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 비평적 사유
어떤 영화는 감독의 목소리를 넘어 관객 각자의 내면과 사회의 무의식 속으로 파고들어 예측 불가능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코랄리 파르지아 감독이 <서브스턴스>를 통해 여성의 신체와 노화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폭력성을 정조준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지만, 영화는 그 메시지 위에 배우의 얼굴, 익숙한 이야기의 잔상, 그리고 스크린이라는 매체가 가진 고유한 마법을 덧입히며 더욱 복합적인 질문을 던진다.
특히 자기 자신과 완벽하게 닮은 분신과의 대면이라는 핵심 설정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이 오래전부터 탐사했던 인간 실존의 심연, 즉 ‘사회적 자아의 기만성’이라는 주제와 겹쳐지며 우리가 사는 시대의 초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서브스턴스>는 단순한 바디 호러의 충격을 넘어, 스크린 안팎에서 벌어지는 다층적인 '대화'를 통해 '나'라는 주체가 얼마나 쉽게 외부의 욕망에 의해 조립되고 해체될 수 있는가를 잔혹하게 응시하는 작품이다.
깊은 거울 속에서 길어 올린 은유
『분신』의 주인공 고골랴드킨은 우연히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물을 만나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분신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고골랴드킨이 사회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억지로 꾸며낸 허위의 자아가 독립된 존재로 현현한 것에 가깝다. 사회가 요구하는 가면, 타인의 시선에 맞춰 억지로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원본인 자신을 덮쳐오는 공포를 도스토옙스키는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냈다.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 역시 사회가 강요하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한 결과, 자신의 DNA를 기반으로 완벽한 '젊은 나'인 수(마가렛 퀄리)를 창조한다. 수는 엘리자베스 내면의 발현이라기보다, 외부의 시선과 욕망, 그리고 스스로 내면화한 자기혐오가 빚어낸 '사회적 이상형'의 육체적 구현, 즉 시뮬라크르다.
수는 처음에는 엘리자베스의 통제 하에 순종하는 듯 보이나, 점차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원본인 엘리자베스의 자리를 위협하고 생명력을 착취한다. 이는 사회가 만들어낸 가짜 자아가 결국 진짜 자아를 파괴하는 도스토옙스키적 비극의 현대판 버전이다. 몸의 분열은 곧 자아의 기만적 구조를 폭로하는 서늘한 은유가 된다.
몸짓과 색채가 나누는 대화: 바흐찐의 시선으로
바흐찐은 텍스트란 결코 단일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다양한 계층, 문화, 관점의 언어들이 충돌하고 뒤섞이는 '언어의 이질적 혼합(heteroglossia)' 속에서 의미를 생성한다고 보았다. <서브스턴스>에서 엘리자베스와 수는 단순한 복제 관계를 넘어, 서로 다른 시간성, 다른 사회적 역할, 다른 내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복수의 자아로 기능한다. 엘리자베스가 과거의 영광과 노화의 불안이라는 목소리를 낸다면, 수는 현재 사회가 열광하는 젊음과 성적 매력이라는 강력한 목소리를 낸다. 이 두 목소리의 충돌과 흡수는 바흐찐이 말한 '대화주의(dialogism)'의 역동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관계는 대사뿐 아니라 몸짓, 표정, 그리고 그들이 입는 의상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두 인물이 공유하는 노란 코트는 이 '이질적 혼합'과 '대화'의 상징적인 매개체다. 노란색은 생명력과 활력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광기, 질투, 위선 등 불안정한 감정도 담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노란 코트를 입을 때 그것은 사라져 가는 젊음과 화려함에 대한 집착의 색이지만, 수가 입을 때 그것은 통제 불가능한 욕망과 관능의 폭주를 상징한다. 같은 옷, 같은 색이 입는 주체에 따라 상반된 의미를 띤다.
코트는 단순한 외피가 아니라 두 자아가 서로 침범하고 정체성을 교환하며 '누가 나인가'라는 질문을 무력화시키는 대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바흐찐의 크로노토프(chronotope) 개념처럼, 특정 오브제와 색채의 반복과 변주는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과 주체성의 불안정한 상태를 시공간적으로 시각화한다.
스크린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배우라는 텍스트
영화의 의미는 스크린 안의 서사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배우의 캐스팅은 관객이 이미 가진 '스타 페르소나(star persona)'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영화 안으로 불러들인다. 리처드 다이어의 스타 이론이나 제라르 지네의 파라텍스트 개념에 따르면, 배우의 이전 작품, 대중에게 알려진 사생활, 언론 이미지는 영화 본편 텍스트를 에워싸는 주변부 텍스트로서 관객의 영화 해석에 깊이 관여한다. 영화의 인트로와 엔딩에 쓰인 수미상관적인 부감 샷에서 부각하는 엘리자벳 스파클의 스타 명판은 그 텍스트에 밑줄을 긋는 효과를 준다.
데미 무어의 캐스팅은 <서브스턴스>에 강력한 상호텍스트적 울림을 더한다. 80-90년대를 풍미한 섹시 심벌이었던 그녀의 과거 이미지, 끊이지 않았던 성형 루머, 젊은 파트너들과의 염문설 등 대중에게 각인된 그녀의 스타 페르소나는 엘리자베스 스파클이라는 캐릭터에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관객은 데미 무어라는 배우를 통해 '여성의 몸과 외모에 대한 사회의 가혹한 시선',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병적인 집착', 그리고 '대중의 시선 속에 살아가야 하는 여성 스타의 비극'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엘리자베스의 고통은 스크린 속 허구가 아니라, 데미 무어라는 현실의 인물을 통해 이미 익숙해진 사회적 압력의 드라마로 확장한다.
데니스 퀘이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너스페이스> 등에서 보여준 유쾌하고 활기찬 젊은 남성의 이미지는 <서브스턴스> 속 권위적이고 퇴행적인 그의 캐릭터와 충돌하며 인간의 변화와 사회적 역할극 속에서 굳어진 자아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배우의 캐스팅은 이렇게 스크린 밖의 기억과 사회적 텍스트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 다층적인 '텍스트 간 대화'를 창출한다.
노란 코트, 욕망을 입은 외피
색채와 의상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강화하는 강력한 기호다. <서브스턴스>에서 엘리자베스와 수가 공유하는 노란 코트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두 자아의 관계, 욕망, 그리고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상징하는 핵심 오브제다. 노란색은 생명력, 태양, 밝음을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광기, 질투, 병약함 등 양가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코트라는 외피는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역할이나 이미지, 즉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의 껍질'을 상징한다.
엘리자베스가 노란 코트를 입을 때는 과거의 화려함과 현재의 불안 속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사회적 자아'의 외피를 두른 모습이다. 하지만 수가 노란 코트를 입고 나타나는 순간, 그 코트는 순식간에 제어 불가능한 젊음과 관능, 그리고 '원본을 대체하려는 욕망'의 색으로 변모한다. 같은 코트가 두 인물 사이를 오가며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제인지, 누가 누구의 욕망을 입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노란 코트는 두 자아가 서로를 침범하고 정체성을 교환하는 '자아 교환 장치'처럼 기능하며, 시각적으로 정체성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 된다. 이 색채와 아이템의 반복과 변주는 바흐찐의 크로노토프처럼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주체성 투쟁을 생생하게 시각화한다.
나는 누구의 매트릭스인가
영화 초반,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 약물을 주입하며 듣는 "You are the matrix. Everything comes from you. Everything is you."라는 대사는 이 영화의 가장 깊은 철학적 질문을 함축한다. '매트릭스'는 라틴어로 자궁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기질, 원형, 근원, 모체라는 의미도 갖는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생물학적 근원(자궁, matrix)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출산'하지만, 이 출산은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자아'를 만들기 위한 선택이다. 그녀는 스스로 생성의 근원(matrix)이 되지만, 동시에 그 매트릭스 안에서 생성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 대사는 영화 속 엘리자베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속한 사회, 문화, 관계의 '매트릭스' 안에서 자아를 형성해 나간다. 타인의 시선, 사회적 기대치, 미디어의 이미지, 그리고 스스로 내면화한 욕망과 불안이 뒤섞여 '나'라는 매트릭스를 구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매트릭스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나'를 생성하고 재구성하며 살아간다.
<서브스턴스>의 가장 잔혹한 통찰은, 이렇게 외부의 욕망과 사회적 압력에 의해 조립된 '가짜 나', 즉 수는 결국 원본인 엘리자베스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주입한 가치가 만든 이상형이 '진짜 나'의 자리를 빼앗고 존재 자체를 삼켜버리는 비극은 현대 사회의 자아 형성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스크린, 그리고 삶이라는 질문
<서브스턴스>는 단순히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비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도스토옙스키가 『분신』에서 시작하고 바흐찐이 확장했던 '사회적 자아의 기만성과 다중성'이라는 근원적인 철학적 질문을 현대적인 감각과 극단의 시각성으로 재해석한다. 엘리자베스와 수라는 두 개의 몸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대화하고 충돌하며 주체성의 유동성을 드러내고, 데미 무어라는 배우의 스타 페르소나와 노란 코트라는 시각 기호는 스크린 안팎의 텍스트들을 연결하며 이야기의 심연을 더한다.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료하다. "나는 누구의 욕망으로 만들어졌는가?" 내가 '나'라고 믿고 살아가는 이 자아는 오롯이 나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기준, 그리고 스스로 내면화한 욕망이 조립해 낸 시뮬라크르인가. 엘리자베스에게 '명심하세요. 당신(들)은 하나입니다.(Remember. You are one.)'라며 강조하는 기계적 경고처럼, 우리 모두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스템의 매트릭스이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생성되고 결국 나 자신이 된다.
그 '나'가 진정 누구인지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우리 각자가 계속해서 물어야 할 질문이다. <서브스턴스>는 이 질문을 잔혹하고도 매혹적인 이미지로 스크린 위에 새겨 넣으며,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도록 등을 떠민다. 답은 영화 바깥, 질문 앞에 홀로 선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여전히 답을 내지 못한 채 또 다른 허상과 망각을 찾아 일상을 허비하기 십상이다. 내 욕망이 내 소중한 본질을 갉아먹는 일의 반복이 인생이라는 과대망상이니까.
영화 <서브스턴스>는 여러 영화제에 노미네이트 되고 수상까지 할 정도로 평단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었다. 그럼에도 대중의 평가는 갈리는 편이다. 가장 큰 이유가 하드고어의 '바디 호러'라는 장르적 질주가 작품이 전하는 내러티브를 굴절시키는 부작용을 발생시킨다.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 <어바웃 타임> 등을 제작했던 '워킹타이틀'의 영화라는 점에서 또 한 번의 놀라움을 경험하게 한다. 2시간 20분의 러닝타임 중 20분 정도를 덜어내고 보다 은유의 공간을 관객들에게 열어 주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깊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