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 리뷰
기표의 과잉과 기의의 흉터, 그 위태로운 약속
영화라는 예술은 언어와 유사한 지점을 갖는다. 하나의 대상이나 개념을 지시하는 소리나 형태, 즉 '기표'(signifier)가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나 개념, 즉 '기의'(signified)와 만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소통과 이해가 가능해진다. 좀 더 풀이하자면 표현되는 양식과 스타일, 기능소가 결국 주제 의식, 의미소에 대한 포섭과 섬김의 작용을 해야만 그 형식의 미학을 완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기호적 상징 해석이 아니더라도 풍, 조, 류가 대변하는 스타일의 양식은 그저 멋으로만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화면에 담긴 이미지, 인물의 대사, 배경 음악, 효과음 등 수많은 시청각적 기표들이 서사라는 기의와 만나 결합하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만남이 언제나 순탄한 것은 아니다. 때로 기표들은 서사라는 기의의 든든한 토대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공중에서 부유하며, 그 자체의 감각적 자극만을 극대화하는 데 몰두하기도 한다.
김봉한 감독의 <하얼빈>의 초반부는 바로 이러한 위태로운 순간을 여실히 보여준다. 눈앞에 펼쳐지는 전투 장면은 압도적인 시각적, 청각적 기표들로 가득하지만, 그 화려함은 정작 그 기표들이 지시해야 할 서사적 의미,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내면과 결단이라는 기의에 가닿지 못한다. <하얼빈>의 실패는 이 첫 전투신에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영화 미학의 틈새가 보이는 초반부의 '스타일과 서사의 불화'를 기표와 기의의 어긋남이라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미장센과 몽타주가 내러티브의 심장 박동과 어긋날 때 영화가 겪게 되는 깊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감각주의의 허망한 파장: 기표의 자율과 의미의 부재 사이
영화적 기표는 오감을 향해 돌진한다. 화면의 색감, 조명의 질감, 카메라의 속도 변화(슬로모션, 정지 화면 등), 음향의 미세한 디테일 등은 관객의 감각을 즉각적으로 깨우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하얼빈>의 초반부 전투 장면은 이러한 감각적 기표들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폭발음과 총성, 쓰러지는 병사들의 비명,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들이 슬로모션과 강렬한 명암 대비 속에서 재현된다. 이 순간, 기표들은 마치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서사적 역할에서 벗어나, 그 자체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려하고 강렬하며, 그 자체로 완결된 이미지의 파편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의 과잉, 즉 센세이셔널리즘은 종종 내러티브를 침식한다. 펠릭스 가타리가 지적했듯, 감각적 충격만이 반복될 때, 장면은 '감각의 보기 전시장'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하얼빈>의 초반부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락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맹목적인 찬란함, 감각적인 정보의 홍수이지만, 이 기표들이 서사를 추동하거나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기의와 제대로 연결되지 못한다. 화면은 기표들로 가득 차 숨 막힐 듯하지만, 정작 중요한 기의는 그 어디에도 부재하는 쓸쓸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관객은 압도되지만, 그 압도가 정작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미장센과 몽타주의 불협: 충돌이 낳아야 할 의미의 실종
영화적 의미는 단순히 한 화면 안에 담긴 요소들(미장센)의 조화로움뿐만 아니라, 쇼트와 쇼트가 만나고 충돌하는 방식(몽타주)을 통해서도 탄생한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강조했듯, 서로 다른 두 개의 쇼트가 부딪힐 때 관객의 의식 속에서 제3의 의미가 생성된다. 한 쇼트가 다음 쇼트로 이행될 때 발생하는 긴장과 리듬은 관객을 수동적인 관찰자에서 벗어나, 화면 위 사건의 의미를 자신의 내부에서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체로 만든다.
<하얼빈>의 초반부는 시각적 충격과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분명한 몽타주적 시도를 보인다. 슬로모션과 정지, 빠른 컷이 교차하며 감각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 충격은 서사적인 맥락 속에서 의미 있는 파장을 일으키기보다, 단지 물리적인 충격으로 흩어져 버린다. 총성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강력한 청각적 기표와 인물의 심리적 동요, 혹은 서사적 국면의 전환점이라는 기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느껴진다.
미장센은 감각적인 디테일로 화면을 채우지만, 몽타주는 그 기표들을 의미 있는 서사적 흐름으로 엮어내지 못한다. 관객은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가'는 감각적으로 인지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 사건이 인물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품을 동력을 얻지 못한다. 기표들의 충돌은 의미의 폭발 대신 공허한 메아리만을 남긴다.
바쟁과 현존성의 상실: 기의의 존재론적 거리감
앙드레 바쟁은 카메라가 현실의 복잡하고 미묘한 결을 포착하여 관객에게 전달하는 능력, 즉 '현존성(présence)'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에게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세계의 '있음'을 느끼게 하는 매체였다. 그러나 <하얼빈> 초반부의 과도하게 연출된 음영과 색감, 그리고 양식화된 움직임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그 결을 가린다. 너무나 계산되고 정제된 화면은 생생한 현실감 대신 인공적인 무드만을 강조한다.
특히 안중근 의사라는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영화에서, 그의 고뇌와 결의, 인간적인 두려움과 용기 등 그의 '현존성'을 관객에게 오롯이 전달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하얼빈>의 스타일은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감각적인 분위기 속에 가두어 관객과의 사이에 불필요한 거리를 만든다.
화려한 기표들은 인물의 내면이라는 중요한 기의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며, 안중근은 화면 속 박제된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항거가 지닌 역사적 무게와 도덕적 중력은 스타일이라는 필터에 걸러지며 희미해진다. 관객은 마치 그림을 감상하듯, 혹은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보듯 이질감을 느끼며, 역사라는 거대한 바다를 유영하지만 그 깊이를 느끼지 못하는 쓸쓸함을 경험하게 된다. 기의는 기표의 과도한 자기주장 때문에 존재론적 거리감을 얻고 만다.
형식주의와 역사 재현의 딜레마: 기표의 자율성과 기의의 윤리적 응집성
형식주의 미학은 스타일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형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 한다. 이는 영화 언어를 확장하는 중요한 시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 특히 안중근 의사라는 인물과 그의 행위가 지닌 역사적, 윤리적 무게를 다루는 작품에게 형식주의적 실험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역사 영화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의 기억과 그 사건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을 재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를 위해 서사는 기표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닌, 기의를 향한 긴밀한 응집을 통해 구축되어야 한다.
<하얼빈> 초반부의 전투 장면은 마치 '형식의 축제'처럼 보이지만, 그 축제가 끝나고 남는 것은 '이야기의 연대기'로서의 공백이다. 영화 내내 시선은 그 형식의 거죽 위에 머문다. 형식을 파고들어 의미의 심장부에 가닿을 수 없는 괴리를 만든다. 감각적인 기표들은 흩어진 파편처럼 존재하지만, 그 파편들이 모여 마침내 완성해야 할 '안중근의 암살 결단'이라는 거대한 기의의 퍼즐은 빈자리로 남는다. 우리는 화려한 전투를 보지만, 그 형식미가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그의 결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서사적, 심리적 연결 고리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표가 기의를 효과적으로 봉사하며 서사를 추동하는 다른 영화들의 성공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전투의 탄피와 흙먼지는 단순히 시각적인 기표가 아니라, 형제의 운명을 예고하는 내러티브의 씨앗이 된다. 전투의 물리적 참상은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과 파국을 시각화하는 기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관객은 감각적 충격을 통해 서사적 비극을 예감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극한의 혼돈과 폭력이라는 기표로 가득하지만, 그 처절함은 '한 인간을 구한다'는 임무의 도덕적 소명이자 서사의 강력한 동력이 되는 기의와 결합하며 깊은 울림을 준다. 전투는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생명의 존엄성과 희생의 의미를 각인시키는 윤리적 기표로 기능한다.
또한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의 검술은 단순한 액션 기표가 아니라, 복수심, 존엄성, 그리고 잃어버린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라는 강력한 내적 동기, 즉 기의를 시각화하는 도구다. 그의 칼끝 하나하나에 그의 서사가 새겨져 있으며, 관객은 그의 육체적 움직임을 통해 그의 영혼의 고통과 의지를 체감한다. 이 영화들은 전투라는 강렬한 기표를 서사라는 기의의 심장 박동과 연결시킬 때, 비로소 영화적 에너지가 어떻게 폭발하는지를 보여준다.
재조율의 가능성: 기표와 기의, 그 아름다운 화음을 향하여
<하얼빈>의 초반부에서 드러난 기표와 기의의 간극을 메우고 영화적 완성도를 높이는 길은 있었다. 기표가 기의를 향해 겸손하게 봉사하는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있다. 이는 단순히 스타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을 서사의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비슷한 시대의 사료를 엮어 만든 김지운의 <밀정>이나 최동훈의 <암살>이 이 논의에서 <하얼빈>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들은 기표의 과잉이 기의를 삼키는 대신, 기표가 서사라는 기의의 길을 밝히는 등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성취의 빛'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밀정>에서 기차 칸을 가득 채우는 긴장감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의열단의 절박한 임무와 인물의 내면 풍경에 밀착하며 의미를 생성한다. <암살>의 현란한 총성은 복잡하게 얽힌 운명과 대의라는 기의와 분리되지 않고, 그 비극적 여정을 추동하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이 영화들은 스타일이라는 기표가 서사라는 기의와 만나 어떻게 깊은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증명함으로써, <하얼빈>이 어쩌면 놓치고 말았을 '조화로운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상기시킨다.
가령, 장면 곳곳에 안중근의 시선이나 그의 내면을 반영하는 시각적, 청각적 기표들을 의도적으로 삽입했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목격하는 현실의 참혹함, 그의 눈에 비친 동료들의 얼굴,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들이 몽타주의 리듬을 타고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시선 동기화'를 시도하는 것 말이다.
감각적인 미장센의 파편들 사이에 짧은 대화나 내면 독백이라는 '내러티브 변수'를 섬세하게 삽입하여, 이 극한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더라면, 감각적 기표들이 서사적 기의와 연결되는 통로가 열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몽타주의 리듬을 단순히 감각적 충격의 반복이 아닌, 인물의 심리적 변화나 서사적 국면의 전환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재편성하여, 영화적 표현 기능소가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결단에 이르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기능하도록 '몽타주의 리듬 재조율'을 시도하였다면 어땠을까?
서사의 심장 박동, 기표의 섬김을 통해 회복될 때
스타일은 서사를 비추는 렌즈이자, 내러티브를 돋보이게 하는 기표들의 섬세한 조율기다. 그러나 렌즈가 스스로 빛을 발하려 할 때, 이야기는 오히려 그림자 속에 가려지고 만다. <하얼빈>의 전반적인 표현이 보여준, 서사에서 유리된 감각적 기표들의 과시는 어쩌면 안중근 의사라는 인물이 짊어진 역사적 무게, 그리고 그의 고뇌와 결단이라는 거대한 기의를 담아내기에는 너무 얇고 무른 그릇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영화적 완성도는 기표가 기의를 압도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표가 기의를 향해 겸손하게 봉사하고 기의의 심장 박동에 맞춰 고동칠 때 찾아온다. 그 순간, 화면의 모든 요소들은 단순한 시청각적 자극을 넘어 의미의 층위를 획득하고, 관객은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이해하는 총체적인 경험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된다.
<하얼빈>이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삶과 그의 행위가 지닌 깊은 울림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기표들의 맹목적인 유희에서 벗어나 서사라는 기의의 단단한 토대 위에 모든 시청각적 요소들을 정렬하고, 그리하여 기표와 기의가 아름다운 화음을 이룰 때 비로소 가능하다. 영화는 그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살아 숨 쉬는 한 편의 시(詩)로서 우리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
영화 <하얼빈>을 OTT를 통해 뒤늦게 접하다 보니 세평이 간섭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조정 속에서도 첫 장면부터 "이 영화 안 되겠는데"라는 이른 판단이 스며들었다. 무거운 중심을 잡은 기표들의 잔치 속에 기의들은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되어 버렸다. 영화의 사회적 미학은 영화 속의 세상과 영화 밖의 세상을 잇는 일이다. 노벨상 수상 작가 한강의 말을 빌리자면 '빛과 실'로 세상을 잇는 일이다. 그래서 영화는 장 뤽 고다르의 말처럼 '현실의 반영이 아닌, 반영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 영화 안의 서사가 프레임 밖의 세상과 소통하는 일은 화려한 스타일의 강조만으로 어렵다. 알맹이가 있을 때 껍질이 의미가 부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