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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May 28. 2021

우아한 가난 같은 건 없다



"그런 물건 그만 봐라. 삶은 잡지가 아니야." 15년 전쯤 아는 형이 말했다. 한국에 출시되지 않은 고가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을 때 들었던 말 같다. 그때부터 잡지 에디터를 하고 싶었으니 그런 물건을 보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했다.


나는 물건에 관심이 있고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활동에 관심이 있었다. 잡지 에디터를 지망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갖고 싶은 물건보다 궁금한 물건이 훨씬 많았다. 갖고 싶은 것들은 별로 비싸지 않아서 큰 돈 없이도 살 수 있었다. 거기 더해 자본주의 사회를 뒤덮은 무한 상승의 정서도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큰 소리로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적게 벌고 적게 써야지. 때문에 거리낌없이 잡지사 에디터라는 걸 할 수 있었다. 잡지 에디터의 일이 무엇이고 이 직업의 미래가 어떤지는 몰랐지만 이 일이 큰 돈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알았다. 상관없었다. 돈에 욕심이 없었으니까.


1600만원. 돈은 없지만 호기로웠던 내가 처음 들어간 잡지사의 연봉이었다. 연봉 1600만원에 개의치 않았던 건 잡지에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4대 보험을 떼면 실 수령액은 109만원인가 103만원쯤 되었던 것 같다. 나는 내 첫 월급의 실수령액이 얼마인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었다. 서민 가정일지언정 부모님 댁에 얹혀 살았으니 가능했던 사치스러운 선택이었다.


세상의 모든 저렴한 가격에는 이유가 있고 그건 인건비도 마찬가지다. 첫 직장에서는 차마 여기 다 적지 못할 여러 일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임금 체불이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당시 대표님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임금 체불은 곤란한 일이었다. 비유하면 얼마 안 되는 옷가지 전부를 코인 세탁기에 넣었는데 세탁기가 열리지 않고 고장나버린 것과 비슷했다.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신세를 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첫 직장을 옮겨서도 에디터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직 정신은 차리지 못했다. 서른 살이 될 때쯤 처음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딱 월급만큼의 월 한도를 정해두고, 월급 이상으로 한도를 늘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할부를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를 별로 믿지 않고, 특히 재정 면에서 나에 대한 신뢰는 전혀 없었다.


딱 버는 만큼만 쓰던 동안 천만 다행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어른들은 알다시피 살다 보면 급전이 필요한 경우가 오고, 그렇게 보면 그때의 나는 굉장히 위태로웠다. 다만 위태한 줄 모르고 나태했던 그때는 좋은 일도 없었다. 마감의 자극을 빼면 매사 지루했고, 동시에 불안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뭔가 샀다. 잡지 일을 하면 사고 싶은 물건은 늘 있다. 마감이 끝나고 나면 전 세계에서 택배가 와 있었다. 그때 누군가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나는 '계속 도망 다니고 싶다'고 답했다.


몇 년 후 더이상 도망갈 수 없구나 싶은 순간이 왔다. 몇 군데 전전하던 잡지사를 모두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가지려 했다가 그 일도 그만두었을 때였다. 처음으로 특정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건강보험 지역가입자가 되었다. 아침마다 동네 도서관으로 출근하며 무기명 프리랜서 원고를 작성하고 어디의 뉘신지도 모르는 클라이언트의 모호한 지시사항을 받았다. '문장이 뚝뚝 끊어져서 고쳐 달래요.' 같은 수정사항을 보고 '그럼 문장이 끊어져야지 안 끊어질 수는 없는데 어떻게 고치나' 같은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도망만 다니다가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돈과 상관 없는 이야기를 잠깐 한 이유는, 그때 나를 지탱한 게 의외로 저축이었기 때문이었다. 잡지 일을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다닐 때 내 이름이 나온 뭔가가 없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내 모든 경력을 버리고 다른 곳에 왔으니 돈이라도 모으자 싶어 당시 월급의 80%를 저축했다. 그렇게 넉 달을 하고 그만두니 천만원이 모여 있었다. 살면서 처음 만들어 본 목돈이었다. 그 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너는 당장 망하지 않는다'는 금융당국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 선언을 계속 듣고 싶었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어떻게든 돈을 끌어모아 적금을 들었다.


그렇게 적게 벌고 적게 쓰며 물건 구경이나 하자고 생각했던 내가 생활인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담배를 끊고 저축을 하고 일을 아주 열심히 했다. 언젠가부터는 늘 일이 목구멍 끝까지 차 있는 것 같았다. 회사 일, 외부 원고, 기억나거나 기억나지 않는 많은 일들을, 돈이 되든 안 되든 거의 무조건 했다.


돈이 조금씩 모이자 신기한 일이 생겼다. 마음 한 구석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아직도 왜인지 잘 모르겠다. 약간의 저축 덕에 마음이 편안해진 걸까, 아니면 내가 조금 성숙해졌거나 호르몬 분비량이 달라져 조금 덜 불안해진 걸까? 여기서 내 저축이 내 정신상태에 미친 영향을 확실히 알아보려면 저축한 돈을 다 써버리면 될 텐데 이제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나는 여전히 온갖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만, 여전히 일종의 정신 보호 목적으로 약간의 돈을 저축하고 있다.


한창 도망 다니고 싶던 마음으로 살던 때에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읽었다. 그 책은 나의 한때에 큰 영향을 미친 책 중 하나였다. 나의 저소득 저소비 생활의 사상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우아하게 가난하게 살면 되니까.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에는 분명히 교훈적인 부분이 있다. 그것은 품위 있는 태도의 중요성이다. '품위 있는 태도를 가진다면 세속의 가난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받아들인 이 책의 주제다. 품위 있는 태도란 다름 아닌 당당함이다. 책에 나온 말을 빌면 '불쾌한 일을 겪고도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걷는 자존심' 말이다. 그러니 '우아한 가난' 같은 말은 함부로 주워섬길 게 아니다. 일단 불쾌함 앞에서 품위를 갖기부터 쉽지 않다. 지금 현대 한국이 조금이라도 불쾌한 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는 인터넷의 각종 '저격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우아한 가난은 저축 없이 수준에 안 맞는 사치품을 사대는 것 따위가 아니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책 안에서 분명히 이야기한다. '사치품이라고 선전되는 대부분의 물건들이 상당히 저속하고 짐스러울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가난'이란 단어 자체를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다. 점차 양극화가 심해지며 정말 장난이 아닌 가난을 접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이다.


잡지를 비롯한 이쪽 업계엔 돈 같은 거 상관없다는 자세로 사는 쿨한 사람이 몇 있다. 나이가 조금씩 들다 보니 그 분들의 쿨한 뒷배를 조금씩 알게 됐다. 세상엔 품위 유지비라는 게 있고 쿨에도 쿨 유지비라고 할 만한 쿨값이 있다. 버는 돈 없이 쿨한 사람 곁에는 돈이 있는 보호자가 있거나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내는 방책이 있었다. 보호자도 없고 돈을 만들어내는 묘안도 없는 1인 가구의 가장인 나는 내가 착실히 벌어 나를 보호해야 했다.


지금의 나는 도망만 다니고 싶던 때를 지나 한 바퀴 돌아 다시 어른의 문 앞으로 온 듯하다. 그런 나는 어릴 때의 나라면 생각하지 못했을 착실한 삶을 산다. 수입의 일정 부분은 반드시 저축한다.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주식투자에도 관심을 가져볼까 한다. 주식에는 도박적인 면이 있지만 삶의 모든 선택에는 도박적인 면이 있으며 주식은 그래도 역사가 오래된 도박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해외 무역을 다니던 17세기에 근대의 주식거래라는 개념이 생겼다. 역사가 로데베이크 페트람의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그때 암스테르담의 평범한 가정부도 자산 증식을 위해 주식을 샀다. 이 책을 읽은 후 21세기 서울의 평범한 생활인인 내가 주식을 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말을 요약하면 '적당히 현실적일 필요가 있겠다' 정도가 되겠다. 나는 한국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에디터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밥 안 사기로 유명한 선배' 같은 게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려면 내가 생산할 수 있는 상품과 그 상품의 가격과 그로 인해 생길 가치를 내가 잘 관리할 수밖에. 그래서 초면의 에디터께서 이 원고를 청탁하셨을 때 나는 용기 내어 공손히 고료를 여쭈었다. 십 수년 전 그 형이 해준 말처럼, 삶은 잡지가 아니니까.




2021년 7월호 <보그>에 실린 원고. 링크를 누르면 다른 분들의 에세이도 보실 수 있다.


조앤 디디온이 미국 <보그>로 데뷔했다. 그때 원고가 아직 보그 홈페이지에 남아 있다. 조앤 선생께 비빌 수는 없지만 <보그>에 데뷔해 기쁘다. 마침 요즘 하는 생각과 비슷한 주제를 받아 즐겁게 작업했다. 지면 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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