해서까지 아주 심각하게 고민해보는 중이다. 이유는 조급함이라는 좋지 못한 습관이야말로 내가 걸어가는 길에서는 아주 큰 돌부리가 되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조급함?

우선 조급함이란 무엇인가. 조급함이라는 단어는 어찌 보면 빠릿빠릿함과 정신없이 바쁜 모양새를 어느 정도 닮아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조급함'이 우리에게 거는 최면이다. 조급한 삶은 어찌 보면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삶처럼 느끼게 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조급함이 갖고 있는 함정에 빠지면 결코 당신은 조급함을 혐오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다. 바쁜 삶이 곧 가치 있는 삶처럼 변모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고로 조급함이라는 놈에 대하여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이놈이 가진 특질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 가늠자로 사용할 정 반대의 의미를 갖는 단어를, 나는 ‘부지런함’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원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느긋함'을 '조급함'에 대한 반의어로 제시하고 있다)


아주 닮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것이 조급함과 부지런함이다. 이것이 조급함을 파악하고 구분 짓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과연 무슨 차이일까. 나는 명백히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가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조급함에는 없는데 부지런함에는 있는 이것. 이후에 풀어갈 조급함과 부지런함의 차이를 방향성의 유무로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두 가지 개념을 소개코자 한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스칼라 (scalar)'와 '벡터 (vector)’를 소개한다.


조급함과 부지런함의 가장 큰 차이는 '방향성'이다




스칼라 (scalar)와 벡터 (vector)


물리적 현상을 양적으로 표현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그 둘이 각각 스칼라와 벡터이다. 스칼라, 벡터 모두 크기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는데 둘 사이에는 가장 큰 한 가지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방향성의 유무'이다. ‘스칼라량’은 단지 하나의 크기량을 나타내지만, ‘벡터량’은 크기와 함께 방향을 나타내는 표현 도구이다.


(ex. 스칼라량: 길이, 넓이, 시간, 온도, 질량, 속력, 에너지 / 벡터량: 변위, 속도, 가속도, 힘, 운동량, 충격량, 전기장, 자기장)


위의 물리량은 실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도 쉽게 비유할 수 있다. '만원'을 이용한 간단한 예시를 통해 이 차이를 살펴보자. '일만원'이라는 재화 자체는 돈의 액수를 의미하는 스칼라량에 가깝다. 하지만 ‘일만원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했다’라는 사건은, 내게 있던 만원이 (목적과 이유를 갖고서)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방향성’을 가진 벡터량에 가깝다.


자,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어떻게 조급함과 부지런함을 구분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까. 또한 ‘조급한 삶은 곧 방향성이 부재한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반증하게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부지런한 사람에게 ‘방향성’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반대로 조급한 사람에게 ‘방향성’은 큰 의미가 없다. 아니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목표가 없는 방향성'을 갖고 표류하는 사람이 바로 조급한 사람이다.


농부의 삶을 예로 들어보자. 농부가 밭을 일구고 있다. 그 밭을 일구는 농부의 가장 주된 목적은 ‘가족의 생계’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농부의 삶의 방향성은 ‘가족의 생계’ (벡터량, 목적, 방향성)를 향해 맞추어져 있다. 밭의 상태, 기상 상황, 농사법 등의 변수가 수확량이라는 결과 (스칼라량, 크기)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에 따라 풍년이 되기도, 흉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풍년과 흉년이 농부에게 기쁨이 될 수도 있고, 슬픔이 될 수도 있으나 농부는 농사를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족의 생계’는 풍년이라고 하여 이어지고, 흉년이라고 하여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풍년이면 풍년 인대로 수확물을 저장해두거나 하는 방식으로, 흉년이면 흉년 인대로 저장해두었던 수확물을 밖으로 내거나 하는 방식으로, 부지런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농부는 ‘수확량’이라는 ‘스칼라량’으로 그 스스로에게 느끼는 불안과 안도를 체험할 수는 있으나, ‘가족의 생계’라는 ‘벡터량’으로 그 불안을 극복하고 안도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밭’은 곧 ‘가족의 생계’이다. 그 밭을 결코 쉽게 갈아엎을 수도, 함부로 추수하거나 팔아버릴 수 없다. 따라서 그는 결코 조급할 수 없다. 풍년이 되었다고 미치도록 기뻐하지도 않고, 흉년이 되었다고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농부에게 ‘가족의 생계’라는 최종 목적이 다른 무언가에 의해 흐려지게 되면 (방향성이 부재하게 되면), 그 아래에 있는 여러 가지 수단과 결과들이 모두 뒤엉켜 이상한 방향성을 갖게 된다.


가령 농사일로 얻어지는 수확량으로 얻어지는 수익보다 훨씬 큰 수익을 거둬들일 요량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든지, 평소보다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수확물을 팔아 폭리를 취한다든지의 경우가 위에 해당된다. 매일의 삶을 지키고 살아내던 부지런한 농부는 이내 곧, 결과에 집착하는 조급한 농부가 될 것이다. 조급한 농부에게 ‘가족의 생계’ 보다 중요한 것이 훨씬 많아졌다.




동전의 양면, 조급과 태만


다시 이야기하지만. 절대로 조급함은 '부지런함', '근면' 혹은 '성실'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오히려 조급한 사람은 태만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다. 또한 반대로 태만한 사람은 조급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짙다. 이에 대한 부연으로 다시 한번 농부의 예를 자세히 들어보자.


농부는 ‘가족의 생계’라는 방향성을 잃고서, 어느 순간부터는 수확량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흉년일 때의 불안이 가중되고, 풍년에 대한 욕심이 커져갔다. 조급해진 농부는, 일전에 고려하던 ‘밭의 상태’, ‘날씨’, ‘농사법’ 등을 초월하는 다른 방법들로 수확량을 극대화시킬 다른 방법을 하루 종일 강구하였다. 하루하루 규칙적으로 관리해주어야만 했던 곡식들은 불규칙하게 관리되기 시작했다. 농부는 일찍 일어나는 날이 있었다가, 늦게 일어나는 날이 있었다가, 그가 철칙같이 지켜내던 하루의 습관들을 모두 버리고 말았다. 마침내는 어떠한 수단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크게 풍년을 만들어, 심하게 불어난 수확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크게 불어난 수확물을 감당할 수 없던 농부는 이리저리 다른 용도로 수확물들을 되팔기 시작하였고, 그러던 도중 밭은 이내 생기를 잃어 마침내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일말의 실망도 없이 밭을 되팔고, 힘들고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지는 농부라는 직업을 떠나고 말았다.


그에게 ‘밭’은 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농부에게 돈 (스칼라) 이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 그에겐 더 이상의 목적과 방향성 (벡터)이 존재하지 않는다.


두 가지 농부의 예시에서 '방향성의 유무'가 느껴지는가




농부의 예시에서, 삶의 방향성이 뚜렷한 농부가 어떻게 부지런한 삶을 지켜내 가는지에 대해서와, (삶의 방향성을 잃은) 조급한 농부가 어떻게 태만한 사람으로 변모되어 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았다. 위 이야기를 통해 부지런함과 방향성이 갖는 상관성이 조금 전달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와 더불어 조급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위 이야기에서 추가로 발견되는데, 이것을 마지막으로 이야기함으로 글을 맺어보려고 한다.


조급한 사람들은, 비슷한 보폭으로 매 순간 내딛는 ‘잔걸음’, 곧 삶의 규칙들이 부재 (不在)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린 (계속 위에서 언급한 대로) ‘벡터’의 방향성을 잃는 순간 크기량만 존재하는 ‘스칼라’의 인생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방향성’이 있음으로 인해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크기량’을 엄청 신경 쓰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가치의 이동이다. 농부의 예에서 보았듯이, ‘가족의 생계’라는 방향성을 잃은 농부는 ‘수확량’에 크게 연연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가 지켜내고 있던 모든 삶의 규칙들은 중단되었다. 정직한 농사를 향해 하루하루 걷고 있던 모든 걸음들이 멈추었다. ‘농부’라는 직업과 ‘밭’이라는 수단을 내려놓은 채, 오로지 ‘수확량과 돈’ (결과)이 그 삶의 의미를 대신하게 된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시되는 지금의 조급한 사회는 어쩌면 방향성의 부재를 나타내 주는 가장 핵심적인 징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망한다


정리해보면, 조급함 속에 감추어진 많은 부작용들이 있다. 그저 바쁘다고 해서 문제를 묻어 둔 채로 달리기를 지속하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조급한 삶과 근면한 삶이 일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한 누군가는 조급한 삶이, 곧 방향성을 소실한 삶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누구나라도 (나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와 동조하지 않는 이 모두) 스스로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과연 나는 조급한 사람인가 근면한 사람인가’ ‘나의 삶을 이끌어가는 방향성은 무엇인가’ '나의 삶의 잔걸음들은 무엇인가' ‘지금 나의 삶은 벡터의 삶인가, 스칼라의 삶인가’


조급한 사람은 실상 태만한 자이고
태만한 자는 늘 조급할 수밖에 없다
-박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