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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용 Dec 09. 2020

강원도와 맥주

도루묵을 굽는 시간


생선을 잘 굽고 싶어서 강원도에 간 적이 있다. 생선을 잘 구우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생선을 굽는 경험을 쌓으려면 생선을 많이 구워봐야 한다. 생선을 자주 구울 수는 없으니 한번에 많이 구워 봐야 생선을 굽는 경험이 몸에 쌓일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강릉에 갔다. 가서 하루 종일 생선만 구웠다.


생선을 굽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그 중에서도 나는 숯불에 생선을 굽고 싶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을 때 바깥에 화로를 놓고 숯에 불을 붙인 후 석쇠에 기름을 발라서 생선을 굽고 싶었다. 집에서 생선을 구우면 냄새가 신경 쓰이게 마련이다. 밖에서 구워야 걱정 없이 마구마구 생선을 구울 수 있다. 그래서 강릉에 가자마자 강릉에서 가장 큰 중앙시장에 갔다. 화로를 사러.


화로를 팔던 가게가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화로는 딱히 없었다. 몇 가게를 뒤져 숯불구이집 테이블에 들어가는 화로를 샀다. 화로를 사고 숯불을 사고 석쇠를 사고 나자 이미 생선을 다 구워본 것처럼 자신감이 솟았다. 도구를 다 갖췄으니 다음엔 생선을 사러 갈 시간이었다. 물어물어 지하의 생선 가게에 들어갔다.


중앙시장 지하 어딘가에는 생선 가게들만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횟집이 아니라 보통 생선집이었으니 애초에 관광객들이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관광도시에서 관광객이 올 일이 없는 곳에 간 관광객은 현재 물정 모르는 귀찮은 손님일 뿐이다. 마침 도루묵이 제철이었다. 나는 도루묵을 열마리만 살 수 있냐고 물었다가 사장님들께 비웃음 섞인 거절을 당했다. 한 바구니 가득 들어 있던 도루묵이 오천원이었다. 저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은 양의 도루묵을 살 수밖에 없었다. 옆에는 어망에 잘못 걸려 올라온 듯한 새끼 가자미가 있었다. 졸라서 천원에 샀다.


지인의 작은 별장이 강릉 시내와 주문진 사이에 있었다. 차를 그리로 몰고 가던 때가 아직 기억난다. 붐비는 시내를 빠져나와 해안도로에 면한 작은 해수욕장과 어항들을 지나쳐 좌회전해 인적 없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시멘트가 깨져서 울퉁불퉁한 바닥에 차를 대고 그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나무 마루에 작은 방이 두 개 딸린 단층집이었다. 집 앞에는 작은 공터가 있고, 그 주위가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보였다. 그 배경을 깔아두고 생선을 굽기 시작했다.


나무가 보이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화로를 준비하고 숯을 깔았다. 준비한 부탄가스에 토치를 연결해 불을 붙였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처럼 빨개진 숯 위로 석쇠를 올렸다. 석쇠에 열이 충분히 올랐다 싶을 때쯤 도루묵을 한 마리씩 올렸다. 치이이익. 생선 살에 들어 있던 기름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침을 삼켰다.


생선을 굽기 직전까지의 나는 아주 지쳐 있었다. 내가 속한 한국 라이프스타일 월간지 업계는 불안정했고 나는 스스로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국어를 듣고 싶지 않아서 혼자 외국에 며칠씩 나가 있기도 했다. 나는 이런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부유한 사람이 아니다. 혼자 외국에 다녀오면 잔고에 문제가 생겨서 또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한번은 ‘이번 마감이 끝나면 생선을 구워야지’라고 생각했다. 강원도에서 생선을 굽는 생각으로 고된 밤들을 버텼다. 그날의 도루묵은 내게 그런 의미가 있었다.


석쇠에 생선이 달라붙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삭삭 떨어졌다. 신선한 생선의 증표 중 하나는 윤기다. 그날의 도루묵 표면엔 하나같이 투명한 윤기가 감돌았다. 그날 새벽에 바다에서 올라와서 지금 나의 석쇠 위에 있다는 걸, 윤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반짝이는 생선이 내 석쇠 위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생살의 윤기가 익은 생선의 광택으로 변할 때쯤 한 마리를 집어먹었다. 아주 호사스러운 맛이었다.


그때 옆에 맥주가 있었다. 이미 맥주를 홀짝거리던 중이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바다에 한 번씩 눈길을 주면서 제철 생선을 구워 먹는다면 무슨 술인들 맛있지 않겠냐마는, 그럴 때 마셔야 할 술은 역시 맥주였다. 짭짤하면서도 달콤한 생선의 맛을 바다의 맛이라고 친다면 조금 쌉쌀한 맛 사이로 탄산이 도는 맥주의 맛은 땅의 맛 같았다.


맥주는 기술적으로도 그 상황에 잘 맞는 술이었다. 내게 중요한 건 술에 취하는 게 아니라 생선을 잘 굽는 것이었다. 한 모금씩 목을 축일 수 있을 만큼 싱겁되 조금은 알콜이 있는 술이면 싶었다. 그럴 때는 역시 맥주가 좋았다. 생선이 익어가고, 옆에 맥주가 있다. 날씨는 맥주가 미지근해지지 않을 만큼 적당히 시원하고, 아직 구워야 할 생선은 많이 남았다. 살면서 생선을 먹어 본 적도 많고 이런저런 걸 해먹어본 적도 많다. 강릉에서 생선을 구우며 맥주를 마시던 그때는 좀 달랐다. 그 많은 요리와 생선의 순간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광고 속의 맥주는 흔히 아주 시끄럽고 아주 즐거운 곳에서 나타난다. 사람들은 두꺼운 잔을 깰 듯 세게 건배하면서 맥주를 폭포수처럼 들이킨다. 내 맥주의 추억은 그와 반대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곳에서 음악을 작게 틀어두고 공들여 생선을 구우면서 우롱차 마시듯 한 모금씩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마시는 맥주도 좋았다. 지금 당장 차를 몰고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강릉에 가고 싶어질 정도로.


내가 사는 서울과 강원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고속도로도 더 많이 생기고 평창 동계올림픽을 맞아 KTX까지 개통됐다. 한국에서 여행하는 분들은 으레 펜션에 가고 으레 고기를 굽는다. 강원도에서는 도루묵을 구워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도루묵이든 뭐든, 산지에서 구워먹는 생선은 도시에서 구워먹는 생선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때 위스키 마시듯 천천히 맥주를 마시면 어떨까 생각한다. 당장 나부터 또 강릉에 가서 생선을 굽고 싶다. 마음 맞는 사람과 마주 앉아 도루묵을 구우며 쓸데 없는 농담을 나누며 천천히 생선 살을 발라먹고 싶다.맥주를 조금씩 마시면서. 탄산이 다 사라지기 전에.


천원 주고 산 새끼 가자미는 어떻게 됐냐고? 은박지에 싸서 올리브와 레몬을 뿌리고 숯불 위에 구워 먹었다. 지중해가 부럽지 않았다. 가자미도 맥주와 먹었다.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발행하는 잡지 <이스트>에 들어갔던 원고다. 작년 이맘 때쯤 '강원도와 맥주에 대한 원고를 적을 수 있겠느냐' 문의가 왔다. 적는 건 내 일이니까 잘 해야 하는데, 다만 나는 술을 잘 즐기지 않는다. 강원도와 맥주가 함께 들어가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다 이때 일을 떠올리고 이런 원고를 만들었다. 이스트의 인스타그램 계정 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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