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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reici Jan 20. 2022

[Histoire 5] 어, 나 해냈다

21년 유월에 운전을 시작했던 이유가 있었다. 마침 시기 상 아빠가 차를 바꾸면서 이전 차를 내가 몰 수도 있게 된 것도 있었지만, 사실 이런저런 이유로 그 차를 중고로 내 놓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 것 같다는 쪽으로 거의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 차를 내가 타기로 하고, 사랑니를 갑자기 뽑게 되고 일도 쉴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 도로연수를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그 때가 아니면 다음이 언제일지 불투명했고, 문득 갑자기 이렇게해서 운전을 하게 되면 누군가를 좀 더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실제로 그걸 해낼 수 있을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운전만 할 수 있게 되면 운전을 해서 어떤 곳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운전을 시작했고, 작년 유월에 그렇게 운전을 시작하게 만들어 준 막연한 기대는 일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종종 그 막연했던 기대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기대였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그 때 운전을 시작한 덕에 많은 친구들과 새로운 곳에 많이 갔고, 내 세상도 넓어졌으며, 새롭게 알게된 것도 많고, 이렇게 서울에서까지 운전을 하고 다닐 수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주엔 무려 서울에서 세종, 세종에서 부산 그리고 다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처음 해보는 (휴게소를 들러야 하는) 장거리도 꽤 잘 해내었다.


그렇게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갑자기는 아니지만, 어렵지 않을까 했던 날 어찌저찌 시간이 맞아서 친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볼일을 보고 바로 친구를 만나러 출발했고 진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커피도 한 잔 하고 밀린 얘기도 하고 귀여운 동네 구경도 하고 다시 어딘가에 가봐야하는 친구를 차로 그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5분도 채 안 걸린 것 같은 짧은 거리였고, 그 순간엔 둘 다 그냥 신기하다 정도밖에 생각을 못했다. 늘 그 친구가 운전하는 차에 내가 탔었고, 장소는 그 친구가 사는 곳 아니면 부산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 날은 내가 운전을 했고, 부산도 그 곳도 아닌 서울이었다. 그렇게 친구를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가는데, 초행길이어서  한 번의 '경로를 이탈하여,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를 듣고나서야 백미러에 보이는 노을을 보면서 오늘 날씨가 좋아서 해지는게 예쁘네,라는 생각을 했고 제대로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에 접어들고 나서야 '어, 나 해냈다' 라는 생각을 했다.


작년 유월의 막연했던 기대, 목표를 이렇게 우연히, 생각지도 못하게 해낸 것이다. 타이밍이 잘 맞은 것도 좋았는데, 그 타이밍에 맞춰 내가 거기까지 운전해서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던 게 뿌듯했다. 8월 초부터 너무 정신없는 일들이 한 꺼번에 밀려왔고, 그 와중에 누군가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많은 이들의 무책임함에 진짜 많이 힘들었는데, 그 많은 것들을 한 번에 위로받은 느낌이었다. '시간의 차이지, 결국엔 다 되더라고'라던 언니의 말처럼 정말 결국엔 다 해결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정말 막연하던 하나는 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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