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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Feb 11. 2018

스포츠와 프랜차이즈

올림픽에 대한 짧은 이야기


4년에 한 번 여름이 돌아오면 전 세계는 마치 올림픽만 기다렸던 것처럼 들뜬다. 다국적 대기업과 세계의 대형 방송사들이 내보내는 올림픽 캠페인 안에서는 세상 모든 일이 잘될 것처럼 보인다. 인류애는 여전하고 인간은 한계를 극복하며 올림픽 동안만은 모든 갈등을 잊는다. 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모여 개막식을 열고 최선을 다해 대회에 참가한 후 또다시 단정하게 차려입고 폐막식을 치른 뒤 다음 대회를 기약한다. ISIS가 맹위를 떨치고 브렉시트를 필두로 선진국 세계의 분열이 시작되며 지카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등의 실제 세계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그리고 우린 올림픽을 잘 모른다. 리우데자네이루가 어디를 제치고 올림픽 개최지가 되었을까? 근대 5종 종목엔 뭐가 있을까? 마장마술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 레슬링과 야구와 골프 중 무엇이 이번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을까? 줄타기는 올림픽 종목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요는 이거다. 올림픽은 엄청나게 큰 규모에 비해 애호가층이 얕은 스포츠 이벤트다. 어떤 문화를 이끄는 주체인 골수팬이 없다.


대표적인 팬 베이스 비즈니스인 스포츠 세계에서 올림픽은 아주 예외적인 행사다. 스포츠 팬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각국의 프로축구나 메이저리그의 각 팀에 해당하는 지역 기반 팬이다. 다른 하나는 르망 24의 레이싱 팬이나 윔블던의 테니스 팬 같은 종목 기반 팬이다. 올림픽은 둘 다 해당하지 않는다. 국가라는 ‘팀’은 다 같이 응원하기엔 너무 넓고 막연하다. 한국처럼 한 국가의 국민 대부분이 별 의심 없이 뭉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국가가 한국 같을 수는 없다. 종목도 너무 다양하다. 그러니 질문은 계속된다. 그러면 누가 올림픽을 이끌어가는 걸까? 올림픽의 주인이 있다면 그건 누구일까?


여기서부터가 올림픽이 정말 재미있어지는 부분이다. 올림픽은 현재 세계 최고의 브랜드이며 스포츠 이벤트는 올림픽 브랜드의 핵심 콘텐츠다. 성공한 브랜드에는 예외 없이 이상적인 메시지가 있다. 애플의 ‘다르게 생각하라’나 스타벅스의 ‘제3의 공간’이나 버락 오바마 선거 캠프의 ‘예스 위 캔’처럼. 올림픽에도 강력하고 확실하고 이상적인 메시지가 있다. ‘우정, 연대감, 페어플레이’. 현대 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으로부터 내려오는 낙관적인 신조다.


20세기의 프랑스인 쿠베르탱이 기원전의 스포츠 이벤트를 복원했다는 것부터 올림픽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사학자 니시카와 아키라는 그리스의 올림픽 유적을 답사하고 쓴 <고대 올림픽을 찾아서>의 말미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무엇이 쿠베르탱으로 하여금 사람들한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고대 올림픽의 재건을 위해 뛰게 만들었을까?’ 놀랍게도 쿠베르탱은 스포츠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프랑스의 국내 정세는 이런저런 일로 불안정했다. 쿠베르탱은 문제의 원인을 교육에서 찾았다. ‘집단으로의 평온과 지성과 자기 반성력이 교육에 의해 생겨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올림픽에서도 볼 수 있듯 스포츠는 교육의 기둥이었다. 스포츠는 문명사회의 근간인 규칙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스포츠를 통해 사람들이 언어나 종족, 종교 차이를 초월할 수 있다고 여겼다. 존 레논의 ‘이매진’ 같은 이야기다. 20세기 프랑스인이 밑도 끝도 없이 고대 그리스 스포츠 이벤트를 복원하려 한 데엔 이런 속사정이 있다.


현대의 올림픽은 쿠베르탱의 올림픽과도 많이 다르다. 지금의 올림픽은 IOC라는 엘리트 집단이 국가와 대기업의 엘리트들과 함께 만든 거대한 브랜드다. 올림픽은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이용해 글로벌 대기업을 마케팅 파트너로 참가시키고 이들에게 독점 홍보와 마케팅 권한을 부여한다. 강력한 파워는 전 세계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올림픽을 유치하면 돈이 된다는 확실한 약속 때문에 큰 도시들은 늘 올림픽 유치권을 따내려 한다. 마케팅 파트너의 예산과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올림픽은 성대한 스포츠 축제를 열며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시킨다. 사마란치 체제의 IOC는 이 비즈니스 모델 구축에 성공하며 올림픽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브랜드로 만들었다.


올림픽이 브랜드라는 건 조금 불경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게 냉정한 사실이다. 지금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올림픽의 순결한 이미지는 실은 ‘강력한 추진력, 지도력, 독특한 마케팅 플랫폼의 개발로 얻게 된 것’이다. 이건 올림픽 음모론이 아니라 1983년부터 올림픽 글로벌 마케팅 프로그램 ‘TOP’를 총괄한 마케터 마이클 패인의 말이다. 그가 직접 쓴 <올림픽 인사이드>는 올림픽을 일러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최대 규모의 프랜차이즈 비즈니스’라고 정의한다. 이것도 우리가 아는 올림픽과는 조금 다르다.


프랜차이즈 비즈니스. 올림픽은 그야말로 전 지구적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이며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팝업 스포츠 이벤트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깨끗한 규칙 아래에서 자웅을 겨루는 일이 재미없을 리가 없다. 만고불변의 법칙, 재미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무슨 장사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올림픽은 스포츠의 현장을 깨끗하게 남겨두는 데에 결벽증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광고판으로 꽉 찬 전 세계의 스타디움과는 달리 올림픽 스타디움엔 광고판이 없다. 대신 잔여 시간을 보여줄 때 타임키퍼인 오메가의 로고가 보인다. TV에 스치듯 나오는 음료는 모두 코카콜라다. 올림픽 기간에 올림픽이라는 단어를 이름에 넣어 광고할 수 있는 신용카드는 비자카드뿐이다. 올림픽은 스포츠의 현장만 깨끗하게 남겨둔 채 다른 것들을 모두 상업화시킨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삽입 빼고 다 하는 섹스를 실컷 즐기고 혼전 순결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올림픽의 개최지가 매번 바뀌는 것이야말로 이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의 백미다. 경기 자체라면 그리스든 스위스든 효창운동장이든 매번 똑같은 장소에서 해도 상관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시드니 올림픽을 보러 호주에 다녀온 뒤 쓴 <시드니!>에서 상업화된 올림픽을 개탄하며 매번 그리스에서만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똑같은 논란이 근대 올림픽 초기에도 일어났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전통인 올림픽을 당연히 늘 그리스에서 열고 싶어 했다. 하지만 IOC는 필사적으로 이 노력을 막아섰고 결국 올림픽이 매번 다른 도시에서 열리도록 했다. 올림픽 프랜차이즈 사업주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보다.


올림픽이라는 프랜차이즈 산업이 그렇게 인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1984년 올림픽 개최지인 LA는 IOC 총회에 출마할 당시에 경쟁자가 없었다. 1988년 서울은 일본의 나고야와 경쟁해 올림픽을 유치했지만 당시 서구 사회의 반응은 경악에 가까웠다. ABC의 하워드 코셀은 당시 “전쟁 중인 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수는 없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서울 올림픽은 여러모로 성공해서 IOC와 한국 모두 만족했지만 IOC의 입장에서 서울 올림픽은 어느 정도 도박적인 성격이 있었다. 올림픽이 지금처럼 흑자로 돌아선 건 1984년 LA 올림픽을 기점으로 중계권료가 폭등한 이후다. 현재 올림픽 중계 범위는 220개국, 추산된 시청자는 40억 명에 달한다. 이 정도 모객이 된다면 뭐든 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의 올림픽은 각종 마케팅과 방송 중계 기술 및 통신 기술의 안테나 마켓으로 활용되고 있다.


올림픽은 대기업 비즈니스이기 이전에 국제 정세의 레이더이기도 했다. 20세기 후반의 올림픽은 냉전의 기 싸움으로도 쓰였다. 이때의 국가들은 자신의 이념적 진영에 따라 미팅에 나갈지 말지 고민하는 대학생들처럼 올림픽 참가 앞에서 오락가락했다. 오쿠다 히데오가 쓴 <올림픽의 몸값>에서 나왔던 것처럼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북한은 선수단을 만들고 배까지 다 띄웠다가 철수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올림픽 팀을 납치하고 인질극을 벌이다 선수단 전원을 살해했다. 8년 후 열린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빌미로 미국 팀이 불참했다. 다음의 LA 올림픽에서는 당연히 소련 측이 대거 불참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눈길을 끈 이유는 이렇게 티격태격하던 각 진영 국가가 모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의 드라마가 쌓이며 올림픽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는 차곡차곡 올라갔다.


앞서 언급한 올림픽 마케터 마이클 패인은 올림픽의 상업화를 두고 올림픽 브랜드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정책이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대기업과 국가라는 대형 단체가 낀다면 필연적으로 부패가 발생한다. 그걸 파헤친 사람들도 있다. 영국의 바이브 심슨과 앤드류 제닝스는 <반지의 제왕들: 근대 올림픽의 권력, 자본과 약물>이라는 책을 썼다. 이들이 보는 올림픽은 쿠베르탱이나 마이클 패인이 말하는 올림픽과는 거리가 굉장히 멀다. 이들은 ‘누가 스포츠를 조종하고 돈이 어디로 흘러드는지, 10년 전에는 미와 순수함의 근원으로 상징되던 올림픽이 왜 지금은 천박하고, 반민주적이고, 마약으로 시달림을 당하며 세계 다국적 기업의 마케팅 도구로 경매되는지’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위치에 따라 시선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아는 올림픽이 방금 세탁한 이불처럼 새하얗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 모든 요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은 재미없을 수가 없는 이벤트다. 올림픽에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체육 경기를 펼친다는 드라마가 있다. 여기엔 경쟁이 있고 제한이 있고 페어플레이가 있다. 그 모든 경기는 솔직히 우리의 일상과는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최고의 볼거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와 감동을 준다. 당신은 올림픽을 봐도, 안 봐도 상관없다. 하지만 올림픽에는 확실히 볼거리가 있다.


기왕 올림픽을 볼 거라면 고대 올림픽의 정신을 한 번쯤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시합에서는 성공할 때도 실패할 때도 있으며, 최대의 영예가 있을 때도, 거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시합의 절정에 있을 때도 불행의 밑바닥에 있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합에는 행운이나 요행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실패한다 해도 아무도 다시 도전하는 걸 만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올림피아 경기 대회가 돌아올 때까지 4년이나 기다릴 것이 아니라, 즉시 자기 자신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재기하고, 똑같은 의욕을 불태워서 시합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그리고 다시 깨지면 다시 시합하면 되는 것이며, 만일 한 번이라도 우승하면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1세기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담화록 중 ‘계획에 실패한 사람들에게’의 한 구절이다. 현대 올림픽이 2000년 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즈니스 프랜차이즈가 되었다고 해도 중요한 건 변하지 않는다. 가장 치열한 경쟁의 찰나에 변치 않는 삶의 정수가 들어 있다.



<에스콰이어>에 실린 글입니다.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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