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읽고 짓기]잘 못 알려진 야누스의 두 얼굴

신화로 읽는 일상다반사(1)

by 박 스테파노
영국의 철학자 쿠퍼(Anthony Ashley Cooper) 탓이 컸습니다. 감정과 욕망, 이성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했던 그는 『인간, 매너, 의견, 시간의 특성에 관하여(Characteristics of Men, Manners, Opinion and Times)』에서 “한쪽 얼굴로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다른 쪽 얼굴로는 노여움과 분노를 표하는 작가들의 이 ‘야누스 얼굴’만큼 우스꽝스러운 것은 없다.”라고 썼는데,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이었습니다.

-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김헌 -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는 비유적 표현은 오해 덩어리다. 인간의 '이중성'을 강조하기 위해 철학자 쿠퍼의 곡해를 빌어 온 까닭이다. <마징가 Z>의 빌런 아수라 백작의 이미지를 떠 올리거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중인격을 호출하기에 충분한 비유였다. 책을 든 사람은 많아도 진정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물다는 세태 비평은 오늘만의 푸념이 아닌 듯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진짜 읽어 낸 사람들의 기억마저 유년기의 아동 문고에 그치는 수준이 많기 때문이다.


야누스 조각상 (사진=바티칸 미술관)


라틴어 '야누아'는 '문'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 단어의 기원은 그리스 고대 신화의 '야누스'에서 비롯되었다. <변신이야기>의 오비디우스는 태초의 카오스 개념으로 야누스를 이야기하였다. 누구는 완전한 '없음'의 상태라 하고 어떤 이는 만물이 뒤엉킨 '무질서'의 상태라 일컫는 카오스의 존재에서 세상은 태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안과 밖을 구분해 주는 야누스의 등장으로 태고의 무존의 카오스에서 태초가 되는 코스모스의 탄생이 가능하게 된다.


야누스는 이처럼 긍정적 의미의 존재다. 그 생김새도 쿠퍼의 비유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 그리스 신화의 표현이다. 야누스의 얼굴은 뒤통수에 또 다른 얼굴이 달려 앞과 뒤를 함께 응시할 수 있는 모양을 지녔다. 뒤통수의 얼굴은 지나온 시간, 즉 과거를 바라보고, 앞통수의 얼굴은 다가올 시간, 미래를 조망하는 능력을 지녔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 미래를 조망하라는 인간사의 숙명이자 통찰을 의미하는 것이 '야누스의 두 얼굴'이다.


간은 긴 유랑의 생활을 청산하고 정주의 삶을 선택했다. 이를 '농업혁명'이라는 말로 인간 우월을 드러내곤 하는데, 사실 생물학이나 생태학적으로 엄청난 불합리의 결정이었다. 정주하며 수확농으로서의 생활은 평생 노동이라는 천형을 부여했고, 영양소 측면의 편식을 피할 수 없어 각종 질병과 궁핍에 시달리는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결손은 인간이 정주하면서 보수적이고 이기적인 유전자를 공고히 한 점이다. 울타리를 치고 담과 지붕을 올려 나의 영역의 배타성을 확고히 하면서 모든 갈등의 씨앗이 발화되었다.


이러한 인간사에서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는 인류의 발명품인 문은 제법 중요한 철학적 유의미를 남긴다. 배타적 이기심에서의 작은 틈을 만들어 숨통을 틔게 하였다. 세상과의 소통, 세상의 다양한 생각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벽의 일부를 뚫어내고 드나들 문을 만들었다. 누스는 전쟁에서 로마를 지켜준 신으로도 추앙받아 1월을 '야누스의 달'인 January(Janus+ary)로 부르게 되었다. 새해의 문을 여는 달이 문의 신인 야누스의 달이 된 셈이다.


루벤스 <Temple of Janus>, (Museum: State Hermitage, St. Petersburg.)


고립의 이기심에서 개방의 이해심으로 변모할 수 있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문의 탄생이 이 야누스의 신화에서 비롯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신화의 이야기다. 야누스의 아내는 카르나라는 '경첩'의 의미를 가진 '수호의 여신'이다. 악귀가 집에 침입하지 못하게 해 아이들을 지켜 낸다고 로마인들은 믿었다. 이 둘 사이 태어난 티베리우스는 로마를 지켜내는 강의 신이 되었다.


야누스의 두 얼굴은 과거를 통한 회심의 마음으로 미래를 조망하라는 깨우침을 준다. 편견으로 야누스의 두 얼굴을 속 다르고 겉 다른 이중인격으로 표현 삼았던 날들이 쑥스러워졌다. 이 처럼 신화라는 것은 일종의 믿음의 체계인데 태생부터가 가짜고 거짓이에 그 변용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긍정적 요소가 부정적 주술로 둔갑하기 십상이고 사실이 망상으로 덮어 씌워지는 일도 일쑤다.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가 2017년 서울 정동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자신의 새 책 <호모데우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허구 덕분에 인류는 집단적 상상이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인간은 대규모 협력과 협업이 가능해졌고 그 결과가 문명의 탄생이고 인류 역사의 형성이 되었다. 유발 하라리는 '이야기하는 사피엔스'가 인간의 역사를 생물학에서 독립시켰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의 근원에 신화가 있다. 신화를 다시 읽어가며 세상을 새롭게 읽는 나를 마주하고자 한다.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인간은 권력을 취하는 데엔 아주 능하지만 그 권력을 행복으로 치환하는 일에는 그리 능하지 않다. 이야기의 힘이 권력과 재화를 다시 행복으로 만들어 줄 날을 꿈꾸어 본다.


keyword
이전 14화[읽기] 노인은 그저 돌봄의 대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