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테헤란로나 여의도 증권가 골목 등 주요 업무 권역을 걷다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회사들이 어떤 곳들인지 빌딩에 걸려있는 간판들의 이름들이 보입니다. IT나 게임 업체들이 급성장하는 시기에는 NC소프트, 크래프톤, 카카오 같은 기업들이 대형 오피스를 사용하는 귀하신 몸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들어오느냐 마느냐에 따라 빌딩의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이런 회사들은 이제는 앵커테넌트를 넘어 직접 사옥을 짓고 보유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경제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최근 오피스 시장의 공기도 묘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한동안 매장만 늘리던 리테일의 강자들이 이제는 단순히 빌딩의 일부 공간을 빌리는 수준을 넘어, 오피스 빌딩의 핵심 사용자인 앵커 테넌트(Anchor Tenant)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글로벌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K-뷰티'가 있습니다.
K-뷰티가 프라임 오피스로 향하는 이유
다이소나 올리브영, 무신사는 그동안 리테일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오프라인 매장을 확장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그런데 화장품 회사들이 왜 갑자기 번듯한 프라임급 오피스나 사옥에 집착하기 시작했을까요?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서라고 하기엔 그 이면의 전략이 꽤나 날카롭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사람'입니다. 지식 산업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기업 생존의 직결탄이 되었거든요. "어디서 일하느냐"가 곧 "누가 지원하느냐"를 결정짓는 MZ세대의 가치관을 기업들이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겁니다. 쾌적한 오피스와 회사 출입증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 경험이자 복지가 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프라임급 오피스에 입주를 하는 것만으로도 큰 마케팅 효과가 있기 때문에 K-뷰티 회사들은 성장의 눈덩이를 굴리기 위해 더 나은 사무 공간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올리브영이 쏘아 올린 큰 공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역시 올리브영의 KDB생명타워 매입일 겁니다. 국내 관광시장의 회복으로 독주하고 있는 올리브영이, 임차인으로만 머물지 않고 도심 핵심지의 오피스를 직접 소유하며 '사옥테크'의 정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임직원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무 공간을 위해 임차를 하는 대신 신용도 높은 실수요자(SI)로서 자산 가치까지 챙기겠다는 영리한 선택을 한 겁니다.
K-뷰티의 격전지가 된 성수동은 또 어떤가요? 얼마 전 매각되어 연면적 평당 4,000만원에 매각이 되어 업계에서 이목을 끌었던 '팩토리얼 성수'의 주인공도 결국 올리브영입니다. 패션과 뷰티의 성지로 불리는 성수동에서 이들이 앵커 테넌트 역할을 한다는 건, 이제 K-뷰티 기업이 건물의 투자 매력도를 좌우하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특히, 팩토리얼 성수가 높은 매각가에 매각될 수 있었던 이유도 올리브영이 낼 수 있는 성과 임대료의 수준이 그만큼 높게 평가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의도 랜드마크인 파크원에도 이런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금융과 대기업의 전유물 같던 이곳에 K-뷰티 기업인 '더퓨어랩'이 입주했다는 소식은 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화장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매출이 국내를 넘어 글로벌까지 확산되면 단기간에 급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국내 산업의 세대교체가 오피스 빌딩 지도 위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강남권역에서는 마스턴투자운용으로 부터 센터포인트 강남을 매입한 F&F가 기존 사옥을 매각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임대를 택했습니다. 이 공간에는 글로벌 K뷰티 기업 구다이글로벌이 F&F가 이전하고 남은 사옥 전체에 대한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빌딩의 가치는 결국 시대를 이끄는 주인공이 결정
최근 우리가 F&F나 무신사의 행보를 보며 부동산과 비즈니스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데 있어 배울 점이 있습니다. F&F는 강남 핵심 업무지구에 입성하며 영리한 '사옥테크' 전략을 펼쳤고, 무신사는 성수동에서 앵커 테넌트로 자리 잡은 뒤 몸값을 높여 자산 매각을 통해 개발 이익까지 실현했습니다. 단순히 공간을 쓰는 게 아니라, 사업과 자산을 동시에 설계하는 도구로 오피스를 활용한 것입니다.
오피스 빌딩의 주인공은 늘 시대의 산업 구조를 비춥니다. 게임과 IT를 지나 K-뷰티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결국 우리 산업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한 발 먼저 보여주는 예고편과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예상이지만, 다음 오피스 시장의 주인공은 아마도 인공지능(AI)을 핵심으로 하는 기업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서울 오피스 시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당분간 K-뷰티의 몫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K-pop에서 부터 시작된 K-culture의 유행이 지속되는 이상 주요 업무 권역의 앵커테넌트도 함께 연동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오피스 시장의 변화를 읽는 것은 결국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파악하는 일과 같습니다. 빌딩이라는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 안에 어떤 뜨거운 에너지가 담기느냐에 따라 도심의 색깔이 바뀌고, 자산의 가치가 다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빌딩 숲 사이를 걷다 보면 어제의 주인공이 오늘의 강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IT와 게임 기업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K-뷰티라는 새로운 물결이 밀려오는 지금의 현상을 보며, 부동산은 결코 멈춰있는 재산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 숨 쉬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제가 현업에서 20년 넘게 시간을 보내며 깨달은 건, 눈에 보이는 평당 가격도 시장을 이끌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산업의 맥락'을 짚는 안목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상업용 부동산 업계에서 누군가는 공급 과잉을 걱정하고 위기를 말하지만, 변화의 파도를 타고 기회를 선점하는 이들은 늘 존재해 왔습니다.
여러분도 퇴근길 테헤란로나 도심 빌딩들의 간판들을 보며, 다음은 또 어떤 이름들이 우리 도시의 랜드마크를 채우게 될지 다가올 미래를 상상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 그 속에서 나만의 인사이트를 찾아가는 과정이 우리를 더 단단한 부동산 전문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의 생각이 여러분의 비즈니스와 투자에 작은 실마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