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타임 개발자 파트타임 성덕의 덕질 로그 #01. 우리의 노래
위험한 세상에선 음악이 제일 안전하지
날 꿈으로 데려가 줘, 가사를 현실로 만들어줄게.
소처럼 일해줘서 고마웠다.
호의는 돼지까지, 소부터는 흑심이라 했는데. 이 정도로 일에 진심이면 그쪽에서 먼저 작정하고 꼬신 거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누런 소가 일을 잘하오, 까만 소가 일을 잘하오? 차라리 이런 옛날이야기 속 질문이라면 이미 대답한 지 오래였을 테다. 하, 어쩜 좋소. 우리 소는 하나인데 재능이 서너 개.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다 잘하오.
그래, 우리 소. 아니, ❤최애❤는 요즘 말로 올라운더와 본업 천재고, 우리말로 팔방미인에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정정당당하게 하나로만 승부할 것이지 치사하게 다 잘하더라. 그래서 더 꼼짝없이 당했다.
업종 불문. 다양한 장르는 기본에, 1년에 n회씩 컴백하며 다작하는 성실함까지. 한국을 넘어 세계를 횡행하는 폭룡적 활동에 정신을 못 차렸다.
이런 최애 자랑은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해서 입 아프고 배도 고팠다. 휴, 역시 소는 어쩔 수 없다. 자바먹을 수 바께.
오늘도 열일하며 또다시 레전드를 갱신하는 최애 덕분에 축복이 끝이 없고 덕질에 출구가 없다.
비록 내 여기선 주 52시간 일하는 풀타임 개발자이지만, 그래도 밖에서는 파트타임 성덕이다.
경력 vs 덕력. 이 유구한 역사는 신입사원 때부터 시작했다. 사시사철 밤낮없이 열일하는 최애의 스케줄을 24365 응원하기엔 현생도 살아야 하는 일개 직장인의 근태가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앞뒤로 휴일도 안 붙은 쌩 평일에 간지나게 올린 반차와 연차에 -신입이라 몇 개 없었는데도!- 더 이상 가족 행사니, 뭐니 다른 있을 법한 핑계도 더는 없어서 부서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덕밍아웃을 했다.
사실 시간문제였다. 최애를 만나러 가기 전의 엉덩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들썩거렸다. 이런 형편없는 엉덩이에 달린 꼬리라면 길든 짧든 곧 밟히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마음속이 이렇게 둥둥거리는데 겉으로 덤덤한 척하기는 너무 피곤했다.
어쨌든 윈윈이다. 나도 별 탈 없이 스케줄을 사수할 수 있었고, 부서 선배님들은 쓸데없는 걱정을 덜었다. 옆자리 선밴님은 내가 유난히 단정하게 입고 온 날 오후 반차를 내서, 어디 다른 회사 면접이라도 보러 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우리 선배님들은 갓반인이라 괜히 걱정을 샀다. 최애의 활동기에는 덕후도 그만큼 바쁜 법이다. 놓친 콘텐츠는 없는지 촬영 후기나 사람들 반응은 어떤지도 찾아봐야 하고, 공식 스케줄이나 서폿에는 최애 기죽으면 안 되니까 꼭 참석해서 힘줘야 한다. 이제 선배님들은 나의 돌발성 연차 통보를 받으면 조용히 초록창에서 내 최애의 이름을 검색해 본다구 한다.
우리 차쟝님은 나의 덕질라이프를 응원해 주셨고, 파트쟌님은 근태 결재를 하면서도 파티션 너머 들려온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커피차? 화환? 그거 다 팬들 돈으로 하는 건가요?' 아니, 그게 중한가요? 최애는 그냥 [중요] 건강 지키면서 열심히 하면 돼요!
파트쟌님도, 덕질을 이해 못 하는 다른 많은 머글들도 모두 이렇게 시시한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무언가에 가슴 뛰는 순간들이 있지 않았을까.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덕질하느라 바쁜 내가 알 턱이 없다.
세상에는 나처럼 최애 서폿에 진심인 덕후들이 너무너무너무 많다.
나 때 하던 서폿은 최애의 생일이나 데뷔 기념일에 손편지랑 선물을 모아서 소속사에 전달하고, 제작 발표회에 (축)화환(하)이랑 촬영장에 밥차 보내면 d따봉b이었다. 근데 요즘은 우리 애 잘난 거 온 세상 다 볼 수 있게 티비랑 미디어 파사드에 광고도 내보내고, 지하철 스크린 도어랑 버스에 랩핑도 한댄다. 또 촬영장에 밥차보단 커피차에 디저트로 추로스나 와플, 탕후루를 보내는 게 국룰이라는데, 그거 뭐 어떻게 하는 거예요..?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누구 입에 들어가는 건데 먹여도 좋은 걸 먹이고 싶은 마음으로 알아본 커피차/분식차/간식차는 종류가 수십 개고, 업체는 수백 개였다. 어디는 단가가 나쁘지 않았는데 메뉴가 몇 개 없었다. 또 어디는 기본 제공 케이터링 시간이 길었지만 지방 출장비가 비쌌고, 다른 덕후들의 후기와 엑스 배너, 컵홀더 같은 인쇄물 퀄리티까지 가장 괜찮아 보이는 다른 어디는 하필 스케줄이 안 됐다.
이곳저곳 다 찔러보고 예약금 다 걸기엔 시간도 촉박하고 예산도 한정되어 있어 고민의 연속이었다. 원래 여러 개 중의 하나 고르는 것보다 두 개 중의 하나 고르는 게 더 어렵다. 머리가 지끈지끈했지만, 회사에서 품의 올리는 것보다 간식 견적 뽑는 게 백배 천배 더 재밌으니 괜찮다.
아니, 나 지짜 우리나라가 그렇게 넓은 줄 몰랐다.
근교의 세트장이나 스튜디오 촬영이면 좀 낫지만, 야외 로케이션 서폿은 K-국토의 70%가 산지여서 산으로 가는 날도 더러 있었다. 와, 어떻게 이렇게 산도 좋고 물도 좋은 곳에서 촬영할 생각을 하셨을까!! ㅎㅎㅎㅎ
이런 촬영날은 최애도 피곤하고, 스탭들도 피곤하고, 그거 서폿 온 덕후들도 현생과 덕질 투잡 뛰느라 많이 피곤했다. 그래도 이게 다 좋은 작품을 위한 고생이라 생각하고 응원해야지 별수 없다. 뭐 내가 만드냐고.
또 그러다 가끔 K-기념일과 서폿 가는 날이 겹치면 최애의 이름으로 돌릴 간식을 따로 준비했다. 발렌타인데이랑 화이트데이에는 최애가 좋아하는 H사나 S사 달다구리를 샀고, 빼빼로데이에는 모두가 좋아하는 근본맛 빼빼로를 박스째 샀다. 덕분에 내가 제철 간식을 다 먹는다. 흑흑.
촬영이 쉬어갈 때까지 대기하다 보면 커피차 사장님이랑 제법 친해질 수 있었다. 준비한 간식을 나눠드리면 사장님은 개발 중인 신메뉴를 시음하게 해 주시거나 원하는 음료를 커스터마이징해서 만들어주셨다. 꽁짜 커피가 맛이 없을 수 없다. (※ 여러분의 소중한 모금은 절대 사적으로 유용하지 않습니다.)
오늘처럼 날이 갑자기 추워진 날에는 유자차가 많이 나간다. 커피차 사장님이 개시를 준비할 때, 우리는 그 옆에 간이 테이블 딱 펴고 앉아 최애 얼굴이 박힌 주문 제작 스티커를 간식에 하나하나 붙였다. 해피 빼빼로데이. 역시 이 얼굴은 작게 봐도 좋고 크게 봐도 좋다❤
7r끔 눈물oI 찔끔 날 때도 있z1만, 다 내가 선택한 아픔이다.
쉽게 뗄 수 있는 스티커를 주문했으면 좋았겠지만, 걔는 쪼꼼 더 비쌌다. 부쩍 건조해진 날씨 탓인지 스티커를 뗄 때마다 유난히 손톱 밑을 파고드는 종이에 찔렸다. 아리고 아팠다. 하지만 여러분의 소중한 모금은 허투루 쓸 수 없다. 당연하다. 최애를 위해 살 수 있는 게 굿즈가 아닌 고생이더라도, 나는 오늘도 내일도 왕크게 살 거다.
최애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나길 바라는 건 홍대병 걸리지 않은 모든 덕후의 소망 아닐까.
'맛있게 드시구 우리 최애 한 번 들여다볼 거 두세 번 더 봐주세요.'라는 사심을 고칼로리로 포장했다. 하나둘씩 찾아온 스탭들의 엄지가 올라가는 만큼 내 입꼬리도 올라갔다. 딱 그만큼만 최애의 어깨가 올라가면 오늘은 완전 성공이다. 이런 속 시꺼먼 마음 모르는 스탭들이 밝은 미소로 반겨줄 때는 좀 많이 쑥스러워서 응원 한마디 제대로 못 건넸다.
서폿 인증샷에 최애 이름 태그해서 피드 올려주신 분들 너무너무 감사해요! 맛있게 드시고 감기 조심하시길 바라요. 다음 작품에서 또 만나요!
최애는 이런 거 몰라도 된다.
오늘따라 점심을 일찍 먹으러 간 팟쟌님의 결재를 기다리는 돌발성 반차의 초조함이나, 스티커 제작 비용을 아끼기 위한 손톱 밑의 따끔한 망설임은 최애와 어울리지 않는다. 좋은 일만 알고 또 보고, 좋은 말만 듣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다. 최애에게 남은 세상 풍파가 있다면 내가 어디 한번 막아볼 테다.
이것도 몰라도 된다.
내가 여기에 가져온 건 아주 오래전부터 모아 온 매일의 조각이다. '이야, 우와! 헐 대박.' 이런 날것 그대로의 감탄사가 대부분인 덕후의 맘을 사람 말로 서툴게 다듬어 데려오느라 한참 걸렸다. 올해가 벌써 이만큼인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이야기의 첫 장을 이제야 겨우 채웠다.
그리고 이건 나도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공홈/팬클럽/팬카페 가입 일자보다는 확실히 먼저다. 최애 입덕 모먼트를 알지 못하는 덕후가 몇이나 될까? 나는 그런 고약한 덕후이지만, 최애는 그 덕후에게 무언가를 끝내 이루어 낼 힘도 되어주었고, 결국 이루지 못한 것도 다독여 주는 쉼이 되어주었다.
나의 가장 큰 용기와 위로가 되어주는 나의 별⭐
별 볼 일 없는 내 회색빛 세상이 최애라는 별로 반짝였다. 이보다 더 찬란할 필요가 있을까? 충분하다. 나는 이거면 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그러하듯, 내일의 나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건 별보다 빛나는 최애의 그 눈이다.✨
p.s. 생일 많이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