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삶 그 자체다

존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 다시 읽기

by 오영

존 듀이를 다시 읽다


미국의 교육 철학자 존 듀이(1859~1952)의 이론은 우리나라 교육계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그의 저서 [민주주의와 교육](1916)은 책이 나온 지 100년이 넘은 지금도 교육 혁신을 이야기할 때마다 회자된다.


존 듀이의 교육철학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지난 겨울 심성보교수의 [다시 읽는 민주주의와 교육] 번역본을 읽으며 씨름하였다. 심성보 교수는 진보교육계에서 오랜 동아니 교육 혁신 담론을 이끌었던 분이기에 그의 번역서가 존 듀이의 생각을 가장 잘 번역했을 것으로 기대하고 보았다. 그런데 600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내용은 읽기도 전에 질리게 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심성보 교수가 존 듀이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높다 하더라도 번역서라는 한계 때문인지 번역에서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었고, 오타도 있어 읽는데 어려움이 배가되었다.


어쨌든 26장에 이르는 내용을 하루에 1장씩만 읽자는 마음으로 완독 하였다. 완독 한 후에도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이 책에 대한 여러 평론을 살펴보며, 내가 이해한 것과 비교해 보았다.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하게 이해한 것 같긴 했지만, 존 듀이의 전 생애에 걸친 사상적 흐름의 맥락 속에서 읽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핑계이긴 하지만 이런 이유로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더구나 나 같은 초심자가 이 책을 읽고 존 듀이의 사상을 명쾌하게 꿰뚫어 보고 현재 한국 교육의 현실을 비교 분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글은 그런 의미에서 책에 대한 요약과 감상이며, 100년 전 존 듀이가 왜 오늘날 한국 교육계에 계속 언급되는지에 대한 개인적 소회다.


<출처: 살림터 출판사>


교육은 미래를 위한 준비가 아니라 성장하는 삶 그 자체


존 듀이는 교육을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생명체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갱신해 나가는 '삶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했다. 생물학적 생명이 음식을 통해 존재를 이어가듯, 사회적 삶은 교육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능동적' 경험의 연속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교육의 일차적 목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갱신과 '성장'에 있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삶의 존속을 위해 가르침과 배움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듀이 교육 철학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교육에 외부적인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흔히 사람들은 교육을 미래의 직업이나 사회적 성공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보지만, 듀이에게 교육의 목적은 '더 많은 교육'이며, '성장 그 자체'이다. 미래를 위한 준비가 교육의 목적이 될 때 현재의 삶은 희생되지만, 현재의 성장에 집중하면 비로소 미래의 삶도 보장된다는 것이다.


듀이는 아동을 성인의 미성숙한 단계로 보는 시각을 거부한다. 미성숙(Immaturity)은 결핍이 아니라 '성장할 수 있는 역량(Power to grow)'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육은 학습자의 현재 경험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이어야 하며, 학습자가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확장해 나가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핵심이다.


"교육의 과업은 아이들을 과거를 되풀이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재현하거나 그 길을 다시 밟는 일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교육에서의 경험과 사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학생들은 이론적 관망자로서 지식을 획득하며, 지력의 에너지를 통하여 지식을 직접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생’이라는 말 자체가 ‘유익한 경험을 해 보는 존재’가 아니라, ‘지식을 직접 흡수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할 정도가 되었다."



듀이는 전통적인 주입식 교육이 지식과 경험을 분리시켰다고 비판한다. 말하자면 학교에 오기 전에 이미 손, 귀, 눈을 통해 배우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이미 경험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학교에 온 후로는 교과 중심의 형식적 학습으로 경험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통해 사고력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권위자들은 관계의 파악이 진정한 지적 문제이며, 따라서 교육적인 문제라는 점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잘못 생각한 것은 관계의 파악이 ‘경험’-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 보는 것’과 ‘겪는 것’의 결합-이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가령 ‘마음’은 주의를 집중하기만 하면 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든가, 이 주의력은 구체적 사태와 무관하게 생길 수 있고, 잘 소화되지도 않은 지식이 판치는 세상은 이 때문이다. ‘1온스의 경험이 1톤의 이론보다 낫다’는 말은 이론이 오직 경험 속에서 생생한 의의를 지니며, 또 그 의의가 검증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경험은 아주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이론-또는 지적 내용-을 생성하고 지탱할 수 있지만, 경험을 떠난 이론은 심지어 이론으로도 확실하게 포착할 수도 없다."


물론 듀이가 학생의 경험과 흥미를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경험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듀이가 말하는 교육에서의 경험은 단순한 신체적 활동이나 맹목적 충동, 또는 우연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찰이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것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경험이 의미 있는 경험이 되려면, 거기에는 비록 불완전한 것이나마 어느 정도 사고의 요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는 시행착오의 경험과 그 과정에서 사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하면서 경험을 재구성하는 사고 능력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학습은 학습자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 그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탐구(Inquiry)'의 과정이다. 듀이의 '행함으로써 배우기'는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 아니라, 행동과 그 행동이 가져온 결과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를 동반한다. 즉 듀이는 경험의 재구성을 통한 반성적 사고 능력의 발달을 강조하였다.



민주주의란 자유롭게 소통하고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듀이는 또 교육에 있어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듀이가 말하는 성장하는 삶으로서 교육이 실현되려면 민주주의가 기초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사실상 ‘민주적 공동체’에서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결과를 예상하여 논의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교육의 목적이란 개인이 자신의 교육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으며, 학습의 목적과 보상은 성장 능력의 계속적인 증대에 있다. 오늘날 이러한 생각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되려면, 오로지 인간과 인간의 교류가 상호적이어야 하며, 이해관계의 고른 배분과 그로 말미암은 광범위한 자극을 통해 사회적 습관과 제도를 재구성하기 위한 준비가 잘 갖추어져야 한다. 이 말은 그 사회가 ‘민주적 사회’ 여야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듀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단순한 정치 체제나 투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방식(A mode of associated living)'이자 '공동으로 소통하는 경험(Conjoint communicated experience)'이다. 그는 이상적인 민주 사회를 판단하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첫째, 집단 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관심사가 얼마나 다양한가? 이것은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된 공동 관심사의 수가 많고 종류가 다양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사회 통제의 한 요소로서 상호 관심사의 인정을 크게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다른 집단과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것은 "사회집단-서로 단절을 의도적으로 유지하면 고립될 수도 있는-이 서로 더 자유로이 상호작용할 뿐 아니라 사회적 습관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상호 교류를 통해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끊임없이 재적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듀이는 이 두 가지 특성이 바로 민주적으로 구성된 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계급이나 인종으로 단절된 사회는 민주적이지 않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적 관심을 넓혀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바로 이러한 민주적 인간을 길러내는 토양이다. 듀이는 학습자가 학교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협동하고 소통하며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는 경험을 할 때, 비로소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듀이가 말한 이상적인 민주적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또 완전한 민주적 공동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교육의 목적이나 결과가 왜곡될 수는 있어도 무의미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듀이는 현재의 학교교육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나, 자유방임적 관점 등에 대하여 경계하기도 하였다.



삶과 연결된 민주적 공동체로서의 학교


"학교교육의 목적이 기술의 습득(읽기 철자법, 쓰기 , 그리기, 외우기), 정보의 습득(역사와 지리 등), 사고의 훈련과 같이 조각조각 갈려 있는 것을 보면, 이 세 가지 일이 모두 비효율적인 방법임을 짐작할 수 있다."


듀이는 학교 교육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이마저도 과목별로 분절되어 있고 통합되지 못한 점을 비판하면서 학교가 사회적 삶의 장으로서 상호 교류, 소통, 협동을 통해 '연계성'의 인식을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장면과는 유리된 단순히 교과를 공부하는 장소로서 학교 대신에, 공부와 성장이 현재 공유되고 있는 경험의 장의 한 부분이 되는 사회집단의 축소판으로서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 놀이터, 공작실, 작업실, 실험실은 젊은이의 자연적인 능동적 경향을 지도할 뿐만 아니라 상호 교류, 소통, 협동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사회적 정신의 핵심인 ‘연계성’의 인식을 확장한다."


또한 학교에서 하는 학습이 학교밖 사회와 연속성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학습의 결과물이 일상 사회생활에서 통용될 수 없다면 그러한 학습은 잘못된 학습이라는 것이다.


"학교 안에서 하는 학습은 학교 밖에서 하는 학습과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 이 양자 사이에는 자유로운 상호 교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한쪽의 사회적 관심과 다른 쪽의 사회적 관심 사이에 수많은 ‘접촉점’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학교에 우애의 정신과 활동의 공유는 있으나, 거기서 일어나는 사회적 활동은 마치 수도원과 같이 그 울타리 밖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삶과 전연 공통점이나 관련이 없는 경우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사회적 관심과 이해력은 생길지 모르지만, 그것이 바깥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아 쓸모가 없다."


따라서 학교 안에서의 연계성뿐만 아니라 학교밖으로 연결되는 연속성을 통해 학생들이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학습받을 수 있도록 학교 교육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듀이의 영향과 우리 교육의 현재


듀이는 자신의 이론을 실제 적용하기 위해 시카고대학교에서 실험학교를 운영하였었다. 실험학교 운영을 통해 자신이 주장했던 이상적인 교육방법을 학교 교육에 접목하고자 노력했다. 듀이의 이론과 실험학교 운영은 진보주의적 교육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듀이의 교육론은 교사중심에서 학생중심으로, 교과서 중심에서 경험중심으로, 수동적 학습에서 능동적 탐구로, 주입식 암기에서 문제 해결 방식으로 훈육과 복종에서 자율과 협력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교육으로의 재구성과 전환이라는 진보적 교육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물론 듀이의 이론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듀이가 말하는 "경험"이라는 것이 너무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며, 반성적 사고로 전환을 일으키기 위해 교사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또 과도한 학생중심주의가 체계적인 지식의 습득을 소홀하게 할 우려가 있고, 사회 제도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상주의적인 민주적 공동체를 상정한 교육이 구현 가능한지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1910년대는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였고, 공장 노동자의 수요가 폭발하던 때였기에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간의 긴장과 갈등도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학교를 졸업하면 극소수만 자본가가 되고, 대다수는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현실에서 듀이의 이론은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계사적 상황으로 봐도 존 듀이가 이 책을 발간한 1916년은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때였고 이듬해인 1917년은 러시아혁명이 있었다. 그만큼 세계는 격변기에 있었다. 비록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한발 떨어져 있던 위치였다 하더라도 학교의 성장과 진보를 강조하는 것만으로 사회의 성장과 진보를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듀이는 몸소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듀이가 학교와 학생의 성장, 민주적 공동체로서 학교를 강조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이론적, 실천적 한계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듀이의 이론에 사람들이 계속 관심을 갖고 언급한다. 한국에서 보수 진보를 떠나 너나 할 것 없이 듀이의 명언 몇 개로 자신의 철학을 포장하려는 교육자들을 보면 듀이가 무덤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다.


어쨌거나 그만큼 듀이는 한국 교육계에 큰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것은 교육이란 무엇이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시대를 뛰어넘는 듀이의 성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존 듀이의 철학은 오늘 우리 교육의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 교육의 근본적 문제는 제도적 위기 이전에 철학의 부재에 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 발간되고 100년 넘게 지난 지금 존 듀이의 이론을 오늘날의 시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적 환경이나, 학교의 모습이 100년 전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듀이의 이론은 오늘날 우리 교육에 여전히 회자되며 또 적용되고 있다. 오히려 시대가 빠르게 변화할수록 듀이의 교육론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여전히 교과 중심, 학교 중심 교육이긴 하지만 프로젝트 학습이나 통합수업, 협력수업, 지역사회와 연계한 마을교육공동체 사업 등이 새롭게 접목되고 있는데 이는 듀이의 이론에 영향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듀이는 말한다.


"If we teach to-day as we taught yesterday, we are but looking backward; we are not preparing our children for the life they must lead." (만약 우리가 어제 가르쳤던 방식대로 오늘 가르친다면, 우리는 그저 과거를 돌아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지 못하고 있다.) [내일의 학교(1915) 서문, 존 듀이, 에블린 듀이]


추측하건대 이 문구가 "오늘의 학생들을 어제의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내일을 빼앗는 것이다"라고 변형되어 알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듀이의 이 말에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교육 현장의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교과서를 바꾸고, 교육과정을 일부 수정하고, 입시제도를 바꾼다. 그러면서 듀이를 인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듀이의 성찰적 이론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교육을 혁신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겠는가. 하지만, 진정으로 교육 혁신을 바란다면 앞으로의 100년을 바라보는 근본적 혁신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학생들의 내일을 위한다면 오늘의 방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으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유동하는 두려움 속에서 길을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