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보다 먼, 이 세상 보다는 더 먼
서기 2154년 지구는 버려졌다. 지구와 함께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도 곤궁, 질병, 범죄와 함께 버려졌다.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환경을 고려치 않은 인류의 터전인 지구는 상위 1% 계급에게 버림을 받았다. 상위 1%인 코디네이터스 계급들은 그들의 자본과 권력으로 지구 대기권 밖에 엘리시움이라는 이상향에 가까운 곳에 정착지를 설계했다. 지구에 버려진 하층민들은 오직 질병과 궁핍이 없는 엘리시움으로 가는 티켓을 열망하며 하루 하루를 버틸 뿐이다. 온갖 전과로 보호관찰을 받던 맥스(맷 데이먼)도 엘리시움으로 가야 할 이유가 갑자기 생기게 되었다. 엘리시움 상위층들의 생활편의를 위한 드로이드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던 중,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되어 오직 5일 만의 삶을 보장받았을 뿐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엘리시움 각 가정마다 있는 첨단 의료기기로 치료를 받는 것뿐. 그는 다른 계급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엘리시움으로 들어 가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을까?
(2013 작성된 글입니다.)
1.
영화를 정말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물론 극장이 아닌 Video On Demand를 이용하여 그야 말로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On demand’로 지나간 작품들을 훑어 보기는 하였지만, 의도하지 않게 심야에 허락된 잉여의 시간에 무작정 상영관으로 향했답니다. 좀처럼 결정하기 힘들 만큼 세상에 회자되는 영화들 중에 하나를 고르기란 무척 어려웠습니다. 이런 저런 짧은 고민 끝에 선택한 영화는 ‘엘리시움’이었습니다. 이유는 딱 두 가지 영화의 ‘엘리시움’이라는 제목과 ‘디스트릭트 9’을 만든 닐 블롬캠프의 영화라는 점이었습니다.
엘리시움(Elysium), 엘리시온(Elysion) 또는 엘리시온 평야(그리스어: Ἠλύσιον πεδίον, Ēlýsion pedíon, 엘리시온 페디온, Elysian Fields)는 고대 그리스 특정 종교, 분파에서 정의한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엘리시움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 초인적인 영웅들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신에 의해 선택이 된 사람들, 바르게 산 사람들, 영웅적인 행위를 한 사람들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고, 이들의 엘리시움에서의 생활은 축복되고 행복한 삶의 중단 없는 영속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시움’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천국’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삶의 마지막 모습, 그것도 그 종교적 관점에서 ‘잘 살아 온 사람’들의 마지막 정착지가 바로 ‘엘리시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 ‘엘리시움’은 기독교적 구원의 의미가 깊게 내포된 영화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2.
영화가 소개된 여러 매체를 통해서 영화 ‘엘리시움’은 마치 계급투쟁에 대한 정치적 이야기로 가득한 작품처럼 소개가 되었습니다. 저도 마음 한 켠에는 그러한 메시지에 공감도 하고 때론 비판도 하기를 기대하면서 영화관에 앉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닐 블롬캠프 감독의 전작이었던 ‘디스트릭트 9’의 깊은 잔영의 결과일 수도 있고, 상영관에서 세게 붙어 버린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의 묘한 대치적 포지셔닝일 수도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게 된 직후는 그러한 ‘정치적’ ‘계급적’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여운을 남기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엘리시움’이라는 단어가 던져 주는 사전적인 의미와 함께 그 안에 펼쳐진 스토리텔링이 기독교적 복음주의, 구원주의와 직관적으로 연결시키기 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에서 황폐한 지구에 남겨진 하층민과 이상향으로 설계된 공간에서 행복을 영위하는 최상층과의 직접적인 계급적 갈등과 충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구에 남겨진 그들은 엘리시움의 삶을 동경할 뿐이고, 병과 가난에 힘든 몸을 언젠가 저 엘리시움에 들어가 깨끗이 치유하고 싶을 뿐입니다. 마치 이 세상에 황량한 일상이 믿음의 보답으로 곧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학수 고대하는 에반겔리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시움으로의 무모한 여정을 계획하는 주인공 ‘맥스’의 모습도 그러했습니다. 미미하다 못해 가장 하류의 인생이라 할 수 있는 고아출신 전과자의 삶이 모든 사람의 불평등과 차별을 없애 주는 ‘구원자’의 역할로 변모하게 됩니다. 뜻하지 않은 수난을 겪고 결국 그는 개인적인 작은 욕구에서 주변의 사람들과 가난한 모두를 위한 ‘희생’을 선택하게 됩니다. 물리적인 능력을 배가하기 위해 몸에 장착하게 되는 원격제어복도, 그의 생살을 찢고 뼈를 갈고 신경을 뚫어 장착하는 모습에서 십자가 고행의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오버랩되던 맥스의 어린 날에 보살펴 주시던 수녀님의 말씀은 마치 일종의 계시적 예언처럼 들리곤 했습니다.
맥스야 너는 특별한 존재란다. 이 세상에 모두를 위해 큰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지.
3.
많은 사람들이 같이 상영하고 있는 영화 ‘설국열차’와 ‘엘리시움’을 같은 관점에서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곤 합니다. 두 영화다 ‘계급’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 ‘계급’을 넘나드는 것은 거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만큼 완고하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또한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계급과 공생할 생각은 없고 오히려 아예 인지하지 않고 있거나, 인지하려 하더라도 완전히 격리된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영화의 결말은 다소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듯합니다. 한 영화는 치열한 의지가 있지만 회의적이며, 나머지 한 영화는 다소 허황되지만 희망적입니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 특히 차이점이라는 것에 조금 깊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일들은 다르지 않을지언데,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들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 인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 못해 그런 시끄러움으로 오히려 옆에서 이야기하는 실제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힘들어졌습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있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정치적 결정인 선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면서 그 과정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사실과 비껴가는 의제의 설정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의 자리에서 합당해 보이는 일들이고 정당한 목소리라 여기어집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위치와 입장을 말하는 것은 그저 자기의 위치에서 바라본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4.
‘엘리시움’은 분명 좋은 세상입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부도덕하거나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할 근거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버려진 황폐한 지구에서 바라본 그들은 자신들을 황폐한 이 곳에 밀어 넣은 ‘처단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한 이야기로 지구에 남겨진 이들은 저 엘리시움에서의 생활을 영위하기를 원하는 것이 먼저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사후에 이어지는 이상향이라도 말입니다. 그러한 이상향이 존재하고 그 안에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부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누리는 생활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영위하는 생활의 편의에 버려진 지구의 하층민의 노동과 삶의 착취에서 가능하다는 것은 인지 못하는 것, 알더라도 큰 일이라 생각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허망한 천국의 모습, 누군가 초인적인 인류의 영웅이 나타나 부조리한 불평등의 세상을 엎어 버리고 모든 체제를 리부팅할 수 있다는 치기 어린 슈퍼맨 놀이……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생각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범(非凡)함’에 대한 동경은 원초적인 것입니다. 야생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이 개입되기 이전의 본능적인 것입니다. ‘비범’하다는 단어의 뜻은 사전적인 의미로 ‘보통 수준 보다 훨씬 뛰어나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말로 ‘평범’이라는 말이 배치되기도 합니다. ‘비범’함과 가까운 말은, 그 문장의 의미적 해석에 따라 달라 지겠지만, ‘비상’함, ‘특이’함, ‘불범’, ‘이륜’이라는 보다 좁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비범’함이라는 것은 평균적인 기대 이상의 성과나 능력을 나타내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비범함의 기준이 될 평균적인 기대라는 것은 절대적이고 합리적인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범’이라는 단어에 대한 단편적 고찰은 자칫 이 사회와 인류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어 위험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혹 이 ‘비범’함을 ‘우수’, ‘양질’, ‘절대적 선’, ‘정답’, ‘이상’과 혼동되어 사용하는 해석의 오류는 사고와 행동의 왜곡을 불러 올 수 있을 만큼 위태로운 선택인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이상적인 곳은 바로 여기이고, 그 세상을 만들 영웅은 바로 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파편이 모여 세상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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