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강의

by My


교수님 강의를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 한 이유는 기록하고 싶어서다.


길을 잃어 흔들릴 때 마다 다시 보려고.


어쩌다보니 삼일동안 쉬게 되었다.

여유을 갖게 되었지, 그 전 이틀동안 잠을 자서 기력 보충을 했는데 또 삼일을 쉬는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그동안 피곤하단 핑계로 미뤄왔던 것들을 새벽 5시까지 차근차근 했다. 그 행동에 대한 스스로 뿌듯함.


이 감정은 자발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좋은 거다.

이 좋은 감정이 잊혀질까 맘 한쪽에선 걱정 아닌 걱정을 했는데, 일어나서 우연하게 본 강의가 교수님 강의다.

내가 어제 행동하고 느낀 감정에 대해 잘 설명해주셔서 남겨 놓고 싶었다.


keep it in mind


근데 다 보고 나서 알게 된 건 종교 강의 였다는...anyway.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얻을 부분은 얻고 넘길 부분은 넘기고,



나는 왜 살까?

삶의 목표가 없을 때 해야하는 것.

by. 한성열 교수




직업이 취미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다시 이야기 하면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도 마련하면 정말 좋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둘을 같이 하기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데 니가 좋아하는 거 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라.


대게 우리가 받는 충고다.



일차적으로 안전함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는 걸


우리가 분명히 인정을 하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하는 분들이 정말 행복한가? 자기 삶이 보람 있다고 느끼는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라고 느낀다.



나는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잘 안돼서 많이 안타깝다. 어떻게 하면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의논하러 오는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만. 왜 사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제일 어렵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우리 삶의 목표이다.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다른 사람들은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이야기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한 번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찾아볼 기회가 없어서 모르는 거다.


어렸을 때 부터 부모님이 너는 이렇게 해야 해. 하는 걸 쭉 따라서 해왔고 그 다음에 우리 사회가 이러이러하게 살아가는 게 좋은거야 라고 정해준 목표에 따라서 살아오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로 부터 굉장히 잘 살고 있다 또는 다른 사람들로 부터 굉장히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지만 과연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일까? 이 삶을 살아가는 게 정말 즐거울까?


이런 것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분들이 많이 상담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걸 찾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안전한 삶을 살려고 하는 마음이 강해서



이유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날 때 다른 동물에 비해서 가장 무기력한 상태로 태어났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 사랑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 하면 살아갈 수 없다는 거


우리는 끊임없이 어떻게 행동을 하면 우리 부모가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줄까 라고 끊임없이 탐색하며 살아간다.



나이가 들면 나는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을거다. 라고 말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끊임없이 그걸 찾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대치되는 경우는 결혼을 하면 내 남편, 내 아내 에게 사랑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게 제일 밑 바닥에 깔려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심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무엇을 잘 하는 가 를 찾기보다 어떻게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가 하는 거에 더 먼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간다.


대 부분의 사람들의 삶이다.



내가 진짜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이 질문에 대답은 솔직한 답이고 자기가 이 삶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을 물어보는거다.



사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자기 나름대로의 잠재력이 있다.


그거를 살아가면서 그것을 실현해 가는 과정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실현할 때 진정한 즐거움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찾을 기회를 별로 주지 않기 때문에, 보통 재미라고 느낄 때 내가 진짜 진정한 재미라고 보다는


내가 진짜 원하는 걸 포기할 대가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 오는 즐거움 이걸 ‘나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면 ‘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 재미있다.’


그러면 그 그림이 내가 외부의 칭찬이나 처벌이 없는 상태에서 정말 자연스럽게 나와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재미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친구들은 내가 그림을 그렸을 때 옆에서 엄마가 보더니 ‘너 그림 참 잘 그리는구나, 앞으로도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 라고 칭찬을 해줬다.


그러면 이 아이는 내가 그림을 진짜 그리고 싶은 것보다는 어머니의 칭찬을 계속 받으려면 그림을 자꾸 그려야 한다.


이럴 때 사실 이 친구는 그림을 그릴 때 진짜 재미있는 게 아니다. 이건 어머니의 칭찬을 받기 때문에 하는 거다.



심리학에서 아주 유명한 ‘ 원숭이와 바나나 ‘라는 실험이 있다.


원숭이는 사람하고 똑같이 호기심이 있어서 퍼즐을 푸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퍼즐을 풀게되면 또 다른 퍼즐을 달라고 조르고 다른 퍼즐을 주게 되면 그 퍼즐을 푸는 걸 좋아한다.



한 번은 퍼즐만 주는 게 아니라, 퍼즐을 다 풀었을 때 바나나를 같이 준다.


원숭이 마음은 어떨까? 퍼즐을 푸는 것도 좋은데 바나나도 얻으니 즐거워서 더 열심히 퍼즐을 푼다. 또 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퍼즐을 푸는 시간이 훨씬 짧아진다. 그리고 난 다음에 바나나를 주면 더 열심히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이번에는 처음처럼 퍼즐만 주고 바나나를 안 준다.


이 원숭이는 퍼즐을 풀까? 안 풀까?



더 이상 원숭이가 퍼즐을 안 푼다.



그러면 원숭이는 왜 퍼즐을 안 풀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 동기가 있는데 그 행동 자체가 즐겁고, 보람 있고 또는 의미가 있어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그 행동을 하는 걸로 통해 결과로 보상이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게 있다.



행동 자체가 즐거워서 하는 것을 내재적 동기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하는 것을 외재적 동기



원숭이가 퍼즐을 푸는 거는 내재적 동기. 타고난 거다


그래서 뭔가를 풀 때 굉장히 즐거워한다 이런 얘기인데 이제 바나나를 같이 준다.


그렇게 되면 바나나는 외부의 보상이기 때문에 바나나는 외재적 동기가 되는 거다.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가 같이 주어지게 되면 외재적 동기가 이긴다.


그래서 원숭이는 점차적으로 퍼즐을 푸는 이유가 뭐가 되나?


바나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퍼즐을 푸는 걸로 바뀐다.



그렇게 되니까 나중에 바나나를 안 주고 퍼즐만 주게 되면 안 푼다.


아마 원숭이는 속으로 ‘내가 미쳤니? 바나나도 안주는데 내가 이걸 뭐하러 힘들게 푸냐’ 라고 생각 할 수 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원숭이는 지금 본인이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모른다.


외부적인 보상이나 처벌 없이도 내가 즐거워서 하는 동기를 잃어버린 거다.



내재적 동기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본능적인 동기인데 크게 보면 세 가지가 있다.


그게 다른 동물들하고 인간이 다른 건데


첫째 공부하는 거 인간 말고 다른 동물들은 공부를 안한다.


두번째로 다른 동물들은 종교가 없다. 그래서 신앙적인 행위를 안 한다.


세번째 다른 동물들은 예술활동을 안한다. 아름다움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이 세 가지를 한다.


어렸을 때 이걸 다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그냥 호기심 가지고 공부를 한다.


두 세 살이 되면 어른들을 따라 다니며 ‘이건 뭐야 이건 뭐야’ 라고 물어본다.


볼펜이 있으면 분해해서 속에 뭐 있는지 알아보고 이게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 행위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가서 공부를 잘 하게 되면 상을 받고 공부를 못하게 되면 처벌을 받는 경험을 되풀이 하면


공부가 칭찬을 받거나 처벌을 받는 걸 피하게 되는 외재적인 동기로 바뀌어서 그 다음에 내가 공부를 통해서 어떤 걸 얻지 않으면 더 이상 공부를 안한다.



종교 생활을 하는 것도 만찬가지이다.



우리가 종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간은 자신의 한정된 능력을 뛰어 넘어서 자기를 초월하려는 아주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만이 절대자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영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종교를 믿게 되면 현실적으로 어떤 보상을 받는다든가 종교를 안 믿으면 어떤 처벌을 받을 거라는가


이런 것하고 결부가 되면 그 다음엔 내재적 동기로 종교를 믿는 게 아니라 어떤 보상을 얻거나 처벌을 피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종교 행위를 하게 된다.


이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심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렸을 때,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걸 통해서 외부의 보상이나 처벌받는 경험을 너무나 많이 하고 자라나는 경우에는


내가 정말 뭘 좋아하고, 뭘 즐거워하고 어떤 것이 나의 삶에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을 찾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공간이 없고 항상 다른 사람이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원하는 걸 해야만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이러한 등식이 내 마음속에 성립이 된다.



이건 사실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건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관계없이 우리가 사랑을 받을 수 있다라고 하는 마음을 심어줘야 하는데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건 태어나서 제일 처음 우리가 익혀야 하는 큰 배움의 본질이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제일 많이 감동하는 말씀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뭐냐면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나?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는 우리가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가 구체적으로 명시가 안 돼 있다.


막연히 사다는 건, 인생은 고행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는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현대 독일어 성경에는 이렇게 돼 있다.


‘율법 학자들이 부과한 계명을 지키느라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아.’ 이게 예수님의 말씀.


그 당시 유대의 상황을 보면 율법을 지키는게 굉장히 중요한 시대 그래서 지켜야 할 율법이 명문화 된 것이 613개라고 한다.


그것 말고도 다양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율법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러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게 수고하는 거고 못 지켰을 때 오는 부정적인 감정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는 이러한 삶을 살지 말라.


남이 정해놓은 어떠한 계명, 명령, 기준에 따라서 살지 말라.


그렇게 되면 너는 굉장히 힘들다. 마태복음 11장 예수님이 직접 해주신 말씀이다.


나한테 오면 너희들은 쉴 수 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 다음 구절이 중요한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 대목이 현대어로 되어 있는 독일어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냐면



나한테 와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들의 삶이 실현될 것이다.



이 앞뒤를 보면 남이 만들어놓은 기준을 따르느라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들에게는 그런 걸 강요 안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쉬게 될 것이다.


나한테 와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들의 삶이 충실히 실현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라고 하는 건 남이 만들어놓은 기준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너의 삶이 실현되길 바란다는 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잠재력이라고 표현 한다.



그 잠재력을 누가 주었나. 여기까지는 학문으로 이야기 할 수 없다.



우리는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또는 생물학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




누가 이 잠재력을 줬는지. 이게 어디에서 왔는지.


누군가가 우리에게 목적을 가지고 준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거다.



왜 그게 우리한테 주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게 우연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에


무언가 나의 삶을 움직여가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하는 건 다 우리가 믿게 되어 있다.


종교를 안 가지고 있는 분은 ( 기독교 ) 운과 팔자가 있다고 믿는다.



이게 본질적인 인간의 내재적인 동기


우리는 하나님이 잠재력을 주셨다고 본다.


잠재력을 주시고 이 땅에서 충분히 실현해가도록 하는 것을 원한다는 거다.



우리 삶이 잠재력을 실현할 때가 제일 즐거운데 왜 못하느냐?


실패할까 봐 두렵기 때문에


그런데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건 믿음이다.



내가 뭘 잘 하는지를 모르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내가 뭘 잘 하는지 확 알게 되는 건 없다.


조금씩 조금씩 내가 정말 외부적인 보상이 하나도 없을 때


내가 어떤 걸 했을 때 누가 칭찬을 해준다든가 또는 내가 무언가 했을 때 결과가 나쁘게 나왔을 때


누가 나를 처벌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말 내가 뭘 원하는가 하는 걸 찾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건 마음속에서 샘솟듯이 나오기 때문에 이걸 알아보려고 하면 시간을 가지면 얼마든지 맘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네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사실은 이러한 것을 해내기 위해서 온 거다.


라고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심리학에서는 이 과정을 통찰이라고 한다.



아하, 내가 이걸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구나,


내가 이거를 정말 잘 하는구나


내가 이걸 할 때 제일 즐거워하는구나



깨닫는 걸 통찰이라고 한다.



심리학적으로 통찰이라고 하는 이 현상은


외부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조용히 내가 무엇을 할 때 정말 즐거운 가


그걸 내가 했을 때 외부에서 보상이 안 주어진다고 해도


이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가? 하는 걸 찾아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취미 생활을 해라 라고 하는데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인생을 더 즐겁게 산다.


이유는 취미 자체가 보상을 받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닌 취미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이제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건 스스로 자기의 삶을 제한 하는 것.



내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발휘하는 노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는 그 순간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발휘해가는 것이 나에 대한 의무이고


동시에 나를 이 땅에 보내주신 분에 대한 도리다.




이걸 알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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