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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언어를 넘어서: 스크린이라는 이중 거울

션 베이커의 <아노라>를 읽는다는 것

by 박 스테파노

이름의 무게와 경계의 표식


이름이란 무엇인가. 불리는 자를 명명하는 기표이되, 때로는 그 사람의 기원과 운명, 혹은 세상이 그에게 부여하는 위치를 압축하는 기의다. 션 베이커의 영화 <아노라>는 한 여성의 이름에서부터 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아노라는 브루클린의 팍팍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애니’라 불리기를 택하며 “미국에서는 이름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녀에게 이름은 더 이상 자신을 규정하는 무엇이 아니라, 감추고 싶은 과거이거나 혹은 지워버리고 싶은 현재의 표식일 따름이다.


서구 문화에서 이름은 중요한 기의를 내포하는 기표다. 특히 러시아 문화권에서 이름은 개인을 넘어 가족, 역사, 심지어 어떤 덕목이나 기원을 함축하는 깊은 의미를 갖는다. 정식 이름 외에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부칭을 함께 쓰고, 애정과 친밀함을 담은 아명(극중 이반의 아명이 '바냐'다)이나 애칭이 풍부하며, 블라디미르('지배하다'+'평화', 즉 '평화를 지배하는 자')처럼 의미를 담아 조합하는 이름들도 흔하다.


이처럼 이름에 공동체의 서사와 개인의 정체성이 겹겹이 쌓이는 문화권에서 온 아노라가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며 '이름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과거와 얼마나 단절하고 싶은지, 그리고 현재의 삶이 얼마나 이름의 무게조차 지탱할 수 없는지에 대한 씁쓸한 진실을 엿본다.


영화 <아노라>는 아노라의 서사이자 환상이다. 제공=UPI코리아


하지만 영화의 어느 순간, 그녀를 ‘데려오려는’ 임무를 수행하는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의 심복 토로스의 부하인 이고르가 그녀에게 무심한 듯 건넨다. “아노라… 그 이름의 뜻은 석류, 빛이야.”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Anon+ora-'nobody)’ 존재로 여기며 이름의 의미조차 부정하려는 여자에게, 그녀를 억압적인 자본의 시스템 속으로 다시 끌고 들어가려는 자가 그녀의 이름이 지닌 찬란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역설. 이 섬뜩하고도 아름다운 순간이야말로 <아노라>가 파고드는 이름과 존재, 빛과 그림자, 그리고 현실과 환영의 비틀린 경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고르의 그 말은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차라리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깨닫게 하는 잔인한 친절처럼 느껴진다. 이름이 지닌 ‘빛’의 의미는, 그녀가 처한 ‘어둠’ 속 현실을 더욱 극명하게 대비시킬 뿐이다. 이처럼 <아노라>는 역설과 반어로 가득찬 하룻밤의 소동을 그리고 있다. 그 소동의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은 실재와 환영을 비추는 이중 거울을 마주하게 된다.



유리 구두의 파편들 서바이벌의 중력


아노라의 서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상승과 성취의 성장담이 아니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듯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서바이벌’로서의 현재일 뿐이다. 브루클린의 외곽에서 성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그녀의 삶은 단단한 서사적 구조물로 지탱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불안, 욕망, 체념, 그리고 때때로 비집고 들어오는 희미한 희망의 조각들을 파편적으로 그러모은다.


러시아 재벌의 아들 바냐(이반)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즉흥적이고 변덕스러운 결혼 제안은 분명 현실의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동화적 장치처럼 보인다. 밑바닥 삶을 사는 여성에게 찾아온 신데렐라 스토리. 그러나 이 반짝임은 오래가지 않는다. 바냐의 아버지인 올리가르히가 개입하고, 그의 심복 토로스와 그 부하들(이고르, 겔리)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신데렐라 신화는 처절한 실패로, 그리고 계급이라는 무자비한 중력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는 유리 구두 조각들로 되돌아온다.


만남부터가 잔혹한 종말의 암시였을까. 제공=UPI 코리아


어떤 구원도, 어떤 극적인 반전도 이 세계에는 허락되지 않는 잔혹한 동화다. 과거의 계급 연대가 약속했던 집단적 구원의 가능성은 이미 소멸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풍경 속에서, 아노라는 오직 홀로, 파편화된 채로 버텨내야 하는 한 개인이자 존재로 남겨진다. 그녀는 성장하는 대신, 그저 버텨내고,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반복적인 싸움만을 계속할 뿐이다. 그녀의 감정은 끊임없이 불안과 불신 사이에서 파편화되고, 관객은 그 파편들이 모여드는 방식을 목도한다.



상을 통해 실재를 응시하기


션 베이커는 이러한 아노라의 삶을 담아내기 위해 독특한 미학을 구사한다. 이는 단순한 사실주의적 묘사를 넘어, 이탈로 칼비노가 이야기했던 ‘비실재적 리얼리즘’에 가깝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과장된 우연과 판타지적 요소를 끌어들이되, 이를 극도의 사실적인 디테일과 질감 안에 심어 넣는 방식이다. 비전문 배우들의 날것 같은 연기, 브루클린의 거친 거리 풍경, 자연광과 현장음으로 가득 찬 시네마 베리테적인 기법들은 도그마 선언의 현장성을 상기시키지만, 여기에 '러시아 재벌 아들과의 결혼'이라는 비현실적인 내러티브가 결합된다.


이 독특한 이중주는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장면은 실제 현실인가, 혹은 현실을 극적으로 모방한 허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관객은 미끄러진다. 그러나 바로 이 경계의 흔들림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불평등, 성(性)이 거래되는 방식, 인간이 시스템의 부품처럼 취급되는 비인간적인 현실이라는,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거나 외면하기 쉬운 ‘보이지 않는 질서’가 역설적으로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일까? 현실보다 더 진짜같은 환상일까? 제공=UPI 코리아


비현실적인 이야기 구조가 현실의 본질을 파고드는 칼비노적 역설이 여기서 작동한다. 인물은 계급 주체가 아닌 소외된 개인이며, 연대보다는 감정과 욕망의 잔재들 속에서 길을 찾는다. 영화는 브루클린이라는 공간 또한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이러한 경계인들의 삶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생생한 현장으로 그려내며, 그들의 존재를 사회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린다. 결혼, 가족, 사랑의 개념이 어떻게 해체되고 다시 구성되는지에 주목하면, 이 영화는 단순한 계급 로맨스가 아닌 사회적 판타지의 조롱과 성찰로 읽힌다.



하이퍼리얼의 유혹과 시뮬라크르의 그림자


하지만 이처럼 환상과 현실을 뒤섞는 미학은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위험한 경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다. 장 보드리야르가 경고했듯, 현실을 재현하려던 이미지는 결국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허상'(하이퍼리얼)이 되어 현실 자체를 대체하는 시뮬라크르로 전락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야기의 경계를 끊임없이 유영하며 “환상(fantasy)이 곧 리얼리티(real)”라 말하는 비실재적 리얼리즘이, 정작 이미지가 실재를 잠식해 버리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의 함정으로 빠질 수 있다.


아노라의 고단함, 굴욕, 그리고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생명력이 스크린 안에서 생생하게 포착될 때, 우리는 그것이 '진짜 아픔'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카메라의 시선, 편집의 리듬, 미묘한 미장센을 통해 이 고통이 '아름다운 고통'으로 미학화되는 순간, 그것은 실제의 날것 그대로의 아픔이 아닌, 예술적으로 잘 가공된 오브제가 되어버릴 수 있다.


영화에서 보이는 ‘스트리퍼와 올리가르히 아들’의 우연한 만남 같은 설정은, 마치 계급·젠더·권력 구조를 한눈에 꿰뚫는 도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구조적 모순을 ‘극적 판타지’로 전환해버려, 관객이 사회 현실의 복합성을 더 깊이 들여다볼 기회를 박탈할 위험이 있다.


관객은 이 '고통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영화를 감상하지만, 그 감상은 실제 아노라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의 삶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나 현실적인 개입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스크린 안에서 소비되고 소멸될 위험이 있다. 이는 주변부 인물의 고통을 '보는 즐거움'으로 환원하는, 윤리적으로 매우 미끄러운 함정이다. 결과적으로 사회정치적 문제는 “극적 서사의 긴장감” 속에 흡수되고, 그 실재적 고통과 불평등은 미장센의 일부 장식으로 소비될 수 있다.


<아노라>의 촬영 현장과 감독 션 베이커. 사진=UPI 코리아


영화가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흔드는 메타적 장치 또한 과도하게 반복될 경우, 관객이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 모든 것을 '연출된 쇼'로 치부하며 냉소적으로 거리를 두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비실재적 리얼리즘이 환영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려 할 때, 그 환영 자체가 진실을 가려버리는 시뮬라크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다.



연대의 부재 고립의 풍경


이처럼 위험한 미학적 쾌감 속에서도, 영화가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동조의 부재’에 관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아노라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연대하려는 인물은 극히 드물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시작했던 바냐는 변덕스러운 어린애에 불과했으며, 그의 아버지의 심복들과 그 부하들(토로스, 이고르, 겔리)은 그녀를 시스템 속으로 강제로 끌고 가려는 냉혹한 집행자들이다. 앞서 언급했던 이고르가 아노라의 이름 뜻을 일러주는 순간조차, 그것은 연대의 제스처가 아니라 그녀를 감금한 상황 속에서 발현된 기묘한 인간미, 혹은 임무 중의 찰나적인 일탈에 가깝다. 그들은 그녀를 ‘대상’으로 대할 뿐,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호텔 직원이나 브루클린 거리의 무심한 행인들은 그녀를 스쳐 지나갈 뿐, 손을 내밀거나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거나, 잠시 시선을 멈추거나, 혹은 정해진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이 ‘동조의 부재’로 가득 찬 고립의 풍경이야말로 이 영화가 포착한 신자유주의 시대 인간관계의 쓸쓸한 초상이며, 사회적 연대가 해체된 파편화된 현실의 증언이다. 아노라는 홀로 버텨내야 하며, 그 누구에게서도 안정적인 지지나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그녀의 외로움은 구조적이며, 깊다. 그녀는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이름조차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는 공간에서 홀로 고립되어 있다.


이고르(유리 보소로프) 조차 조력자처럼 보이지만 완전한 연대를 암시하지는 않는다.


<아노라>의 화면에는 분명한 연대의 울림이 들리지 않는다. 단단한 벽처럼 각자의 고통과 욕망이 고립된 채 포착되기 때문이다. 아노라는 클럽 구석에서 홀로 서 있고,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은 고작 무표정한 시선이나 순간의 친절만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냐의 제안조차 애틋함보다 일시적 구호에 가깝고, 동료 성노동자들은 그저 각자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몰두하며 서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노라>가 완전한 연대 부재의 기록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션 베이커는 연대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 버리지 않았음을, 관객이 스크린 너머로 손을 뻗을 때 비로소 드러나게끔 설계한다. 호텔 직원이 문을 열어 주던 그 짧은 친절, 골목길을 함께 걷던 누군가의 묵묵한 동행, 카메라가 오래 머물렀던 무명의 시선들—이 모두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즉, 영화는 등장인물 간의 직접적 연대를 배제하는 대신, 관객과의 윤리적 연대를 촉구한다.


이처럼 <아노라>는 화면 밖으로 확장되는 연대를 남긴다. 비록 캐릭터들끼리의 구체적 손잡음은 포착하지 못했지만, 관객이 그녀의 고통을 마주하고, 그 불안정한 삶을 자신의 고민으로 품어 안을 때야말로 연대는 비로소 완성된다. 스크린 위에서 깜빡이는 네온 사이로 흩어졌던 작은 동조의 잔해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모여, 연대의 희미한 불빛을 다시금 일깨운다.



경계 너머의 윤리 관객의 자리


그렇다면 결국, 아노라에게 남겨진 유일한 ‘동조의 가능성’은 스크린 너머의 관객 자신일지도 모른다. 션 베이커의 카메라는 아노라의 시선을 따라가고, 그녀의 숨결과 체온을 느끼게 하며, 관객을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 안으로 초대한다. 이 비물리적인 초대는 관객에게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 여자의 삶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습니까? 당신은 그녀를 누구로 보고 있습니까?”


영화 속 인물들은 그녀를 외면하지만, 카메라는 관객에게 그녀를 똑바로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응시의 순간에서, 우리는 아노라가 속한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만든 구조를 마주하게 된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거울인가? 제공=Google Sora


바로 이 응시의 순간에서, 영화는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 시대와 대화하는 예술이자 실재의 순간을 포착해 윤리적 응답을 촉구하는 장이 된다. 영화가 마주한 하이퍼리얼리즘과 시뮬라크르의 위험은 역설적으로 영화의 ‘반성적 리얼리즘’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션 베이커는 촬영 장치의 존재를 감추지 않고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편집의 자국을 남기며, 서사의 구조가 어떻게 빚어졌는지 관객의 시야에 펼친다. 이는 영화가 ‘완결된 허상’이 아니라 ‘진행 중인 대화의 촉발점’임을 선언하는 방식이다. 엔딩 크레딧 뒤에 실제 지원 단체 정보를 삽입하거나 상영 후 관객 참여 토론을 유도하는 것은, 관객이 영화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나아가라고 부추기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구분’을 해체하는 반성적 리얼리즘


<아노라>는 ‘하위문화’라는 용어가 내포한 주류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시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성노동자, 이민자, 하층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하위’에 분류된 존재들을 단순한 배경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대신, 그들 각자가 지닌 욕망과 불안, 그리고 존엄을 지키려는 미세한 몸짓을 정교하게 포착한다.


브루클린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이민자의 낭만적 꿈이 펼쳐지는 곳도, 계급 투쟁의 뜨거운 현장도 아니다. 그것은 희망이 쉽게 미끄러지고 실패가 관습화된,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이들이 숨 쉬는 현실의 풍경이다. 션 베이커는 이 경계인들의 삶을 중심에 앉히되, 그들을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드러내는 미세한 진동 속에서, 우리는 주류의 시선으로는 가려졌던 사회의 균열과 역동을 마주하게 된다.


‘하위문화’는 더 이상 주류의 그림자가 아니라, 주류 사회의 모순과 위선을 되비추는 불온한 거울이 된다. 올리가르히의 심복들조차, 그들 나름의 질서와 생존 방식 속에서 움직이는 또 다른 경계인으로 그려질 때, 영화는 사회의 모든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경계인의 몸은 해체의 도구이자, 타자성을 응시하는 렌즈가 되어 관객 스스로의 시선과 윤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하위문화는 구분의 장치가 아니라 층위를 부각하여 고발하는 장치다. 제공=UPI 코리아


<아노라>는 결국 스크린을 넘어서는 영화다. 일그러진 동화의 잔해를 밟으며, 아노라는 스스로를 단단히 세우지만, 그녀를 구원할 왕자도, 그녀와 함께 싸울 동지도 없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 뜻을 알려준 이고르조차 그녀의 곁에 남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체온은 그 어떤 이미지도 집어삼킬 수 없는 생생함으로 남아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허상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이 불온한 생생함이야말로, 영화 예술이 시뮬라크르의 유혹 속에서도 지켜야 할 존재의 윤리이자, 시대와 호흡하며 응답을 촉구하는 예술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관객이 마주해야 할 것은, 단 한 장의 완결된 허상이 아니라, 허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우리의 윤리 감각을 흔드는 불편하고 생생한 현실의 그림자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응시하는 한, 아노라라는 이름의 불온한 빛은 스크린 안팎으로 계속해서 빛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님’이라 이름 붙인 존재들 속에서 발견되는, 꺼지지 않는 존엄의 희미한 불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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