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클라베> 리뷰
“세데 바칸테(sede vacante).”
바티칸의 주요 추기경들이 승하한 교황의 침대 곁에 모여 그의 영원한 안식을 위한 시편 130장(연도로 알려진)을 통성하여 기도한다. 교황궁내원장이 교황의 손에서 어부의 반지를 빼내어 인장을 해체하면 교황의 궐위가 선언된다. 교황이 세상을 떠났고, 시스티나 성당의 문이 다시 닫혔다. ‘세데 바칸데’는 의전의 공백이 아니라, 질서와 확신, 권위의 중심이 사라졌다는 상징의 선언이다. 영화 <콘클라베>는 이 침묵의 선언에서 시작한다. 전통이란 명목으로 반복되어 온 의례의 시간들, 엄격한 규범과 오랜 신념의 의상 아래 가려진 것은 의외로 ‘결핍’이다. 그리고 결핍은, 균열과 질문의 가능성이다.
교황직의 궐위가 선언되는 순간, 세속과 성속의 시간이 멈춘다. 시스티나 성당은 다시 한번 심연의 예언을 품은 공간으로 변모한다. 로마의 폐허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제 새로운 수장의 영혼을 호출하는데, 이 무대의 서사는 종교가 아닌 권력, 신앙이 아닌 판단, 진리가 아닌 동의(consensus)의 기술을 통해 전개된다. 영화 <콘클라베>는 전통 가톨릭 교회의 어법과 의례를 고스란히 따르면서도, 그 복속된 전통의 거죽을 통해 현대사회의 권위와 확신에 대한 기의적 질문을 던진다. 그 중심에 로멜리 추기경, 영화 속 로렌스(랄프 파인즈)의 개회 강론이 있다.
<콘클라베>는 겉으로는 종교 정치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기득권과 개혁, 절차와 술수, 심지어 음모까지. 그러나 이 영화의 중심에는 훨씬 더 조용한 움직임이 있다. 시스티나의 성화가 내려다보는 엄숙한 공간 안에서, 한 인물—로멜리 추기경(로렌스)—이 혼자 걷고, 기도하고, 듣고, 그리고 말한다. 그의 강론은 단지 콘클라베의 서두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 전체의 기의(記意)를 말없이 관통하는 주석이자 선언이다.
‘세데 바칸테’ 이후의 시선 ― 다양성과 확신에 대하여
그는 콘클라베의 문이 닫힌 순간, 거대한 벽화 아래에 선다. 눈에 띄지 않게 성당 벽화의 눈과 시선을 교차하며, 그는 교회가 잊은 단어를 입에 올린다.
“St. Paul reminds us that God’s gift to the Church is its variety of people and views.”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상기시킨 것은 교회에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은사)이 곧 사람들의 모습과 관점의 다양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설과 영화가 말하고 싶은 방점은 ‘의심 없는 확신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그 앞서 말하는 ‘다양성’이다. 종종 그 장면을, 단지 의심과 확신이라는 고전적 신학 개념의 대립으로 환원시키는 경우가 많다. 거의 모든 비평과 리뷰들은 그 장면을 약속한 따옴표처럼 강조한다. 하지만 로멜리는 단호히 선언한다. 의심 없는 확신의 이유는 교회가 간직해야 할 다양성의 훼손이라는 것을.
“The Church is not the monolith that people think. It has always been a multitude: the Church of Antioch, of Ephesus, of Corinth, of Rome.”
(교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단일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복수체였습니다. 안티오키아, 에페소, 고린토, 로마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들의 신학적·문화적 다양성이 중첩된 공간이었다. 그 안에는 유대-기독교적 전통, 헬레니즘적 사유, 로마법적 질서가 공존했다. 교회는 로마 밖으로 나감으로써 비로소 세계 종교가 되었다. 다시 말해, 교회는 태생적으로 다양성 속에서만 존속 가능한 유기체였다. 그런데 로멜리는 이 다양성에 대해 단순한 교회사적 회고가 아니라 존재론적 근거를 부여한다. 그에 따르면, 다양성은 수용이 아니라 출발점이고, 다양성 속에 진리가 머문다고 말한다.
“It is this variety that has always been our strength, not a weakness to be corrected.”
(이러한 다양성이야말로 교회의 힘이었습니다. 고쳐야 할 약점이 아니라요.)
이는 현대 자유주의 담론에서 말하는 관용(tolerance)과는 결을 달리한다. 그것은 중심에서의 시혜가 아니라, 출발 자체가 비중심적임을, 신학적 정통도 필연적으로 문화와 시간 속에서 ‘다양하게’ 출현함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는 정통의 이름으로 억압해 온 비정통을 복권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통이 애초에 다양성 위에 성립했음을 선언한다.
이 선언은 의심 없는 확신을 비판하기 위한 서막이 아니다. 오히려, 확신을 경계하는 이유로서 ‘다양성’을 수호하겠다는 전략적 태도의 선언이다. 교회사 초기, 데살로니카와 에페소, 고린토의 공동체들은 똑같은 교리를 따르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와 사연을 품었다. 그 ‘variety’야말로 교회를 움직이는 활력이었다. 그 활력으로 지구상 가장 커다란 종교와 신앙의 인구와 교회를 갖게 되었다.
로멜리는 이어서 한숨을 뱉는다.
“The one sin I have come to fear above all others is certainty. Certainty is the great enemy of unity. Certainty is the deadly enemy of tolerance.”
(내가 무엇보다 두려워하게 된 죄는 확신 그 자체입니다. 확신은 일치를 파괴하는 최대의 적이며 관용을 죽이는 치명적 독입니다.)
확신은 자기 동일성만을 강조하며 ‘다름’을 배제한다.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로만 울려 퍼진다면, 그 안에 깃든 무수한 이야기는 침묵당할 테고, 형태론적 variety는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전통주의자들은 1965년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통일된 언어(라틴어)로 기도하던 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트리엔트 미사를 드리며 라틴어로의 유니즌이야 말로 진정한 보편이라 말한다. 이에 대한 비판적 경고가 로멜리의 강론이다.
그렇기에 로멜리는 이어 ‘확신’에 대한 경고를 덧붙인다. 그러나 이 대목은 단순히 확신의 위험을 설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다양성이 진리의 양식이라면, 의심은 그 진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의 절규를 소환한다.
“Even Christ was not certain at the end. ‘Eli, Eli, lama sabachthani?’”
(심지어 그리스도조차 마지막엔 확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로멜리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외침을 통해, 교회가 의심을 회피하는 순간 살아있는 신앙을 잃는다고 경고한다. 신조차 의심 속에서 걸었음을 강조하는 이 대목은, 의심이야말로 신비와 공존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드러낸다. 의심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균열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성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기 위한 필수적 틈새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라 그 불확실성 속에서 ‘붙드는 행위’이며, 이는 교회 또한 제도이기 이전에 신앙 공동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의심은 배교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의 맥박이다.
바오로 서신 곳곳에서 드러나는 ‘은사 다양성’(variety of gifts)은 유일무이한 진리 확신을 넘어, 서로 다른 역할과 은총을 인정했다. 그 다양한 은사들이 한 몸을 구성할 때, 교회는 자기 갱신의 동력을 얻었다. 로멜리의 강론은 이 초기 교회 전통을 되살려, 확신을 경계하며 다양성을 수호하라는 ‘초대 교회의 지혜’를 끌어온다.
교회 안의 다양성(variety)에서 교회 밖의 다양성(diversity)으로의 진보
철학자 알튀세르는 ‘사회적 장’ 안에 배어 있는 불문율을 폭로하라 했다. 로멜리의 강론은 바로 이 지점을 겨눈다. 교회라는 장(場) 안에 다원적 목소리를 들여야만,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규율과 편견이 드러나고 해체될 수 있다. 다양한 주체가 서로 마주할 때, 공동체는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된다.
현대 사회학자 뒤르켐은 통합과 분화가 동시에 작동해야 집단이 유지된다고 보았다. 단일성만 추구하면 권위주의가 되고, 무조건적 다양성만 강조하면 난마처럼 얽혀 균열만 커진다. 로멜리의 메시지는 이 둘 사이를 조율하는 중도적 원리를 제시한다. 의심은 다양한 목소리를 품는 윤리이며, 그것이야말로 참된 포용의 출발점이다.
다양성이라는 영어 표현은 두 가지가 있다. ‘variety’와 ‘diversity’. ‘variety’와 ‘diversity’는 중요한 분기점을 가진다. 전자가 공동체 내의 역할과 목소리, 구조 안에서의 차이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공동체 바깥의 타자성, 즉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존재를 포함하는 윤리를 의미한다. 로멜리의 강론은 명백히 ‘variety’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diversity’로 이어져야 한다는 내적 당위를 품고 있다. 가톨릭이라는 체계 안의 다양한 견해의 공존에서 더 나아가, 아예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급진적 요청이 그 말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이 여정의 끝에 베니테스(카를로스 디에스)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는 제3세계(영화는 멕시코, 소설은 필리핀) 출신으로, 서구 중심적 교회 질서에서 주변에 머물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도전을 끝내 열어준 이가 바로 아그네스 수녀(이사벨라 로셀리니)다. 여성 수도자, 더욱이 제도교회에서 제대로 발언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존재. 이 소외된 이들의 손이, 확신의 사슬을 끊고, 다양성의 문을 연다.
'빈자리'가 주는 열린 희망의 가능성
영화는 이를 통해 말한다. 다양성은 장식이 아니라 선택의 기준이며, 확신은 그 다양성을 덮는 깃발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무는 겸손한 불안이다. 로멜리의 강론은 바로 그 통로를 연다.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심판의 벽화 앞이었다. 선과 악의 구별, 권위의 낙인, 천사와 악마가 나뉘는 그 상징적 장소에서 그는 말했다. “의심 없는 확신은 신앙이 아니다.” 그 말은 시대를 관통하는 고백이며, 이 영화가 종교의 껍질 안에서 발화하는 가장 세속적이고도 성스러운 외침이다.
확신이란 타자의 입을 막는다. 자기 동일성의 결박 안에서만 진리를 말하게 만든다.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이 자기 의심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두는 오만이다. 로멜리는 가장 단호하게, 예수조차 마지막 순간 의심했다고 말한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하느님마저 그를 떠났다고 느끼던 순간의 절규는, 오히려 신성의 깊이를 드러낸다. 확신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과 버림 속에서 진짜 신앙이 움튼다. 의심은 파괴가 아니라, 타자의 자리를 열어두는 신학적 공간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제시하는 이 강론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로멜리는 직접적으로 교황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길을 비워주는 조력자로 작동한다. 다양성을 제도의 중심에 세우기 위해 그는 자신이 권력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교황으로 선출되는 이는 베니테스 추기경. 제3세계 출신, 문화적 아웃사이더, 제도적 소수자. 그리고 그 선출의 결정적 순간, 그를 돕는 이가 여성 수도자 아그네스 수녀다. 로마 가톨릭 내에서 제도적 발언권이 철저히 차단된 이 존재는, 가장 결정적인 전환의 문을 여는 숨은 키로 기능한다.
<콘클라베>는 한 명의 교황을 뽑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빈자리’라는 상징 속에서,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어떤 차이를 견뎌낼 수 있는지, 어떤 의심을 사랑할 수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다. 세데 바칸테로 돌아가 보자. 공석 선언의 그 순간, 무게는 균열로 전환되었고, 균열은 곧 틈새를 제공했다. 틈새는 의심과 다양성을 위한 공간이 되었으며, 그 공간에서 교회는 다시 숨을 쉬었다. Variety라는 표면 아래, Diversity라는 심연을 향한 여정이야말로 <콘클라베>가 던진 진짜 질문이자,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신학적·사회학적 사유라 할 수 있다. 로멜리 추기경의 강론은 그 물음의 전부를 품고 있다. “확신을 두려워하라”는 말은 그 자체가 폐쇄가 아니다. 오히려, 존재론적 다양성(diversity)을 향한 용기의 다른 이름이다.
수직 권위와 수평 균열, 그 사이의 믿음
거대한 성당의 수직 구조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다. 치솟은 기둥, 고딕 아치, 금빛 문과 회랑, 마치 하늘을 향한 강박처럼 솟은 돔. 이 수직성은 단지 건축미학을 넘어, 전통적 가톨릭 교회가 중첩해 온 계급과 권위의 층위를 상징한다. 그곳은 '위'에 더 가깝다는 이유로 더 신성하고, 더 깨끗하고, 더 우월하다는 질서가 명확히 계보를 그려온 자리였다. 기둥 아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동색동형의 우산을 쓴 추기경들이 입장할 때, 그 모습은 하나의 제의, 그리고 권력의 옴니(omni)로 상징화된 전례의 미학이었다. 시리아 정교, 마론 교회, 콥트 교회의 잔존은 포용이라기보다 정치적 구색에 가까웠다. 그 회랑은 누구의 언어였을까. 누구는 말할 수 있고, 누구는 침묵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권위는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그러나 영화 <콘클라베>는 그 완강한 수직성에 비틀림을 가한다. 로멜리 추기경은 시스티나 성당의 정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벽화 앞에서 자주 멈춘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는 의인이나 천사의 시선이 아닌, 지옥으로 끌려가는 자를 낚아채는 악마의 시선과 자주 마주친다. 그 눈 맞춤은 은폐된 양심을 드러내는 고해처럼 깊고 불편하다. 이는 단지 회화적 설정을 넘어서, 로멜리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확신의 근저에 존재하는 균열을 드러낸다. 그는 하느님의 대리자로 호명된 권위의 수직성에 머물면서도, 그 눈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그 시선을 받아들인다. 이는 어쩌면 최초의 회심이다.
영화는 이 수직성의 전복을 물리적 사건을 통해 형상화한다. 콘클라베의 절정, 광장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의 충격파는 시스티나 성당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다. 수직의 제의가 집전되던 그 거룩한 공간에, 바깥 세계의 폭력과 의심, 분노와 공포가 사선으로 들이닥친다. 조명은 일그러지고, 유리 파편은 추기경들의 붉은 수단 위로 비처럼 흩뿌려진다. 영화는 미장센을 통해 말한다. 더 이상 교회는 바깥과 분리된 성역이 아니라고. 그 충격의 여진은 테데스코(세르조 카스텔리토) 추기경의 보수주의적 폭언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베니테스 추기경의 감동적 연설로 반전된다. 이는 미학적 클라이맥스이자, 영성적 전환의 순간이다. 진리는 더 이상 고요하고 웅장한 아치 위에 있지 않다.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흩어졌고, 모두의 어깨 위에 떨어진다.
로멜리의 야망은 그 붕괴 앞에서 낱낱이 드러난다. 벨리니(스탠리 투치) 추기경은 그를 향해 말한다. 야망은 거룩함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과 같다. 로멜리는 자신이 교황이 될 수 없음을, 되어서도 안 됨을 안다. 그러나 그는 선대 교황이 남긴 설계, 즉 야망을 가진 이들을 드러나게 하는 장치 속에서 의도치 않게 기도하는 자가 아닌 '매니저'로 자기 다짐한다. 결국 그는 교황이 되지 않지만, 교황 선출을 관장하는 추기경단장의 자리를 끝까지 지킨다. 역설적이다. 선대 교황의 비워진 자리(sede vacante)는 그 자체로 충만한 메시지였다. 하느님의 자리는 사람이 채울 수 없다는 선언.
그 와중에 아그네스 수녀는 가장 침묵하는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로멜리의 양심을 자극하고 교회가 잊은 존재론적 다양성을 환기시키는 숨은 도전자였다. 그녀는 여성 수도자로서 교회의 권위체계 밖에 있지만, 그럼에도 정직하게 기도하고, 고해를 받아들이고, 진실을 말한다. 그녀는 기타 등등이다. 계보에도, 경당에도, 교리서에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존재. 그러나 바로 그런 존재들이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는 최초의 증인이 된다.
우리는 너와 나 사이의 '기타 등등'을 포함
최근 총리 후보의 '차별 금지법 반대'에 대한 의견들이 뜨겁다. 진보의 영역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소구 하는 정치인이 종교적 신념이라는 이유로 소신을 확신한다. 이런 편향적 종교 신념은 대한민국의 가장 복잡하게 구겨진 면이다. 아무리 성경말씀을 들이댄들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은 절대로 예수의 복음이 아니다. 자신들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묶어 세력화하고자 하는 거룩함의 가면을 쓴 욕망의 나방일 뿐이다. 이 구분과 가르기의 확신에는 의심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심 없는 믿음은 가짜다. 의심 없는 확신은 다양성을 거부하며 한 편에 서기를 서슴없이 결정한다. 그 결정 뒤에는 늘 증오가 버티고 있다. 증오에 굴복하면 한편에 선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복음을 등진 셈이다.
'다양성'이란 무엇인가. 단지 다양한 형태와 색, 전례와 의식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와 존재의 본래성, 하느님이 창조한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신학적 선언이다. Variety가 양태의 다양성이라면, Diversity는 정체 그 자체의 인정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Variety의 전시에서 Diversity의 고백으로 나아간다. 확신이 신앙의 기둥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불확실성과 침묵, 사이(between)의 여백이야말로 성령이 머무는 장소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기타 등등’이라는 말에 스스로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분류할 수 없는 자들, 규격 밖의 존재들, 표본에서 탈락한 예외들. 사회는 이들을 ‘ETC’로 묶는다. 존재가 아닌 부속으로, 주어가 아닌 여백으로. 제도는 필연적으로 중심과 비주류를 설정하고, 표준과 오차범위를 나눈다. 그렇게 우리는 예측 시스템이 선호하는 가시성과 질서에서 탈락한다. ‘기타 등등’이란 이름은 그것의 증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 이름이 우리를 구원한다. 하느님은 주류의 언어로 인간을 부르지 않는다. 하느님은 ‘기타 등등’이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고유함을 기억하신다.
현대 사회는 ‘최적화된 질서’라는 허상을 좇는다. 알고리즘은 효율을 위해 편향된 확률을 반복하고, 행정은 규율과 기준으로 인간을 압축한다. 거기서 빠진 사랑, 예외, 실패, 모순은 모두 ‘기타’의 영역으로 버려진다. 그러나 바로 그 기타, 그 무정형의 여백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동일하지 않음, 조화가 아닌 충돌, 하나 됨이 아닌 나란함의 정치. 로멜리가 말한 다양성은 이기적 분절의 다발이 아니라, 불완전한 고유성들의 나란함이다.
파편화된 시대의 진짜 공동체는, 확신 사이에 열린 틈에서 시작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답이 아니라, 함께 ‘묻는’ 존재로 부르셨다.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 그게 바로 성소다. ‘기타 등등’이란 말은 이제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정직한 고백이자, 타자를 향한 열린 인사다. 당신도 나도, 모두 다 ‘기타’라는 이름으로 아름답다.
우리 모두는 기타 등등이다. 그 기타 등등이 교회의 중심으로 걸어 나올 때, 비로소 성령은 수직의 돔에서 내려와, 모두의 어깨 위에 살포시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