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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복숭아는 어디로 갔을까?

영화 <파과>는 소설 <파과>에 입체감을 더했을까?

by 박 스테파노

구병모의 동명 소설 <파과>는 제법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민규동 감독은 그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원작 텍스트를 영상 콘텐츠로 변주하는 일은 흔하지만 결코 녹록지 않은 작업이다. 평면에 납작하게 눌려 인쇄된 글자는, 독자의 눈을 거쳐 머리와 마음에서 다시 부풀어 오른다. 보지 않고 상상으로 그려낸 가상의 이미지가 생각보다 깊고 선명한 잔상으로 남는 까닭이다. 영상화란 바로 그 잔상의 선입견과 관성을 유지하거나, 때로는 깨뜨리며 진일보하는 과정이다. 말처럼 쉽지 않은 길이다.


구병모의 소설은 말의 리듬으로 호흡하는 세계다. ‘파과’라는 단어부터가 그러하다. 단단히 익어 스스로 터져버리는 열매, 그 순간은 파괴와 완성의 미묘한 경계선 위에 서 있다. 작가는 그 경계를 따라 조용히 걸으며, 삶의 말단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노년의 암살자를 말과 말 사이에서 정교하게 빚어낸다. 문장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다. 인물의 호흡이자, 삶의 궤적이며 정서의 표면인 것이다. 이런 문장이 감각의 부피와 결을 머금고 흐르는 서사를 영상에 옮길 때, 그 언어의 밀도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는 민규동 감독에게 가장 난해한 과제였을 터다. 예컨대 이 문장.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 소설 <파과> 중에서 —


구병모의 소설 <파과>와 민규동 감독의 <파과>. 교보문고, 수필름


하지만 영화 <파과>는 이 핵심 과제를 다소 느슨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노년 여성 킬러라는 독특하고 상징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녀 내면의 깊이는 인물의 얼굴보다 주변 인물들의 사연보다 더 평면적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소설이 품고 있던 리듬과 침묵, 미묘한 감정들을 대신할 무엇인가를 마련하지 못한 채, 단선적 플롯의 흐름에 기대고 있다. 장면과 장면은 이어지지만, 감정과 감정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 이야기는 전진하지만, 인물은 살아 숨 쉬지 못한다.


앞서 인용한 ‘복숭아’와 ‘파과’는 원작에서 강렬한 은유이자 상징적 기표로 작동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것을 발견하거나 획득하기 어렵다. 어쩌면 작품의 제목인 ‘파과’라는 단어가 가진 중의적 다층성과, 영화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소재에 불과한 복숭아는 이 작품 심연을 건드리는 중요한 단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단서를 놓친 채 흘러가고 만다.



파과, 시간에 대하여 바라보는 두 시선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는 ‘으깨진 과일(破果)’이라는 뜻을 염두에 뒀는데, 결말을 맺은 뒤에는 그 안에 ‘이팔청춘(破瓜)’의 의미도 함께 담았다.”


구병모 작가가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이 고백은, 흠집 난 과일로서의 부패와 동시에 찬란한 청춘의 불꽃을 한 제목 안에 병치하며 굳이 한자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더욱 넓혔음을 시사한다. ‘파과’는 이중의 시간을 가리키는 다층적 기표다. 쇠락과 부활, 상흔과 번뜩임, ‘지나침’과 ‘죄’의 무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다. 누군가 해석한 대로 ‘흠집 난 과일’의 상처와 ‘二八’이 비추는 청춘과 노년의 교차는 작품이 품은 존재론적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소녀의 시간에서 노인의 나이까지 생존의 도구로 살아 온 조각(이혜영)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파과’라는 제목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구병모 작가는 소설 창작 초기 ‘破果(으깨진 과실)’의 이미지와 결말 직전 ‘破瓜(이팔청춘)’의 찬란한 청춘성을 결합하며, 이 서사가 붙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의 무게임을 분명히 한다. 이 멋들어진 은유는 시간이라는 무거운 중첩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을 환기시킨다. 과일 중 가장 맛있고 아름다운 복숭아조차도 시간의 힘, 중력에 무너져 떨어져 상처 입은 낙오자가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저 썩어 문드러지는 퇴행만이 남는다. 소설 내내 ‘노인’이라 불리는 늙은 킬러 조각은 바로 그 후퇴와 미련의 기의이자 이름이기도 하다.


영어 제목이 <The Old Woman with the Knife>다. 영어 포스터가 원작의 의미에 더 충실하다. NEW제공


민규동 감독의 영화는 이 중의적 제목이 품은 부피를 화면에 풀어내려 했으나, 소설 문장의 내밀한 감각을 온전히 따라잡지 못한다. 전반부의 느슨한 서사는 부패한 과실의 단면만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그 속에 숨은 청춘의 열기를 놓쳐버린다. 중반 이후 서사의 조급함은 ‘부패와 파괴’가 아닌 ‘단절과 공백’으로 읽히며, 관객에게 메워야 할 해석의 틈을 남긴다. 그러나 그 여백마저도 관객이 스스로 채워야 하는 질문으로 남는다. 바로 그 틈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깨진 과실 너머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를 관객 스스로 묻도록 만드는 장치인 셈이다. 다층적 제목의 무게를 화면에 완전하게 옮기지 못했다는, 역설적 고백이다.


‘破果(으깨진 과실)’는 붉게 속살이 부서지는 순간의 상흔을 가리킨다. 존재가 깨어질 때 남는 갈래들, 상실이 흘려보낸 잔해들은 문장 속에서 계속 부풀어 오른다. 특히 ‘破瓜(청춘의 시간)’는 소년·소녀의 미묘한 생명력을 은유한다. 16세 빛나는 시간과 60대 노인의 퇴장하는 시간이 미묘하게 포개지면서, ‘노인’의 고독 속에 청춘의 불꽃이 비집고 들어온다. ‘흠집 난 과일’과 ‘二八의 교차’는 작품 내재의 시간성과 존재의 모순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영화 <파과>는 이 두 겹의 의미를 모두 화면에 담고자 하면서도, 정작 절정에 이르러서는 ‘깨짐’만을 강조하고 ‘재생’의 여운은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미장센의 구현이 서사의 중심을 빼앗은 탓이다. 여린 ‘손톱’이 억센 ‘짐승의 발톱(조각)’으로 자라나는 동안, 그 많던 복숭아들은 결국 파과가 되었을 터인데 말이다.



복숭아 알러지, 관계의 독성과 달콤함


조각은 아버지를 죽인 살해자이자, 동시에 투우(김성철)를 보살피고 감싸준 존재다. 투우에게 조각은 도피처이자 이상향인 놀이공원 ‘해피랜드’에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며, 그래서 ‘맛있지만 먹으면 탈이 나는’ 복숭아처럼 양가적 감정의 기표로 읽힌다. 이 감정은 복수와 용서 사이, 인간 내면 깊숙이 뿌리 내린 모순적 감정의 결을 보여준다.


원작에서 복숭아 알러지는 투우의 몸이 기억하는 통증이다. 달콤한 과일을 입에 대는 순간, 알러지는 살갗 깊숙이 파고들어 감각을 마비시킨다. 이 이중적 체험은 투우가 조각에게 느끼는 ‘사랑과 증오의 교차’를 상징한다. 복숭아 알러지는 단순한 신체 반응을 넘어선다. 입술과 혀에 닿는 달콤함은 곧 고통으로 전환되고, 투우의 몸은 복수와 용서 사이를 떨면서 오간다.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는 욕망’이라는 극적 반전이 여기 깃든다.


그러나 영화는 이 복숭아 알러지를 꽃가루 알러지로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복숭아가 지닌 존재론적 고뇌에서 멀어진 셈이다. 이는 일종의 의도하지 않은 디커플링 오류라 할 만하다. 영화는 과일가게 장면에서 복숭아를 비추고, 투우의 미묘한 표정을 잡지만 알레르기 발작 대신 ‘망설임’과 ‘흩어진 시선’을 보여주며, 복숭아를 단순히 먹을 수 없는 과일이 아닌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관계’의 상징으로 전환시켰다.


스크린에 과일가게의 정적과 투우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클로즈업한다. 알레르기 발작 대신 은은한 떨림이 남아, 관계의 독성과 달콤함이 어깨동무하는 듯한 방식으로 펼쳐진다. 복숭아 알러지는 곧 ‘사랑과 증오, 치명적 매혹’의 은유다. 그 껍질을 벗길 때마다 내밀한 감정의 지층이 드러나려 했으나, 결과는 아쉽게도 미완에 머문다.


위험하지만 매혹의 관계. 조각과 투우. NEW제공


기표는 조각(살해자) 대신 투우(피해자)의 감각을 통해 온전히 드러난다. 달콤함과 독성의 이중성, 혀끝에 맺힌 욕망과 몸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의 이질적 공존은 결국 ‘사랑과 증오가 교차하는 구조’를 상징한다. 복숭아 알러지는 투우가 조각에게 느끼는 연민과 원망, 분노와 그리움이라는 양가감을 응축하는 복합적 메타포로 기능한다.


이 기표는 복수와 용서, 욕망과 거부 사이에 걸린 인간 감정의 복합적 구조를 드러낸다. 달콤함은 유혹하지만, 그 안에 치명적 독성을 품어 도망치고 싶어진다. 투우와 조각의 관계는 이처럼 복숭아 알러지로 구체화된 메타포 위에 놓이며, 텍스트와 화면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잔향으로 남아야 했다.


민규동 감독과 구병모 작가 모두 인터뷰에서 ‘파과’라는 제목이 내포한 이중적 의미, 즉 ‘깨짐’과 ‘부패’, ‘시간의 죄’에 대해 언급했다. 알러지라는 양가 감정의 연결 고리는 복숭아라는 과일을 통해 조각과 투우의 어제를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 문장이 가진 미묘한 생기와 내면의 질감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했다. 영화 미학은 서사의 뼈대에 머무르고, 내면의 유기적 결합과 심층적 심리 묘사는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은퇴자의 고독 — ‘노인’이라는 이름의 시간적 단절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조각에 대한 다른 지칭 ‘노인’은 단순한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 서사의 핵심 키워드이자 존재론적 표식으로 기능한다. 킬러 조직에서 물러나 ‘쓸모없음’의 경계로 밀려난 그에게 ‘노인’이라는 호명은 ‘과거와 단절된 시간’의 무거운 짐을 부여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시간’의 분열처럼, 과거의 폭력과 현재의 고독이 그의 존재에 겹겹이 얽혀 부유한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며, 미래로 열린 시간 속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이로써 ‘은퇴’는 단순한 퇴장이 아니라 시간의 균열 속으로 몸을 던지는 심연의 행위가 된다.


현실의 60대는 흔히 ‘은퇴 세대’라 불리지만, 경제적·사회적 구조는 ‘일해야만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차별적 조건으로 그들을 내몬다. 그들은 2030 세대보다 더 사회에 기여했고 부양해 왔지만, 이제는 각자도생의 길목에 서 있다. <파과> 속 ‘노인’의 고독은 이 구조적 소외를 직접 조명하지 않지만, 그가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투영하는 외로움은 나이 듦과 단절, 그리고 계속 살아야 하는 숙명 앞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근원적 공포와 닮아 있다.


영화에서 ‘노인’이라는 명칭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백발의 성성한 머리와 척수 문제로 떨리는 손, 은퇴한 킬러로서의 고독과 단절을 통해 존재의 무게를 드러낸다. ‘노인’은 단순한 연령층을 넘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과 싸우는 존재론적 주체다. 그는 ‘과거’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시간은 그를 짓누르지만, 동시에 새로 시작할 가능성을 은밀히 속삭인다. ‘파과’라는 제목이 뜻하는 ‘깨진 과실’은 은퇴라는 시간의 파편 속에서 상실된 자아와 단절된 관계의 은유다.


영화 <아메리칸>, <폴라>의 포스터. Focus studio, Netflix


은퇴자의 이 딜레마는 고전과 현대 영화·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져왔다. 미즈 미켈슨의 <폴라>, 조지 클루니의 <아메리칸> 같은 작품들은 은퇴한 킬러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굴레를 벗지 못하는 존재임을 그린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등장하는 은퇴 킬러 서사들도 이 계보를 잇는다. 은퇴는 직업적 퇴장이 아니라 정체성과 삶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시간이다. 울버린의 슬픈 영웅담 <로건>처럼,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자들이 퇴물로 치부되는 현실을 스크린은 비추어 왔다.


<파과>가 그려내는 ‘노인’의 고독은 이 사회적 소외의 상징이다. ‘노인’은 물리적 나이를 넘어 사회적 낙인과 구조적 배제를 짊어진다. 이 현실은 ‘은퇴’를 개인의 선택이나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 아닌 강제된 단절로 규정한다. ‘노인’은 시대와 구조에 맞선 존재론적 항변자로서, 복수와 용서,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더구나 여자의 존재로 노인의 시간을 감당하는 일은 또 다른 중첩된 차별과 소외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문학의 언어에서 영화의 언어로의 번역


문학 원작을 영화로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은 결코 새롭지 않다. 수많은 텍스트가 지면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부피를 얻어 스크린과 브라운관으로 스며들었다. 그중 일부는 원작의 감흥을 충실히 재현했고, 또 다른 작품들은 원작을 뛰어넘는 재해석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이 모두가 ‘번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라 할 수 있다. 문학이라는 출발어가 창조적 변형을 거쳐 영화라는 도착어로 재생산되는 과정은 언제나 고뇌와 실험의 연속이다. 그만큼 쉽지 않은 도전이다.


구병모의 원작 소설은 섬세한 문장과 깊이 있는 내면 묘사를 통해 ‘노인’의 삶에 무게와 질감을 부여한다. 문학은 언어의 미세한 리듬과 정서의 파편들을 한 줄 한 줄에 녹여 내는 데 탁월하다. 반면 영화는 시각적 이미지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면을 펼쳐 내야 한다. 이 전환 과정에서 <파과>는 서사가 다소 납작해지는 한계에 직면한다. ‘칼 끝에 사정을 두지 마라’와 ‘총으로 나비를 쏘지 마라’ 같은 대사는 작품이 담고 있는 폭력과 연민의 긴장 관계를 응축해 보여 주지만, ‘복숭아 알러지’와 같은 다층적 기표가 시각적 미학에서 사라진 것은 깊은 미학적 숙고와 실험을 필요로 한다.


문학에서 영화로의 번역에 좀 더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Sora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파과>가 전혀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병모의 문장은 무수한 감정의 파편을 목소리 삼아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한 줄 문장 안에 ‘시간의 결’과 ‘기억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긴다. 영화는 그 문장을 직접적인 언어로 풀어내기보다, 여백으로 남기고 이미지와 소리 속에서 부유시키려 시도한다. 이로 인해 서사의 단면은 납작해 보이지만, 동시에 관객에게 해석의 여백—제목이 지닌 다층성, 대사의 여운, 화면의 침묵—을 열어젖히는 미덕을 발휘한다.


킬러 은퇴물은 대개 ‘가족’, ‘복수’, ‘일상 회복’을 중심으로 다양한 결말을 제시한다. <파과>는 이 전형적 서사 틈새에 ‘양가적 감정의 파편’을 흘려 넣는다. 복숭아 알러지처럼 뜨겁고 치명적인 관계 위에 은퇴자의 외로움을 포갠다. 복수와 용서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미세하게 떨린다. 조각은 더 이상 살육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음을 깨닫지만, 과거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도 못한다. 이 지점에서 <파과>는 전통적 은퇴 서사를 ‘단절’이 아닌 ‘잔류하는 시간’ 위로 옮겨 놓으며, 서사의 깊은 잔향을 남긴다.



상흔의 기호와 잔류하는 시간의 미학


〈파과〉의 두 중심 인물 이름은 그 자체로 해석의 기호다.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부서진 ‘조각’은 무엇인가로부터 깎여나온 존재의 파편이자, 동시에 그 존재를 형상화하는 흔적이다. 아버지를 죽인 자이며, 투우를 돌보는 보호자, 증오와 그리움의 두 감정이 교차하는 인물. 조각은 온전한 이름이 아니라 쪼개진 정체성을 지닌 존재다. 반면 ‘투우’는 들이받는 자 같지만, 실은 감정을 온몸으로 떠안고 견디는 자다.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도 멈추지 않는 존재, ‘투우’라는 이름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 계속 부딪혀 오는 시간과 관계에 의해 흔들리는 삶을 반영한다. 이 양가적 긴장 관계야말로 〈파과〉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 구조의 핵심이다. 떨어진 과일과 지나간 시절, 복숭아와 알러지, 달콤함과 독성, 노인과 소년, 그리고 복수와 용서라는 이분법적 대립 속에 자리한 미묘한 진동.


이 감정의 진동은 철학적 사유로 확장된다.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 존재는 ‘자기 앞에 던져진 존재(Dasein)’다. 조각과 투우는 과거의 폭력과 상처를 몸에 품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던져진 자’다. 여기서 과거는 단순히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몸과 감각에 새겨진 알러지처럼 반복적으로 현재를 침범하는 구조다. 복숭아 알러지는 바로 이 점에서 기표이자 기의다. 달콤했던 관계가 고통으로 변질되는 경험, 애착과 증오가 분리 불가능하게 얽힌 양가적 기억. 레비나스가 말했듯, 타자는 나에게 상처를 남기면서도 동시에 나를 책임지게 만드는 존재다. 조각은 투우에게 바로 그런 타자—피해자이자, 동시에 응답해야 할 존재로 남는다.


‘파과(破果)’라는 제목은 시간의 형이상학으로 확장된다. 깨진 과실은 단순히 썩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정적 순간 이후 더는 이전 자신으로 머무를 수 없는 존재 분기점을 뜻한다. 청춘의 절정인 ‘破瓜’일 수도, 노년의 쇠락과 침묵인 ‘破果’일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나 이 두 시간 사이, 중첩된 경계 위에 서 있다. 〈파과〉는 바로 이 시간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존재의 균열과 윤리적 딜레마를 조명한다.


이야기 <파과>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NEW제공


영화는 이 균열을 시각적으로 포착하려 시도하지만, 소설이 담아낸 문장이라는 시간의 결을 온전히 옮기지 못한다. 조각이 복숭아를 손에 쥐지 못하는 순간, 혹은 투우가 복숭아를 바라보다 멈칫하는 클로즈업에서 관객은 비로소 그 기호가 말하는 바를 듣는다. 복숭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관계의 기호다. 먹고 싶지만 먹으면 탈이 나는 것, 즉 사랑하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관계를 상징한다. 바르트의 기호학을 빌리자면, 복숭아는 ‘부드러움과 위험’이라는 이중적 의미망으로 관객의 무의식과 교감한다.


나아가 〈파과〉는 미학적으로 ‘잔류하는 시간’의 구조를 탐색한다. 대부분의 킬러 은퇴 서사는 과거와의 단절 혹은 미래로의 이행이라는 서사 틀을 갖지만, 〈파과〉는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진입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그린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오히려 ‘남아 있는’ 시간으로 존재한다. 조각과 투우는 모두 파과된 과실처럼 썩어 가는 현재에 붙들려 있다. 시간은 전진하지 않고, 그 무게는 고통의 층위로 쌓인다. 이 정체된 시간 안에서 윤리는 단선적 복수의 구도로 환원되지 않고,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잔향으로 잔존한다.


결국 〈파과〉는 폭력의 기억과 돌봄의 기억이 겹쳐진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타자를 응시하고 응답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존재는 깨지지만, 깨진 존재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파과〉는 그 깨진 존재들을 단순히 치유하거나 구원하는 것을 넘어, 상흔에 의미를 부여하는 미학적 제안을 던진다. 과거를 잘라내는 일이 아니라,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묻는 것이다. 파과된 시간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들—그들이야말로 이 시대 가장 섬세하고 위태로운 윤리적 실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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