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하는 두려움 속에서 길을 묻다

지그문트 바우만, 『불안의 기원』

by 오영

우리는 왜 늘 불안할까?


잠 못 이루는 밤,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이유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적이 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천둥, 번개, 태풍, 홍수, 지진 등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면,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끊이지 않는 전쟁과 늘 불안한 한반도 정세, 불안한 경제 환경이 주는 경제적 곤궁에 대한 두려움, 양질의 일자리 부족과 준비되지 않은 노년의 삶 등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답답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안감을 일으킨다. 내일 아침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도 막연한 걱정이 엄습해 온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크고 작은 불안을 인생의 기본값처럼 여기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회학의 거장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불안의 기원』을 통해 이 지긋지긋한 불안의 정체를 파헤친다. 이 책은 2005년에 출판되었지만 한글 번역판은 2025년 4월에서야 나왔다. 하지만, 바우만의 통찰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출처: 다산초당>

바우만은 우리 시대가 ‘두려움의 시대’이며, 그 두려움은 과거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진단한다. 바우만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불안은 마치 ‘액체’와 같다. 정해진 형태 없이 어디로든 흘러가고, 모든 틈새로 스며든다. 눈앞의 맹수나 적국의 침략처럼 명확한 대상이 있는 공포가 아니다. 원인도, 실체도, 이름도 불분명한 채 우리 삶 전반을 떠도는 ‘유동하는 두려움’이다. 바우만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왜 과거보다 더 안전한 사회에 살면서도 더 큰 불안에 시달리는지, 그리고 이 안개처럼 자욱한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던져준다.


바우만은 두려움의 핵심을 ‘무지’와 ‘무력감’으로 정의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그리고 그 일이 닥쳤을 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무력감이 합쳐져 거대한 불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동물들도 위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인간의 두려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이를 ‘2차 두려움’ 또는 ‘파생된 두려움’이라 부른다. 이는 실제 위협이 없어도, 과거의 경험이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세상을 위험한 곳으로 인식하게 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마치 교통사고를 목격한 뒤 한동안 운전대를 잡기 무서워지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위험 신호를 보내며 우리 안에 파생된 두려움을 확대 재생산한다.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하고, 나는 무력하다는 세계관이 내면화되면, 우리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도 늘 위협에 대비하는 전투태세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도생의 싸움, 개인화된 사회의 비극


바우만은 현대 사회가 낳은 불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개인화’를 꼽는다. 과거 공동체가 개인의 삶을 든든하게 받쳐주던 시대와 달리, 지금 우리는 모든 위험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실업, 질병, 노령, 인간관계의 단절 등 수많은 사회적 위험이 존재하지만, 사회는 그 책임을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 “네가 더 노력했어야지”, “자기 계발이 부족한 탓이야”라는 목소리가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실패의 두려움을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한다.


이는 마치 수많은 사람이 탄 배가 타이타닉처럼 침몰할 위험에 처했는데, 각자 알아서 튜브를 구해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바우만은 이를 ‘타이타닉 신드롬’에 빗대어 설명한다. 우리가 딛고 있는 문명이라는 얇은 갑판이 언제 부서져 차가운 심해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 사회라는 거대한 배가 나를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처절한 각자도생의 논리만이 남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개인화가 연대의 가능성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자신의 생존에 급급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사회적 유대는 약해지고, 공동의 문제에 맞서 함께 싸우기보다 더 나은 튜브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내몰린다. 바우만은 “나무 뒤의 숲을 보지 못하게 방해한다”라고 지적한다. 개인의 불안은 사실 실업, 불평등, 환경오염 등 거대한 ‘숲’의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우리는 당장 눈앞의 ‘나무’에만 매달려 숲 전체가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과 악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공포 역시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난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는 절대적 공포를 희석시키기 위해 이혼, 실직, 배제와 같은 ‘비유적 죽음’으로 일상에서 예행연습 된다. 마치 백신을 맞듯 작은 죽음을 반복하며 진짜 죽음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려는 시도다. 악의 모습 또한 달라졌다. 과거의 악이 광기 어린 독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현대의 악은 ‘아이히만’처럼 시스템에 순응하는 평범한 관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악은 더 이상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찾는 ‘합리성’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이처럼 모호해진 악의 경계는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며, 어디에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든다.



희망이라는 ‘병에 담긴 메시지’를 찾아서


바우만은 불안의 원인을 파헤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위협하는지 분석한다. 자본, 정보, 테러는 국경 없이 전 지구를 넘나들지만, 우리의 정치와 삶은 여전히 지역 단위에 묶여 있다. 힘은 전 지구적으로 작동하는데, 그 힘을 통제할 수단은 지역에 머물러 있는 이 불균형이 바로 우리 무력감의 핵심 원천이다.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지역적 해법은 없으며, 이 사실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거대한 힘 앞에서 속수무책이라는 불안에 빠져든다.


국가는 한때 ‘복지 국가’로서 시민의 불안을 집단적으로 책임지려 했지만, 이제는 ‘개인 안전 국가’로 변모했다. 실업, 질병과 같은 사회적 위험을 해결하기보다 범죄, 테러와 같은 개인의 신체적 안전 문제에 집중하며 공포를 조장하고 통제를 정당화한다. 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 근본적인 사회 문제에서 돌리는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불안의 시대에 희망은 없는 것일까? 바우만은 책의 마지막에서 비관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제시한다. 그는 철학자 아도르노의 ‘병에 담긴 메시지’라는 비유를 가져온다. 당장의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언젠가 미래의 누군가가 발견해 주리라는 믿음으로 진실과 희망의 메시지를 병에 담아 띄워 보내는 행위. 이것이 바로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이자,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이다.

바우만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뿌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이 개인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개인화된 싸움을 멈추고, 자유와 안전의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의 기원』은 나에게 읽기 어렵고 불편한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막연했던 불안감의 실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불안은 더 이상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시대적 과제다. 우리 시대의 불안을 직시하고 희망을 길어 올릴 것이라는 믿음으로 2005년에 바우만이 띄운 ‘병에 담긴 메시지’에 이제 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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