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묵상 06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루카 9,28ㄴ-36
변모(變貌)는 충격적인 일이며 놀라운 신비의 경험이다. 반면 그 변모는 믿음보단 의구심을, 확정보단 모호함이라는 숙제도 던져 준다. 강한 믿음의 순간이 되어야 할 가장 극적인 시간이 한 발 물러선 주춤의 시간이 된다. 이 변모의 시간에 그리스 철학의 에포케(epoché)를 떠올린다.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자들이 말했다는 '에포케'는 '잠시 멈춤'이라는 뜻이다. 논쟁이 거듭될 때 이쪽의 말을 들으면 이쪽이 맞는 것 같고, 저쪽의 변을 들으면 저쪽이 타당하다 느껴질 때가 있다. 황희 정승의 시시비비가 생각나고 이어령 비어령도 떠오르는 순간이 삶에 비일비재하다. 20세기 와서 에드문트 후설이 주장한 현상학적 에포케도 이와 마찬가지다. 노에마(나에 의해 파악된 본질)는 노에시스(나의 주관)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런 판단의 시점에는 '판단의 보류'라는 에포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다시 변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변모란 탈바꿈이자 생장의 신비다. 꿈틀 대며 땅을 기어가던 애벌레는 더 흉측한 번데기를 거쳐 모든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나비로 탈피한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사진기자는 안경을 벗어 버리고 쫄쫄이 팬티와 망토를 두르고선 지구를 지키는 영웅으로 탈바꿈한다. 초록색 피부의 뚱뚱하고 볼품없는 존재는 한순간 아름다운 공주로 거듭나기도 한다. 십 수년 전 막장 드라마의 전설이 된 작품의 여주인공은 점 하나 찍고선 타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처럼 변모의 양태는 여러 가지이지만 공통적으로 파장은 생각보다 큰 충격을 준다는 데에 있다. 그중 가장 큰 변화의 충격은 탄생과 죽음이 아닐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수제자들과 산중 기도 중에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인다. 이 말씀 끝에 항상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십자가 위에서 변모를 대중들에게 보이셨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지 않았을까? 그의 능력과 영광스러운 모습을 왜 숨기고 있었을까?"
평안만이 가득한 일상에서 깨닫기 힘들었던, 예수의 변모 복음은 심란하고 다소 힘든 요즘의 하루하루에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예수의 변모는 그리스도 이전의 예수와 예수 이후의 그리스도를 분기해 주는 중대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세상에 거창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최 측근인 제자들 중 오른팔, 왼 팔 격인 베드로, 요한, 야고버만 데리고 산에 오른다. 자신의 거룩한 변모를 가까운 이들의 깨달음만으로 채운다.
변모는 어제의 나를 벗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수련의 결과다. 온갖 욕심과 의구를 누르고 다듬는 고된 무두질의 결과로 만들어진 새로운 가죽을 입는 시간이다. 누가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새롭게 구분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겸손함으로 채워져야 분명하다.
예수는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의 모습으로 함께 하는 모습, 가장 사람다운 모습이 대지와 같은 겸손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으로도 세상의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어 가길 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율법학자들이나 위정자들의 거창한 지식의 해석이 필요 없이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 깨달음을 얻을 때, 사람은 비로소 변화하기 시작하니까. 잠시 멈추어 있는 그대로를 보고 알맹이를 들여다보는 지적 겸손이 무엇보다 변화의 시간에는 중요하다.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에 쉽게 판단 내리는 요즘이다. 아주 알량한 지식의 증명서를 명함으로, 배지로, 간판으로, 프로필로 삼아 황희 정승, 솔로몬 흉내를 내는 자들이 가득한 곳이 온라인이고 미디어의 세상이다. 그런 사람들은 타인의 복잡한 진실을 들여다볼 성의도 능력도 없이 그저 자신의 얕은 노에시스(나의 주관)로 어설픈 노에마(나에 의해 파악된 진실)를 만들어 단순하게 판단 내리는 세상이다. '타인들은 틀렸어, 왜냐면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정념이 아닐까. 이럴 때일수록 잠시 멈추어 판단을 잠시 보류할 용기가 필요하다. 정지(stop) 버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춤(pause)의 버튼이 달려 있는 것은 단지 미디어 플레이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된다.
어제의 나를 벗고 내일의 나를 맞이하는
매일매일의 소소한 변모를 기도한다.
ㆍ그림 제목 :예수의 거룩한 변모 (1520)
ㆍ작가 라페엘로 산치오 (Raphaelo Sanzio : 1485- 1520)
ㆍ크기 : 페널화: 405X 278cm
ㆍ소재지 : 바티칸 피나코테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