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해?...... 내일!
중년의 여인 마르게리타는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영화마다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 내어, 남들이 보기에 '일관성'있는 작가정신을 표현하는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에도 그 연장선상에서 노사분규와 노동자와 사용자의 갈등을 담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있다. 늘 그러할 수도 있지만 특히 이번 영화제작은 만족보다는 항상 불만으로 가득한 작업이 되고 있다. 카메라 감독의 자의적인 클로즈업부터 조감독의 엑스트라 섭외, 하다 못해 분장팀의 짙은 분장마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거기에 더해 미국에서 초빙한 배우 배리는 농담만 일삼고 엉뚱한 말들로 신경을 거슬린다. 기본적인 연기 프레임을 벗어나고 연신 까먹거나 발음을 틀리는 이탈리아어는 정말 욕지거리가 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엉망진창의 삶은 영화 밖에서는 더하다. 남편과 이혼하여 딸과 떨어져 산지도 오래되었고, 최근 함께하던 영화 출연 배우 남자친구와는 결별을 하였다. 이유모를 욕실 물의 범람으로 집은 물바다가 되고 딸은 집중하라는 라틴어 공부 대신에 스쿠터 운전면허 타령이다. 점점 헝클어지는 일상은 어쩌면 마르게리타의 가장 아픈 현실을 덮어 버리는 위장일 수도 있다. 왜냐 하면 그녀의 어머니가 아프다. 아니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이탈리아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름 영화보기의 멘토 같은 분의 추천으로 찾아 본 영화였습니다. 물론 상영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영화관람료 보다 비싼 VoD를 구매하여 홀로 방에서 찬찬히 보았습니다. 오랜만의 이국적인 영화라 좋았고, 무엇보다 지난 시절 문학과 영화에 대한 주요 관점인 '일상과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 좋았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그런 영화를 혼자 보게 되어 좋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은 부모의 임종을 겪었거나 앞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달 말에 저도 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마르게리타가 어머니의 죽음과 임종을 맞이 하는 장면에서의 감성이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소재로 곁든 영화들이 그러하듯 이 영화도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목도하면서 삶을 돌아봅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나 그 죽음을 함께 지키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제 오늘 어떻게 지냈니?"
병원에 찾아 온 딸에게 가장 먼저 병상에서 꺼내 든 안부입니다. 그리고는 딸이 지낸 어제 오늘의 일들을 귀여겨 듣습니다. 그렇고 그런 촬영 현장에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새겨 듣고 때로는 추임새 넣어 동조하고 공감해 줍니다. 어머니는 아마도 딸에게 중요한 일이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하루하루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어머니와의 대화를 하고 마르게리타는 꿈을 꿉니다. 자신의 영화를 보러 줄을 골목 골목 둘러선 그런 곳에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이 틈틈이 줄을 서있습니다. 어머니도 보이고 따뜻하고 헌신적인 오빠도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남자친구도 보입니다. 오빠가 줄 선 틈에서 나와 그녀에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 말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 어때? 전부 내려놓고 마음 가는 대로 해봐."
마르게리타 주변 사람은 요즘 그녀의 눈에 모두 성에 차지 않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로 보입니다. 자꾸 버벅거리고 농담이나 일삼는 미국 배우 배리는 정말 최악이라 생각이 듭니다. 결론 나지 않을 모호한 말로 상태를 설명하는 병원의 의사도 정말 짜증이 납니다. 어머니 병원 간호사 프렌치스카에게 어머니 상태에 대해 묻자 그녀는 아들 가출 문제에 대한 상담을 합니다. 정말 자신 혼자 빼 놓고 세상에 올바른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그때 어머니의 죽음이 다가 옵니다. 심장이 문제인지 폐가 문제인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는 의사에 대한 짜증에 오빠 지오반니는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야. 엄마는 죽어 가고 있어."
누군가의 죽음은 그 망자의 삶을 정리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마르게리타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주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 제작 중반 기자회견 도중에 자신의 영화 세계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자신도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는 무엇을 억지 믿음으로 밀고 나간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일관성'으로 포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순간 혼자 말로 '엄마 도와 주세요.'하며 자신의 자각으로 인한 발가 벗겨진 이 당혹감을 이겨 보려 합니다. 어쩌면 미국 배우 배리의 일성처럼 자신의 영화는 '현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배리의 이탈리아어와 배우들의 연기, 카메라 감독의 촬영이 후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본과 디렉팅이 후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자각의 순간이 온 후부터 타인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배리가 집에 초대되어 오빠와 함께 저녁을 먹던 밤에 배리는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기억장애가 있어서 스태프들이나 배우들 사진을 찍어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며 뒷면에 메모와 대사가 적힌 사진들을 보여 줍니다. 그때 오빠 지오반니가 마르게리타 사진 뒤에 자신이 잊을 수 없는 메모를 해 주겠다며 글을 적습니다.
'이 감독과 절대 다시 계약하지 말 것. 평생 혼자만 옳은 사람이다.'
지난밤 허한 마음에 옛 애인을 불러낸 그 사람의 짜증 섞인 진언도 비슷하였습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분위기는 알겠지만 그녀에게 옛 애인은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살아 온 것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떠납니다. 그리고 나중에 오빠와의 대화에서 그 이야기를 하자, 오빠도 처음에는 동생 편을 드는 척 하더니 본인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합니다. 마르게리타는 지금 껏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하자, 오빠는 이미 예전에 이야기했지만 그때에는 못 알아 들었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영화감독을 직업으로 하는 마르게리타에게 영화제 작은 일상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영화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일상을 사는 삶의 태도와 맞닿아 있을 것입니다. 자신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를 그녀는 배우들에게 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말은 그녀에게 삶을 사는 일상의 태도에 대해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정해진 생각의 틀에 가두어진 삶이 아니라 자신을 솔직히 바라보는 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현장 배우에게 필요한 말이 아니라 정작 실제 일상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주문이었을 것입니다.
"대본을 맹신하지 마. 캐릭터 바로 옆에 배우가 있어야 돼."
마르게리타는 어머니의 죽음 후 찾아 온 어머니 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머니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항상 말을 경청해 주시고 스스로 중요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만든 사람이며, 인생을 가르쳐 준 엄마 같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죽음으로 상실의 고통과 아쉬움도 주고 갔지만, 앞으로 살아갈 딸에게 지금의 자신을 돌아볼 순간을 선물하였습니다. 죽음이란 떠나가는 사람보다는 남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 이러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달 아버지 임종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십 수년을 환자로 장애로 살아 가셨고, 그러한 본인의 고통보다 부담 지을 아들이 안쓰러웠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20여 년 지속된 삶의 무게로 아버지와 아름다운 추억은 유년기가 전부이고 제대로 기억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작년 봄 쓰러지신 가벼운 몸을 엎어 들고 틈틈이 간병하던 시간을 감사함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절대 안 울 것이라 생각했던 임종의 순간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애처로운 그분의 인생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분으로 인해 전개되었던 제 삶이 가엽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듯 가까운 가족의 죽음은 떠나간 사람에 대한 아쉬움과 부재의 고통도 있지만, 살아 남은 사람의 많은 생각들이 오가기 때문에 힘든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죽음의 순간을 지키고 장례를 하면서 살아 남은 아들의 가슴 한켠 멍우리가 많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마르게리타의 물음에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대답처럼, 아마 제 아버지도 제게 복잡하지 않은 답을 주고 가신 것 같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답 때문에 영화 끝 앤딩 크레딧 내내 먹먹히 울먹였던 것 같습니다. 그분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엄마, 무슨 생각해?"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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