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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닌 함께, 비로소 완성되는 한 판의 승부

영화 <승부> 리뷰

by 박 스테파노

한때 바둑판은 작은 우주였고, 흑백의 돌들은 인간의 지략과 통찰을 겨루는 별들이었다. ‘한 수 위’니 ‘묘수’니 ‘악수’니 '꼼수'니 하는 말들과 '정석', '해법', '득실'이라는 단어는 이제 단순한 게임 용어를 넘어, 삶의 크고 작은 선택들을 비유하는 익숙한 언어가 되었다. 패배의 아픔을 곱씹는 행위를 넘어, 지난날의 오류를 반추하고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는 지혜를 담은 ‘복기’라는 단어 또한 우리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 심지어 꽉 막힌 답답한 상황을 ‘돌이 갇혔다’고 표현하거나, 판을 뒤흔드는 예상외의 수를 ‘신의 한 수’라 칭하는 것 역시, 바둑이 우리 언어와 사고방식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내렸는지를 대변한다.


그러나 디지털 화면의 현란함과 속도의 덧없음 속에, 바둑은 스크린의 구석으로, 대중의 관심 밖으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 <승부>가 묵묵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그 침묵의 싸움 속에 인간 존재의 깊은 성찰과 변치 않는 가치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흑과 백의 돌들이 놓이는 그 신중한 몸짓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숙고의 시간을 되찾아주려는 은유인지도 모른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바둑판 위의 정적인 세계를 통해 삶의 깊이를 성찰하도록 이끄는 묵직한 초대와 같은 것이다.


영화 포스터에 勝負를 넣어 보았다. 이미지=Google Sora



승부의 심연, 길 위의 사유


영화의 제목 ‘승부(勝負)’는 단순한 이김과 짐의 결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포석의 신중한 첫걸음부터, 행마의 예측 불허한 흐름, 눈에 보이지 않는 집의 크기를 헤아리는 계가의 냉철한 계산, 그리고 마침내 대국이 끝난 후 자신의 수를 되돌아보며 깨달음을 얻는 복기의 아픈 성찰까지, 바둑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깊고 긴 여정이다. 제목이 대결, 승패, 대국도 아닌 '승부'다. 승부는 선취, 접전, 득실, 기세 등 경기나 대결의 상황에 쉽게 사용하는 바둑에서 유래한 단어다.


영화의 공식적인 영어 제목은 'The Match'인데, 극 중 샤우팅 남발하는 이질적인 야구 캐스터의 돌출 연기와 더불어 영화의 유이한 결점이 이 영어 제목이 아닌가 싶다. '승부'는 단순히 승자와 패자가 가름 나는 대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 대결의 게임, 매치, 배틀 등의 단순한 겨루기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승부라는 말은 승자(勝)와 패자()의 모든 이야기를 아우른다. 좋은 바둑이란 승자 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 서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를 굳이 찾는다면 'contest'가 적당하지 않을까.


영어 단어 ‘contest’가 ‘함께(con-)’ ‘애쓰다(test)’라는 어원을 품고 있듯, 승부는 단순히 상대를 제압하는 행위를 넘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서로의 지혜와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적인 드라마를 담고 있다. 승부라는 말은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노력, 전략, 긴장감, 때로는 운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스승과 제자의 대결은 과정과 여정의 합주다. 그저 싸움과 승패의 가름이 아니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승부>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며, 스승과 제자, 라이벌이라는 숙명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비추고 성장하는 인간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승패라는 명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서로의 존재를 통해 더욱 깊은 자기 이해에 도달하는 인간적인 여정을 보여준다. 바둑판 위에서 펼쳐지는 그 미묘한 긴장감과 전략적인 수 읽기는, 단순한 게임의 규칙을 넘어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역동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침묵의 교향곡, 몽타주의 은유


스승 조훈현(이병헌)과 제자 이창호(유아인)의 첫 결승 기왕전 대국 장면은, 영화의 백미라 할 만하다. 화려하지 않은 몽타주로 교차되는 그들의 모습은, 격렬한 감정의 파도를 고요한 표정 뒤에 숨긴 채, 극한의 집중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두 천재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창호의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은 주변의 미세한 소리마저 증폭시키지만, 이내 익숙한 시계 초침 소리(이창호의 집안이 전주에서 시계상, 수리점 운영)는 불안한 긴장을 일상적인 리듬 속으로 길들인다. 이는 외부의 압박과 내면의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 오히려 익숙하고 반복적인 리듬에 의지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또한 지난 세대의 시간이 가고 새로운 시간이 드리워진다는 은유를 바둑의 초읽기를 투영해 암시한다.


이창호의 아역은 김강훈이 열연하였다. 유아인의 연기가 그의 사생활로 인해 묻혀 버린 안타까움이 크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반대로 조훈현의 깊은 장고는, 바둑판 위에 점점 길게 드리워지는 바둑돌의 그림자처럼, 시간의 무게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그의 신중한 고민은 마치 저무는 해처럼, 깊고 묵직한 사유의 시간을 암시하며, 한 수 한 수에 담긴 그의 고뇌와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소리와 빛, 시간의 흐름마저 멈춘 듯한 그들의 침묵 속에서, 승부를 향한 간절한 염원과 치밀한 수 읽기가 교차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 침묵의 몽타주는, 단순한 장면의 나열을 넘어, 두 인물의 내면 풍경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내며 승부의 깊이를 더하는 예술적인 순간이다. 마치 두 연주자가 서로의 호흡에 귀 기울이며 최고의 연주를 펼쳐내듯, 스승과 제자는 침묵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승부라는 교향곡을 완성해 나간다. 이처럼 승부라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는 승패의 가름이라기보다 서로의 시간을 겨루는 과정의 대결이다.


“바둑이란 게 참 이상해.
놓고 보면 그럴듯하지만,
막상 놓으려면 그렇게 놓기가 힘들어."


영화 속 조훈현의 바둑에 대한 짧은 통찰들은, 단순한 기술적인 조언을 넘어 삶의 본질을 꿰뚫는 묵직한 울림을 지닌다. 그의 말은 완벽하게 짜인 이론과 현실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 사이의 간극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이는 우리가 이상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하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혔을 때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는 우리네 삶의 애환을 담고 있다. 정해진 답이 없는 바둑의 세계처럼,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고독한 싸움을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정의하는 그의 말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승부는 외부의 적과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면의 불안과 유혹,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치열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다.


영화 <승부> 속 배우 이병헌이 조훈현 9단을 연기하고 있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좋은 바둑은 한 명의 천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깨달음은,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성장의 한계를 지적하며, 스승과 제자,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 배우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환기시킨다. 심지어 “원래 유리한 바둑이 이기기 더 힘들다”는 역설적인 진리는, 익숙함과 방심 속에 도사리는 위험을 경계하며 겸손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유리한 상황에 놓였을수록 더욱 신중하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며, 작은 실수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자기 경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반 집'의 의미: 돌의 침묵이 삶의 지혜를 새기다


승패라는 결과 너머, 영화는 ''이라는 미묘한 균형점을 통해 승부의 더욱 깊은 의미를 탐색한다. 덤은 바둑판 위에 불현듯 떠오르는 가상의 저울추다. 한국식 5집 반의 덤은 ‘반(半)’이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점수로 마무리되는데, 이 반집은 마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판 위에 놓인 형이상학적 조각처럼 다가온다.


첫째, 반집은 경계의 존재다. 실체 없는 절반의 집은 살아 있는 돌들의 무게를 가늠하게 하고, 승패의 경계를 간신히 넘어뜨리는 ‘경계인의 철학’을 드러낸다. 반집이 없었다면 수많은 패착과 묘착은 승부가 아닌 무승부로 귀결됐을 것이고, 그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미세한 결단의 순간’을 우리는 체험할 수 없다. 즉, 반집은 무(無)와 유(有)를 가르는 스스로의 경계 위에 서서 “여기서 결판이 난다”라고 선포한다.


둘째, 반집은 불확정·가능성의 기표다. 동수(同數)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0.5’는 고정된 사실이 아니고, 오롯이 관습과 약속 위에 쌓인 정신적 잔여물이다. 이 잔여물은 우리로 하여금 “승부란 완전한 확증이 아니라 늘 모호함 속에서 결정된다”는 성찰로 이끈다. 반집이 없으면 우리는 완벽한 승패만을 꿈꾸겠지만, 반집이 있기에 비로소 승패 너머의 불확정성까지도 게임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 반집은 시간과 기억의 왜곡 장치이기도 하다. 한 집, 두 집은 눈에 보이고 셈할 수 있지만 ‘반집’은 계산 테이블 위에서 슬며시 사라진다. 그 “절반”은 과거의 대국이 남긴 빈틈이자, 미래의 대국이 필요로 하는 여백이다. 승부가 끝나도 반집만큼은 판 위에 남아 플레이어들의 마음속에 ‘만일의 가능성’을 자리매김하며, 오래도록 무게 없이 떠도는 환영처럼 남는다. 이는 시간의 과정에 대한 승부에 무승부라는 타협 대신 다음을 기약하는 가능성을 남긴다.


1991년 국수전 도전기 5국의 사진(한국 기원 제공)을 펜화로 생성. 이미지=Google Sora



좋은 영화란, 대화를 건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이 균형추는, 승부가 단순히 힘의 논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의지와 심리적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영역임을 암시한다. 덤은 승패라는 이분법적인 결과 너머,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노력과 지혜, 그리고 때로는 운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까지 포괄하는 승부의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집'이라는 비실재적인 숫자가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사실은, 때로는 아주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삶의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완벽한 승리도, 완벽한 패배도 존재하지 않는, 그 미묘한 경계선상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세상사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영화 <승부>는 잔뜩 힘준 화려한 미장센을 찾아보기 힘들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관통하는 세밀한 시대의 모습 구현은 정성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의 이야기에 덮어 씌우는 일없이 그저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낸다. 지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영화 <하얼빈>과 극명히 대비되는 작화법이라 할 수 있다. 촬영부문이 백상예술상 최초로 대상을 수상한 <하얼빈>의 힘준 스타일은 결국 서사를 가리고 말았다. 그에 반해 <승부>의 미장센은 현란함과 멋들어짐이 아닌 여백의 뚜벅 걸음으로 관객들에게 반집의 여백을 만들어 주었다.


서로 상반된 영화 <승부>, <하얼빈>.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하이브미디어


결국 영화 <승부>는 바둑이라는 고요한 싸움을 통해, 인간의 숙명적인 경쟁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끈끈한 연대,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소중함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흑과 백의 돌들이 침묵 속에서 펼치는 그 드라마는, 화려한 볼거리 없이도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파고드는 묵직한 힘을 지닌다. 승패라는 찰나의 결과 너머, 길고 깊은 사유의 여정을 통해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한 편의 흑백 영화와 같다. 바둑판 위의 돌들처럼, 영화 속 인물들의 고뇌와 성장은 우리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기며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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