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너의 눈빛이 어쩐지 부담스러워 -원미연
“지켜주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연세대학교 앞 커피숍에서 캐러멜 라테를 마시면서 김윤미 씨가 말했다. 며칠 전에 들었다는 남자 후배 이야기였다. “중국에서 알았대요. 여자는 호텔리어, 남자는 투숙객. 남자가 귀국했는데 여자에게 연락이 왔대요. 자기 서울 간다고. 둘이 호텔에서 2박을 하기로 했대요.” 좋은 흐름이다. 왠지 다음 일이 예상도 된다. 룸서비스만 시켜 먹으며 3일을 보냈을까? “아무것도 안 했대요.” 응? 그래서? “여자가 그 남자를 카카오톡에서 차단해버렸대요. 그 남자는 고민을 하다 제게 상담까지 한 거고.”
“여자는 거절당한 기분이 들었겠죠.” 김윤미 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이야기에는 섹스를 둘러싼 미묘한 의사소통의 결이 있다. “여자 쪽에서 ‘나 오늘 늦게 잘 거야’, ‘TV 끄고 나랑 얘기하자’ 이런 말까지 했다는데.” 남자가 여자와 섹스를 안 하는 게 ‘지켜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성애자 남자 입장에서 이 남자를 변호하고 싶기도 했다.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게 사랑을 나누자는 신호일 수도 있지만 숙박비를 아끼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뭔가 시도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신호도 모르고 그 나이를 먹었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긴 하다.
한국인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거주의 자립이 비교적 늦는 편이다. 그래서 여행이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냥 연인 관계에서 섹스하는 연인 관계로 넘어가는 구실이. <에스콰이어> 섹스 칼럼의 디바 김예리 씨도 본인의 첫 섹스가 여행지에서였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김예리 씨는 그답지 않게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지금의 예리가 아니었다구.”
굳이 나누면 섹스와 여행의 종류가 두 가지쯤 될 것 같다. 간 김에 한다, 아니면 하러 간다. 김예리 씨의 여행은 후자였다.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상은 했죠. 양평에 그 오빠네 작은 별장이 있었어요. 그냥 통나무로 된 집이었어. 가는 길에 가로등이 없어서 조금 무서웠던 게 기억나요. 섹스를 할 때 처음에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도. 하지만 여자들은 누구와 하든 처음 섹스는 별로 좋지 않잖아.” 그 이후로 김예리 씨는 새 유전을 발굴한 석유왕처럼 섹스의 즐거움을 퍼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리가 된다’랄까.”
“사실 난 섹스를 트려고 여행을 가.” <에스콰이어> 섹스 칼럼의 악역 권헌준 씨 역시 한결같다. 계좌도 아니고 ‘섹스를 튼다’는 말에 아연해졌지만 권헌준 씨는 신나게 말을 이었다. “연애 초기나 알게 된 초반에 더 자연스럽게 섹스하기 위해서 가는 거지. 솔직히 여자랑 여행 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귀찮고, 돈도 들고. 나는 혼자 다니는 게 좋아. 친구랑만 다녀도 눈치 보이는데 어떻게 여자랑 같이 가.” 극단적인 개인주의라도 권헌준 씨의 말 역시 나름의 일리는 있다. “이참에 활자화하고 싶다. 나 앞으로 여자랑 여행 안 가. 이렇게 써줘.” 역시 악역이다.
“저도 남자 친구랑 여행 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둘이 만난 적 없는 사이지만 이수미 씨의 말은 권헌준 씨와 통했다. “여행하는 방법이 다르면 연인끼리 힘들잖아요. 예를 들어 저는 여행 가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남자가 저 같은 스타일이 아니면 힘들죠. 친구끼리 가면 잠깐 흩어질 수도 있지만 연인끼리는 그러기도 어색하고요.”
그런 이수미 씨에게도 여행과 섹스의 추억은 있었다. “전주에 간판 없는 민박집이 있어요. 노부부가 운영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잘 챙겨주셔서 자주 갔어요. 거기 남자 친구랑 간 적도 있었죠. 가정집의 방 하나를 비워주신 거라 섹스 같은 걸 하면 안 되는데 ‘안 돼’라고 생각하면서도 하게 됐죠. 저는 ‘친할머니처럼 대해주신 할머니인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 친구가 굉장히 좋아했어요. 스릴이 있었나 봐요.” 하긴 이런 식의 스릴은 굳이 여행을 가야 얻을 수 있다.
“제 친구는 삼척에 간대요. 제 얘기 아니에요.” 강릉에서 나고 자란 은수현 씨처럼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있다. 들어나 봅시다. “일부러 엄청 낡은 민박집에 간다는 거예요. 바닷가에 있고, 인적이 없고, 창문도 옛날식 나무 창문이라 꼭 닫아도 바다 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에요. 거기서 문을 열어두고 섹스를 한대요. 너무 좋다고.” 리모델링을 하려는 삼척 민박집 사장님들이 이걸 보시고 계획을 접었으면 싶은 이야기다. 바다 소리 들으면서 온갖 사랑을 나눈 후 곰치국(특)이라도 먹으면 그거야말로 한국의 여흥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은수현 씨는 언젠가 작은 섬에 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자 친구가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였어요. 배를 타고 작은 섬에 들어갔어요. 해도 지고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콘돔이 없는 거예요. 그때는 어렸으니까 일부러 챙겨 오기도 좀 머쓱했고요. 그럼 ‘둘이 간식 사러 가는 길에 콘돔도 사자’고 생각해서 밖으로 나갔어요. 섬이 얼마나 작은지 모르고요. 편의점은 아예 없고 동네에 구멍가게 하나만 있는데 그 가게도, 그 가게 할머니를 봐도 도저히 뭔가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그날은 안 하고 넘어갔어요.” 교훈적이고 귀여운 이야기다. “그 이후로 석모도는 쳐다보지도 말자고 했어요.” 섬과 할머니에게는 죄가 없겠지만.
세상이 변했어도 섹스는 볼링이나 시저 샐러드가 아니다. 대놓고 섹스하러 가자고 말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하러 가는 것과 간 김에 하는 것, 하고 싶은 마음과 알고 싶은 마음, 기대와 불안 사이 어딘가에 섹스 여행이 있다. 섹스를 하러 갔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혼도 나고, 여행하러 갔는데 내내 커튼을 닫아놓고 섹스만 하기도 하고, 낮에는 여행, 밤에는 섹스를 하다가 하루에 4시간씩 자며 4박 5일을 보내기도 하면서, 쾌락이기도 실패이기도 추억이기도 부끄러움이기도 한 기억을 그 공간과 각자의 머리에 쌓아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된다.
“나는 여행을 좋아해요. 남자 친구랑 가는 여행의 즐거움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어.” 김예리 씨는 예의 그 ‘김예리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김윤미 씨도 커피를 다 마실 때쯤 말해주었다. “여행하는 방법이 안 맞아서 다투다가도 밤에 섹스를 하고 풀릴 때가 있어요. 그럼 또 다음 날 즐겁게 다니죠.” 섹스든 여행이든 왠지 어른이 되어서 해야 더 즐거운 것 같다. 정말 그렇다면 나이 드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