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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콘텐츠, 복수의 광장에서 길을 잃다

넷플릭스 시리즈 <광장>을 보고

by 박 스테파노

상처를 소비하는 쾌락의 허상


최근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가상의 스크린 위에 <광장>이 선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의 표제가 의미하는 ‘광장’은 단순히 공간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쉴 새 없이 부딪히는 욕망과 분노가 교차하고, 배신과 복수의 얼룩이 번지는, 혼돈의 아레나다. 그곳에서 개인은 ‘복수’라는 칼날을 쥐고 저마다의 정의를 휘두르지만, 이 광장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복수의 불꽃은 때로는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의 무게를 태워버리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내적 분열을 드러낸다. 화면을 뚫을 듯 휘젓는 통쾌함의 카타르시스가 지배하는 이 광장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점점 빈 공간이 되어간다.


한국 드라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복수 서사라는 이름 아래 익숙한 노랫가락을 반복해 왔다. 특히 웹툰과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수많은 드라마들이 이 텅 빈 광장을 메우며 ‘복수’를 빌려 손쉬운 통쾌함만을 쫓는 형국이다. 그곳에서 복수는 더 이상 아픔을 응시하거나 갈등을 성찰하는 깊이 있는 서사가 아니다. 단지 격렬한 감정의 폭발, 스펙터클한 응징의 무대에 불과하다.


이야기의 깊이는 파편처럼 흩어지고, 웹툰과 웹소설이 가진 속도감과 흡입력은 역설적으로 서사의 뿌리를 허문다. 캐릭터의 내면은 횡설수설하는 대사와 단순화된 감정들에 가려지고, 복수에 얽힌 윤리적 갈등과 사회적 맥락은 희미해진다. 감정은 휘발되고, 분노는 표피적이며, 시청자에게 남는 것은 순간적인 카타르시스뿐이다.


복수라는 무거운 이름 아래 펼쳐지는 이 허울뿐인 광장은 결국 우리 시대의 진짜 상처를 가린다. 복수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공유하는 깊은 갈등과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의 응어리를 품은 채 성장해야 할 치유의 여정이다. 그러나 다수의 한국 드라마들은 이 여정을 등한시한 채, 가벼운 자극과 피상적 감정 소비를 반복하며 허공을 헤맨다.


원작 웹툰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광장>. 네이버웹툰, 넷플릭스


<광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잡는 이유는, 복수의 무게를 짊어진 인물들이 보여주는 처절한 자기 부정과 끝없는 갈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수의 칼날에 찔리면서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수극은 이러한 내면의 균열을 은폐하며, ‘한 방’의 쾌감을 위해 얄팍한 분노만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묻는다. 왜 복수는 그저 눈에 보이는 분노의 폭발에 그치는가? 왜 그 안에 숨겨진 인간의 상처와 사회의 모순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는가? 복수는 차가운 칼날이자 동시에 뜨거운 불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와 공동체의 가장 어두운 그늘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다. 복수 서사의 재발견과 성찰은 단지 장르적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공동체가 맞닥뜨린 고통과 희망을 다시 쓰는 일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복수는 허상의 광장을 넘어 우리 내면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다.



복수의 오래된 그림자: 역사, 철학, 진화심리학이 겹쳐 보이는 복수의 동력


복수는 인류 역사만큼 오래된 감정이자 사회적 행위다. 기원전 18세기경의 함무라비 법전은 복수의 기초를 법으로 규정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 그 유명한 ‘동태복수법’—눈에는 눈, 이에는 이—은 복수를 단순한 개인감정의 분출에서 사회적 균형과 정의의 원리로 제도화했다. 이 원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불안정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상호 억제 장치였다. 복수는 개인의 분노를 사회적 통제 아래 두는 법적 틀로 기능하며, 동시에 ‘공정함’이라는 이름 아래 증오와 폭력의 순환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복수의 역사적 궤적은 단순한 법제도를 넘어선다. 복수는 ‘정의’의 감정적 표현이자 동시에 ‘권력’과 ‘정체성’의 문제였다. 16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복수를 “정치적·사회적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 규정하며, 복수심이 “법의 기능을 대체하는 자경심”임을 간파했다. 그는 복수심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감정으로 보았으며, 이를 사회질서 유지의 걸림돌로 지적했다. 그의 시선은 복수가 감정적 욕망과 정의 사이의 위험한 경계에 놓인 행위임을 드러낸다. 복수를 그저 '야생의 정의'라 단언한다.


마이클 맥컬러프 <복수의 심리학>. 예스24


이러한 역사·철학적 인식은 현대 사회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의 연구와 맞닿는다. 마이클 맥컬러프가 제시한 ‘진화론적 복수심’ 개념은 복수를 단순한 감정적 충동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는 복수를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 발달시킨 적응적 행동으로 본다. 복수심은 사회적 규범과 협력을 위협하는 타인의 공격에 대한 대응 메커니즘으로, 개인의 위신과 자원을 보호하고, 집단 내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 즉, 복수는 ‘복합적 신호’이자 ‘억제의 도구’인 셈이다.


이 세 겹의 렌즈—법, 철학, 진화심리—는 복수가 왜 인간 내면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왜 그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지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복수 서사는 단지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분노의 표출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갈망, 권력의 균형, 그리고 사회적 정체성의 투쟁이 교차하는 장이다.


영화와 드라마라는 현대적 서사 매체에서 복수는 더욱 치명적인 매력을 발휘한다. 스크린 위에서 복수는 관객의 감정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이자, 개인과 사회가 품은 억압된 분노의 상징적 표출이다. <광장>과 같은 작품이 제기하는 ‘복수의 딜레마’는 복수가 단순한 복수에 머무르지 않고 내면의 갈등과 윤리적 모호함, 그리고 사회구조적 문제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수의 한국 드라마는 복수의 이러한 다층적 의미를 흉내만 낼 뿐, 정작 깊은 내면을 탐색하지 않는다. 복수는 때로 단순한 원한과 권력 게임의 도구로 전락하고, 이야기의 복잡성은 감정의 표피적 폭발에 묻힌다. 이 과정에서 복수 서사는 고대 법전이 명명한 ‘공정함’의 경계도, 베이컨이 우려한 ‘감정의 과잉’도, 맥컬러프가 분석한 ‘진화적 억제’도 넘어서지 못한다. 결국 그 서사는 허공에 부딪히는 메아리가 되고, 관객에게는 빈 껍데기만 남긴다.


한국의 복수 서사의 명작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각 영화사 제공


복수 서사가 다시금 진정한 힘을 회복하려면, 복수에 깃든 역사적 무게와 인간 심연의 복잡한 층위, 그리고 사회적 맥락을 통합하는 새로운 서사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영화와 드라마가 단지 분노와 폭력의 대리자 역할을 넘어서, 복수를 통해 인간 존재의 상처와 회복, 그리고 공동체의 근본적 물음을 깊이 성찰할 때 비로소 복수는 다시금 무게 있는 언어가 될 것이다.



상처의 언어, 복수의 얼굴: 콘텐츠 산업에 스민 분노의 변형들


복수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얼굴이다. 무너진 정의 앞에서 한 개인이 품은 분노는 오래도록 서사를 끌고 가는 검은 불꽃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 불꽃은 누구를 태우는가? 단지 악인을 처벌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세계를 겨냥한 내면의 균열을 밝히기 위함인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어 관심을 받았던 <더 글로리>는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들었다. 한 여성이 과거 학폭 가해자였던 이들을 찾아 잔혹하게 복수하는 구조의 이 드라마는, 복수 서사에 대한 한국 콘텐츠 시장의 중독적인 집착을 집약한 듯 보였다.


최근 스트리밍 시작한 <광장>은 한때 ‘동반자’였던 주인공이 치밀하게 ‘응징자’로 탈바꿈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도덕적 불균형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정당화되는 일종의 통쾌한 장르놀이로 복수는 소비된다. 플롯은 잘 풀려 가고 스타일도 자극적이지만 정작 서사의 골수는 비어 있다. 정의란 무엇이며, 복수는 무엇을 구원하는가 하는 질문은 제쳐두고, 남는 것은 오직 ‘누가 어떻게 파멸되는가’에 집중된 긴장감뿐이다.


장르적 통쾌함의 정점에서 스트리밍하는 <광장>. 넷플릭스


이와 같은 복수 서사의 범람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뿌리 깊은 경향성을 드러낸다. 특히 웹툰과 웹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들에서 이런 단순화는 더욱 두드러졌고, 이는 오리지널 드라마 서사에도 이식되었다.


<더 글로리>, <복수해라>, <복수노트>, <마스크걸> 등 인기작들은 대개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 주인공은 폭력과 배신의 희생였고, 오랜 시간 침묵과 고통 속에 살아오다 어느 날 냉혹하고 정교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그 복수는 구조나 윤리에 대한 사유가 아닌, 통쾌함이라는 감정적 지점을 겨냥하며 끝까지 단선적인 리듬을 유지한다. 이런 서사에서 복수는 더 이상 ‘사회적 정의 회복’이나 ‘인간 내면의 그늘을 직면하는 서사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게임적 쾌감, 타인의 파멸을 바라보며 쾌재를 부르는 자극적 메커니즘이자, 짧고 강렬한 클립에 적합한 ‘팔리는 감정’일 뿐이다.


그러나 진짜 복수 서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에서, 자식을 잃은 여성은 세 개의 광고판을 세워 침묵하는 경찰을 도발한다. 그녀의 분노는 정당하지만, 그 분노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오히려 그 분노는 또 다른 상처와 폭력을 낳고, 결국 복수는 질문으로 남는다.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언포기버블>의 주인공은 한때 살인을 저질렀던 전과자다. 그녀가 돌아온 사회는 여전히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피해자 가족은 용서 대신 증오로 그녀를 가둔다. 이 복수는 물리적이기보다 정서적인 감옥이다. 이 서사에서 복수는 ‘정당함’이 아닌 ‘파국의 반복’으로 묘사된다.


제인 캠피온의 <파워 오브 더 독>은 가장 비정통적인 복수극이다. 여기서 복수는 총칼도, 폭력도 없이 이루어진다. 섬세한 심리 조작과 숨겨진 상처가 복수의 도구다. 이 복수는 철저히 인간의 내면—남성성, 권위, 억압받은 욕망—의 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원작의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은 법과 정의가 부패했을 때, 개인이 법을 넘어서 정의를 구현하려는 시도를 다룬다. 그는 스스로 ‘정의의 행위자’가 되고자 하나, 결국 그 정의는 또 다른 폭력과 자기 파괴로 귀결된다. 이 서사는 복수가 언제 정의의 가면을 쓴 폭력이 되는지를 예리하게 묻는다.


복수의 통쾌함 내면의 깊은 성찰을 보여준 서사들. <쓰리 빌보드>,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 <언포기버블>, <파워 오브 도그>. 각 영화사 제공


이들 작품이 공유하는 것은, 복수를 단지 ‘행동’이 아닌 ‘물음’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복수는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비판이자,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욕망을 드러내는 렌즈다. 그들은 관객을 고통스러운 윤리적 딜레마 속에 밀어넣고, 쉽게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의 많은 콘텐츠가 이 정교한 복수 서사의 정신을 놓치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재미’가 곧 ‘성과’가 되는 콘텐츠 시장의 구조 때문이다. 자본은 철학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기획과 제작이 ‘확률 높은 성공’에만 매몰된 시장에서 복수는 단지 ‘소비되기 쉬운’ 패턴으로서 기능한다. 질문을 멈추고, 사유를 축소하며, 감정은 단순화된다.


결국 오늘날 한국 복수 서사 콘텐츠의 범람은 철학 없는 재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과거의 상처를 다루는 방식은 점점 감각적 복제로 전락하고, 인간 내면의 균열과 사회 구조의 모순은 쉽게 패스된다. 그러나 복수라는 오래된 이야기는 여전히 무게 있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단 하나, 그 이야기가 상처를 증오로만 말하지 않고, 상처 속에 구조를 보고 인간을 본다면. 콘텐츠는 이제 그 복수의 화염 속에서, 다시 묻기 시작해야 한다. “누가 진짜 가해자인가?” “무엇이 정의를 정의롭게 만드는가?” 그리고 “복수는 정말로 세계를 바로잡는가, 아니면 더 깊은 균열로 이끄는가?”



복수 서사의 한국적 문법과 그 심리적 기반: 그리고 “복수 이후”의 상상력


한국적 복수 서사는 어쩌면 ‘한’이라는 감정의 서사적 번역일지도 모른다. 억눌리고 눌려온 감정, 복잡하게 매몰된 분노, 사라지지 못한 비애의 응축. ‘한’은 반드시 언어로 표출되지 않으며, 오히려 침묵의 층위에서 더 깊어지고 끓는다. 한국 드라마 속 복수는 이 ‘말해지지 못한 고통’을 극단의 형태로 돌파한다. 기묘하게도, 그것은 정의를 향하지 않고, 철학을 경유하지 않으며, 단지 감정의 절정—통쾌함—에 닿고자 한다.


<더 글로리>의 동은은 완벽한 계획을 통해 가해자들을 하나씩 무너뜨리지만, 그녀가 향한 복수의 길은 어디에도 윤리적 대답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시청자는 ‘정의의 복수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 박수는 곧 기획의 코드가 된다. <복수해라>나 <마스크걸>처럼 비슷한 복수의 문법은 웹툰 기반의 플롯에서 반복되고, 감정적 쾌감은 압축된 편집과 음악으로 증폭된다. 우리는 피해자의 서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복수극’을 즐긴다.


복수극의 대표작 <더 글로리>의 동은. 넷플릭스


이러한 문법의 정형화는 심리적 기원을 가진다. 군사 독재, 산업화, 신자유주의, 청년실업과 입시폭력—한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반복해온 억압과 불균형은 ‘정당한 분노의 배출구’를 막아왔다. 제도적 회복의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개인이 감정을 해결하는 유일한 장치는 ‘사적 정의’로 위장된 복수인 것이다. 이는 법의 무기력함, 제도의 외면, 공동체의 파괴로 이어진 현실을 배경 삼아 발생한다.


그렇기에 한국형 복수 서사는 피해자의 주체화를 강조하면서도, 그 주체는 ‘복수에 성공했을 때’에만 유효하다. 복수는 자기 존재의 증명이자, 서사의 유일한 동력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이 구조는 필연적으로 비극을 회피하거나 덮어버린다. 복수 이후, 주인공의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가 복수 외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는가? 라는 질문은 지워진다. 마치, 복수로만 존재할 수 있는 자아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도구로 환원되는 것처럼.


그러나 복수는 종종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리고 진정한 서사는 그 이후를 상상하는 데서 발생한다.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이 보여주는 것처럼, 복수는 의도했던 정의를 이루기는커녕, 더 큰 혼란과 자기 파괴로 귀결될 수 있다.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는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 끝에 또 다른 허무와 죄책에 맞닥뜨리고, <언포기버블>의 루스는 사회가 제공하지 않은 용서를 스스로 빚어내야 했다. <파워 오브 더 독>은 복수가 완성되었을 때 오히려 공허한 평온만이 남는 아이러니를 제시하며, 그 평온 속에서 잊힌 인간적 상흔을 은유한다.


'복수 이후'의 서사가 필요하다. Google Sora


복수 이후를 사유하지 않는 서사는 불완전한 정의다. 복수란, 결국 고통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언어가 증오만을 담을 때,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의 기원이 된다. 복수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할 때, 우리는 새로운 서사를 요구해야 한다. 그것은 ‘용서’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기억’과 ‘공존’이라는 윤리적 사유다.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니다. ‘망각’은 편의적 제도화의 이름으로 자주 불려왔고, 그 아래에서 수많은 상처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반면, 진짜 용서는 기억의 재구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피해자가 자신의 언어를 회복하고, 가해자는 그 언어 앞에 멈춰 설 때. 바로 그때 비로소 복수는 다른 얼굴—회복, 전이, 연결—로 바뀔 수 있다.


한국 콘텐츠가 ‘복수 이후’를 서사화하지 못하는 건, 자본의 속도가 윤리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는 흥행이 안 되고, ‘회복’은 자극적이지 않다. 하지만 진짜 예술은 늘 자극의 반대편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예술은, 인간의 상처가 더 이상 복수만을 꿈꾸지 않을 때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복수라는 낡은 구조를 넘어설 준비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상처를 사회적 구조로 연결하고, 통쾌함 대신 서늘한 성찰을 택하는 서사.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가 콘텐츠에게 요구하는 ‘다음 장’이다. 고통의 서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을 쓸 수 있는 작가, 제작자, 관객만이 진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다가 서기 힘든 진짜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많다. 저예산,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예술이라는 이름표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이 범람하는 콘텐츠의 진흙탕 홍수 속에서 그 진주를 집어내는 일이 비평, 평론, 리뷰의 쓸모다. 쓸모 있는 글쓰기를 위해 오늘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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