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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Jul 10. 2018

시거렛 애프터

사랑과 담배와 20세기와 21세기


“발코니가 있는 집이었어요. 잠깐 외국 살던 때 만난 남자였어. 그 남자는 담배를 피웠지.” 김예리 씨는 한때 흡연실이 크던 걸로 유명한 커피숍에서 옛날을 떠올렸다. 그 커피숍을 비롯해 이제 서울의 카페는 원칙적으로 모두 금연이다. 김예리 씨에게는 섹스의 여러 면모에 대한 서정적인 추억이 있었다. 담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해박한 DJ가 선반에서 LP를 찾듯 추억을 꺼냈다. “나는 담배를 안 피워요. 하지만 그 남자와는 섹스가 끝나면 같이 담배를 피웠어요. 담배 한 개비를 둘이 나눠 피우는 맛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때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중요한 이야기는 그때 하면 안 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거야.”


“섹스와 담배. 하나는 제가 좋아하는 거, 하나는 제가 싫어하는 거네요.” 김예리 씨처럼 이해하는 여자는 아주 적다. 이 취재 때문에 물어본 대부분의 여자들은 섹스를 하고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싫다고 했다. 송주은 씨는 특히 강경했다. “‘방금 전까지 내게 그렇게 좋은 걸 줬던 네가 이제 나에게 이렇게 싫은 걸 준단 말이야?’라는 생각까지 들어요. 담배를 피우겠다고 꼭 나가야겠어요?” 송주은 씨의 말도 이해가 된다. 충만한 섹스가 끝나면 둘의 몸 위로 습식 사우나 수증기처럼 페로몬이 떨어져 내리는 듯할 때가 있다. 거기서 남자가 주섬거리며 담배를 피우러 나가면 확실히 분위기가 깨진다.


“나는 별로 상관없었어.” 권헌준 씨는 한결같았다. 섹스를 할 수 있다면 일요일 새벽 4시 43분에도 한남대교를 건너는 남자다웠다. “잤던 여자 중에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도 있었지. 피우는 건 큰 상관없어. 그런데 키스할 때 느낌이 좀 다르지. 담배를 피우는 여자한테는 조금 더 담배 맛이 나니까. 그러면 키스를 좀 덜 하긴 해. 섹스할 때 키스를 안 해도 되는 체위를 하거나.” 권헌준 씨는 아무래도 담배를 꺼리는 것 같았다. 섹스라면 가리지 않는 권헌준 씨라 해도 안 내키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저는 섹스를 하고 나서 꼭 담배를 피웠어요. 끝나고 나면 생각나던데요.” 5년 전부터 담배를 피웠다는 유미선 씨의 말을 들으니 섹스와 담배에 대한 생각은 남녀의 차이라기보다는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흡연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나는 섹스하고 담배 안 피웠어요.” 박선영 씨는 말했다. 왜? “그냥 냄새가 배는 게 싫어서. 고기 구워 먹는 식당 잘 안 가는 거랑 비슷한 거예요. 남자들이 왜 섹스가 끝나면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지는 알겠어요. 힘들었지만 보람 있는 거 했으니까 한 대 피우고 싶은 거 아닐까?”


“남자가 담배를 피울 때만 나오는 모습이 있어요. 담배를 안 피울 때는 그 모습이 안 나와요. 남자의 두 가지 면모를 본달까? 그러면 왠지 두 명과 하는 기분이랄까요.” 김예리 씨는 꿋꿋하게 남자의 담배를 지지했다. 김예리 씨의 반대 입장은 뭘까? 남자의 사정? 흡연 반대? 다 아니다. 무지다. “네? 담배를 피운다고요?” 서대문구에 있는 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는 이수지 씨는 진짜 놀란 것 같았다. “섹스 후의 담배라니, 저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담배를 피워본 적도 없고 담배 피우는 남자를 만나본 적도 없어요.” 김예리 씨는 30대 초반, 이수지 씨는 20대 초반이다.


“영화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담배 피우는 남자.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담배에 대해 긍정적인 신지윤 씨는 이렇게 말했다. 신지윤 씨의 생각은 자유다. 다만 담배와 남자와 섹스가 붙어 있던 시절은 20세기, 혹은 20세기의 잔열이 남아 있던 2000년대 초반이다. 이제는 섹스를 하고 나서 마음 편하게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없다. 서울 시내의 모든 호텔이 실내 흡연을 금한다. 카세트테이프와 CD 플레이어와 소리바다의 시대가 지난 것처럼 섹스 후 담배의 시대도 이제 끝나버렸다. “섹스하고 담배를 피운다고요?”라는 이수지 씨의 반응이 요즘은 가장 자연스럽다.


“섹스하고 담배를 피우는 느낌이라는 게 있긴 있었지.” 5년 전 담배를 끊은 유상연 씨는 잠시 기억을 불러오는 것 같았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 나도 모르게 담배를 꺼낼 때가 있잖아. 사진으로 찍어두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거지. 좋은 섹스를 하고 담배를 피우던 느낌도 그거랑 비슷했던 것 같아. 아주 향락적인 식사를 마치고 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불러도 디저트를 멈출 수 없는 기분과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방금 전까지 들리던 격앙된 목소리, 지금도 온몸에 남아 있는 땀, 가장 친밀한 걸 나눈 인간 같기도 하고 그저 흥분한 짐승 같기도 한데 옆에 누워 있는 그 사람, 그 사이에서 축축해진 담배를 꺼내 한 대 피우는 그 기분.”


21세기의 우리는 음악을 들을 뿐이다. 지금은 겪을 수 없는 그 느낌을 재현하는 밴드는 이름부터 시거렛 애프터 섹스다. 이들의 음악은 신기하게도 정말 섹스 후에 피우는 담배 같은 느낌이 난다. 담배를 피웠거나 피우는 사람이라면, 아주 좋은 섹스를 하고 힘이 빠진 손으로 담배를 나눠 피워본 적이 있다면 이 밴드의 음악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거렛 애프터 섹스’라는 것의 기분을, ‘시거렛 애프터 섹스’의 시대가 지나가버렸다는 것도.


“담배 끊은 지 260일 정도 됐어요”라고 말하는 정용수 씨의 말을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피우던 때에도 여자 친구와 사랑을 나눈 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어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여자라면 제가 담배를 피우는 게 싫을 수도 있잖아요.” 섹스를 넘어 사람과 연애를 할 때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게 21세기다. 조금 더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담배가 좋아도 섹스보다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섹스 후 담배의 대체품


시거렛 애프터 섹스의 음악

이 친구들 노래는 섹스의 배경음악이라는 면에서도 굉장히 훌륭하다. 틀어두고 해도 좋고, 하다가 틀어도 좋고, 다 하고 틀어도 좋다. ‘Truly’가 특히 좋다.


보리차

물은 너무 싱겁고, 콜라는 너무 달고, 커피는 너무 쓰고, 녹차는 너무 안 섹시하다. 섹스하고 보리차를 마시면 은근히 괜찮다. 우선 갈증 해소에 뛰어나다.


두 번째 섹스

말이 필요 없다. 남자의 경우라면 담배를 피우지 않을 때 더 빨리 회복된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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