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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공포 영화, 백주대낮의 악몽 속에서

하지에 다시 보는 영화 <미드소마> 리뷰

by 박 스테파노

크리스티안(잭 레이너)은 인류학과 박사 과정 중이다. 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그는 동료 조시(윌리엄 잭슨 하퍼), 남성 우월주의 성향이 짙은 마크(윌 폴터), 그리고 스웨덴에서 온 교환학생 펠레(빌헬름 블론그렌)와 함께 스칸디나비아의 외딴 마을로 여름휴가를 겸한 조사를 떠난다. 펠레의 선조들이 살던 이 마을은 ‘헬싱글란드(Hälsingland)’라는 이름을 지닌, 숲과 들판이 얽힌 고요한 공동체다. 크리스티안의 여자친구 대니(플로렌스 퓨) 역시 동행하게 된다. 가족 전체를 한꺼번에 잃는 비극을 겪은 대니에게 이 여행은 어쩌면 탈출이자 회복을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그들이 도착한 호르가 마을은 90년에 한 번씩 여름의 정점을 기리는 미드소마(하지) 축제를 연다. 이 축제의 정화 의식은 공동체의 삶을 관통하는 순환의 사유를 바탕으로 하며, 축제의 절정에는 꽃기둥 '메이폴(Maypole)'을 중심으로 춤을 추며 ‘5월의 여왕’을 뽑는 경연이 치러진다. 초대한 이는 있었지만, 환대는 늘 단순하지 않다. 여섯 명의 일행은 각자 다른 목적을 품은 채 이 낯선 땅에 발을 딛고, 마을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풍경과 의례에 노출되기 시작한다. 크리스티안은 논문을 위한 자극을 얻으려 하고, 조시는 연구자의 윤리를 시험받는다. 마크는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무례함을 감추지 못하고, 대니는 무너진 마음을 이 공동체에서 다시 붙들 수 있을지 모른 채 잠겨든다.


도피이자 탈출을 도모하는 답사 여행. A24스튜디오



낯선 것들의 공포, 밝음 속에 깃든 어둠


<미드소마>는 익숙한 공포의 문법을 거스른다. 영화는 고전적인 호러 장르에서 흔히 기대되는 어둠과 폐쇄된 공간, 음산한 배경 대신, 새하얀 리넨 복장을 한 사람들, 광활한 풀밭 위의 목조건물, 그리고 밤이 오지 않는 백야의 풍경 속에서 공포를 전개한다. 하늘은 하루 내내 푸르르고, 공간은 탁 트여 있으며, 자연은 생명을 기리는 듯한 찬란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의식과 상호작용은 관객을 점점 더 낯선 감각으로 몰아넣는다.


호르가 마을은 시공을 벗어난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상 대대로 이어진 규범과 공동체적 질서, 고대 북유럽 신앙의 흔적들이 얽힌 삶은 현대인의 시선으로는 불편할 만큼 생경하다. 그들은 정해진 나이에 자발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낯선 자에게 경계를 품되 겉으론 부드럽다. 무엇보다도, 낮의 밝기조차 공포를 삼키지 못한 채, 오히려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둠 없는 공포, 침묵 없는 긴장은 관객에게 이질적인 불안을 선사한다.


이 영화에서 공포는 외부의 위협이라기보다 내부의 혼란에서 비롯된다. 낯선 공동체의 규율은 우리 안의 윤리를 시험하고, 공동체의 포용은 이기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통제할 수 없는 리듬은 자아의 균형을 흐트러뜨린다. 결국 관객은 묻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그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 지나친 밝음이 더 두려워지게 된다. A24스튜디오



두려움은 예측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것에 공포를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쫓긴 커다란 개가, 다른 이에게는 귀신, 전염병, 혹은 소름 끼치는 기묘한 침묵일 수 있다. 예전 대여한 비디오에서 앞부분에 나왔던 ‘호환, 마마, 전쟁보다 무서운 불법 비디오’라는 문구처럼, 두려움은 시대와 감각, 개인의 경험에 따라 변주된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이 통제 불가능성과 예측 불가함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메르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 갑작스러운 죽음, 무기력한 무명(無名)의 고통들은 모두 대응할 수 없는 사태 앞에서 발생하는 공포다. 인간은 통제할 수 없을 때 불안해하고, 미래를 가늠할 수 없을 때 공포에 잠긴다. 그것이 생존 본능에 각인된, 뿌리 깊은 반응이다.


예측 불가능성은 통제력 상실과 직결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곧 ‘대처할 수 없음’을 뜻하고, 그 앞에서는 어떤 확률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불안과 공포는 그렇게, 서서히 심연처럼 사람의 일상에 스며든다. 영화 <미드소마>가 보여주는 공포도 이와 같다. 그곳의 모든 것은 너무나도 '밝고 평화롭기에' 더더욱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더 두렵다.


공포는 반드시 어둠 속에 있지 않다. 때로는 가장 눈부신 풍경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밝아서 더 무서운 낯섦.A24스튜디오


두려운 낯섦(Das Unheimliche)


정신분석학의 거장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19년, 섬뜩함에 관한 에세이 「두려운 낯섦(Das Unheimliche)」을 발표했다. 그는 ‘두려운 낯섦’을, 원래는 숨겨져 있어야 할 것이 뜻밖에도 드러나면서 발생하는 불안과 공포의 감정이라 정의한다. 이미 익숙한 세계에서 불쑥 드러나는 기이한 균열. 그 정서가 우리를 휘감을 때, 그것은 공포보다 깊은 차원의 정서적 동요를 일으킨다.


프로이트의 글은 종종 그 문장 하나를 여러 번 되읽게 만들 정도로 장벽이 높다. 때문에 이 이론 전체를 낱낱이 설명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개념을 조금 쉽게 풀어보자면 이렇다. 인간은 일상을 살아가며 다양한 경험과 정보 속에서 끊임없이 '예감'하고 '예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 예감이 실현될 것이라 믿는다. 예상이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갖게 되고, 이 통제감은 곧 정신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핵심이 된다.


하지만 그 예상이 무너질 때, 익숙하던 풍경이 낯선 방식으로 재배열될 때,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휘청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려운 낯섦’이 발현된다. 그것은 단순히 놀람이나 놀라움이 아니라, 정신의 내적 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멘붕'에 가까운 감정이다. 이 불쾌한 낯섦은 단순히 경험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그것이 인간의 억압된 욕망, 은밀한 믿음과 결부된 감정이라 보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마땅히 일어나리라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상상조차 못 했던 방식으로 현실이 펼쳐질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불일치의 생소함, 그것이 낯설고도 두렵다.


프로이트는 이 감정을 추적하며 고대의 정령 사상(Animismu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령 사상은 모든 자연과 사물에 인간과 유사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이 믿음은 생각의 전능성, 곧 마음먹은 대로 세계를 조작할 수 있다는 믿음에 가까웠으며, 마술의 원리나 주술적 사고 역시 이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고대인들은 인간적 덕목과 악덕, 욕망과 금기를 인간 형상의 존재들뿐 아니라 자연과 무생물에게까지 부여했다. 인간 외부의 세계는 실은 인간 내면의 그림자 투사였던 셈이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벽화. 모든 내용을 모아 담았다. A24스튜디오


이러한 신앙 체계 속에는 고대인의 무한한 자기애, 곧 나르시시즘이 녹아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와 질서 속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거기에 절대적 진리를 부여했다. 그러니 두려운 낯섦은 실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낯섦이란, 익숙했던 것의 위장이 풀려 드러나는 내면의 그림자이며, 두려움이란, 그 그림자를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을 때 솟아오르는 정서의 진동이다.



낯선 공포, 익숙해질 때의 위협


<미드소마>는 종종 “가장 밝은 공포영화”라 불린다. 이 수식은 단지 스웨덴의 백야 풍경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는 어둠과 피, 갑작스러운 비명으로 공포를 조장하지 않는다. 아리 애스터 감독은 신체적 위협이나 고통이 아닌, 심리적·감정적 동요를 통해 공포의 깊이를 탐색한다. 그것은 차라리 빛의 공포, 밝음 속에 감추어진 기묘한 균열이다.


낯설고 아름다운 밝음. A24스튜디오


영화는 큰 상실을 겪은 한 여인, 대니(플로렌스 퓨)의 내면에서 출발한다. 가족 전체를 잃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침묵 속에 놓인 그녀는 남자친구 크리스티안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스웨덴 출신의 펠레와 함께 호르가 마을로 향한다. 그곳은 백야가 지속되는 한여름, 하지 축제를 치르기 위해 문을 연 공동체다. 밝고 평화로운 들판, 흰색 리넨의 사람들, 자연과 가까운 삶, 그리고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의식들이 이어지는 장면들은 첫눈에 목가적이고 심지어 이상향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건,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또 다른 질서의 얼굴이다.


애스터 감독은 이 하지 축제를 단순한 배경이나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종말론적 의례로 구축한다. 축제는 문명의 이성과 감정이 해체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한 여인이 절망을 지나 공동체에 흡수되고, 스스로 공동체가 되는 과정을 목격한다. 대니는 외로움과 상실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으로 또 다른 공동체를 선택한다. 이전 공동체에서는 단 한 번도 지녀보지 못했던 위상과 권위를 획득하면서, 그녀는 낯선 문명의 중심에 선다.


모든 것이 낯설다. A24스튜디오


호르가 마을은 모든 것이 낯설다. 사람들의 언행뿐 아니라 음식과 의식, 그리고 시간마저도 이질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사계절에 대응해 여든 해를 네 구간으로 나눈다. 0세에서 18세는 봄, 18세에서 36세는 여름, 36세에서 54세는 가을, 그리고 54세에서 72세는 겨울이다. 이 ‘계절의 나이’를 지나면, 마을은 스스로의 전통에 따라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 이 죽음은 외부인의 시선으로는 엽기적이고 반인륜적이지만, 그들에겐 숭고하고 성스러운 ‘리투르기아’(liturgia), 곧 신성한 예식이다.


그들의 의식은 어떤 강압이나 공포 조장이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고도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그 느린 호흡 안에서, 처음에는 거부감으로 다가왔던 장면들이 점차 관객의 인식을 뒤흔든다. 공포는 더 이상 폭력의 장면이 아니다. 낯섦이 점차 익숙해지고, 익숙함이 무감각으로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공포는 본색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의식의 기괴함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그것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마음에서 자라나는가? <미드소마>가 보여주는 가장 섬뜩한 진실은, 공포의 진짜 주체는 마을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오랜 관습을, 공동체의 방식으로 반복할 뿐이다. 진짜 두려움은, 그 관습을 낯설게 보던 이가 그것을 점차 내면화해 가는 과정, 그 수용과 동화에 있다. 대니가 공동체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여정은, 그래서 단순한 ‘극복’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의 상실을 대체할 새로운 권력을 얻는 길이며, 스스로의 고통을 지워나가는 ‘변신’이다.


낯선 두려움은 때로,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조용히 침투한다. 낯설었던 것이 편안해지고, 기이했던 것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 세계는 비로소 공포의 진가를 드러낸다.


종종 익숙함이란 이름으로 조용히. A24스튜디오



낯설게 하기로 얻어진 공포의 사회학


2019년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 이른바 ‘코로나19’는 단순한 감염병이 아니라 전 지구적 공포의 파동이었다. 그 요란함은 단지 언론의 과잉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혹여나’ 하는 불안에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고, 누군가와의 접촉은 곧 위험이 되었다. 마스크는 의무 이전에 의식이 되었고, 타인의 기침 한 번에도 공동체 전체가 움찔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단지 요란한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은 실제로 불안을 느꼈고, 미디어와 뉴스를 매일같이 들여다보며 두려움 속에 자신을 조율했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 두기는 미덕이 되었고, 접촉은 회피의 대상이 되었으며, 눈빛조차 경계의 무기가 되었다.


감염의 증상은 익숙하다. 열, 기침, 통증, 콧물. 대부분은 충분한 휴식과 영양 섭취, 약물 복용으로 회복된다. 그렇다. 회복이다. 그러나 그 ‘회복’을 ‘치료’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치료라기보다 자연적 완화와 복원에 가까운 개념이다. 몸이 나았다는 감각은 곧 우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착시를 낳는다. 코로나19 역시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기저질환군에게는 치명적이었지만, 전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의 괴질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경미한 호흡기 증상으로 끝나는 ‘강한 감기’의 범주에 머무는 감염 질환이었다. 물론 초기 치사율은 2.5% 내외로 보도되었지만, 이는 고령층과 기저질환자 중심의 통계였고, 대규모 응급관리 체계 속에서 응축된 수치였다.


이는 계절성 독감과 유사하거나 그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 수치에 ‘불확실성’이 더해졌을 때, 바이러스는 더 이상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공포의 기호가 되었다. 지금에 와선 치명률은 대부분 독감 수준으로 낮아졌고, 전 세계는 그 위험을 질병보다 관리의 차원에서 다루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감정의 잔재는 남아 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걸까?


그 실마리는 그보다 앞선 사례, 즉 중동에서 유입되었던 메르스(MERS)에서도 찾을 수 있다. 메르스는 코로나보다 훨씬 높은 치사율과 예측 불가능한 전파력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위협보다, 낯선 위기 앞에서 더 크게 흔들린다. 증상은 유사했지만, 당시에는 정보도 부족했고 치료 시스템도 허술했기에 사람들의 공포는 통제불능 상태로 치달았다. 감기와는 전파력과 치명도가 달랐지만, 일반 시민에게 문제는 바이러스의 실체보다 그 ‘정보 없음’이었다. 불충분한 데이터, 소문과 의심,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언어의 확산이 불안의 주파수를 높여 갔다. 공포는 생물학적이기보다 사회적이었다.


코로나19의 초기 공포 역시 이러한 과거 경험의 잔상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열과 기침, 통증이라는 감기와 유사한 증상이 있었고, 확진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이뤄졌다. 인간은 고통의 경중보다는, 그것을 얼마나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느냐에 따라 공포의 크기를 다르게 느낀다. 그렇기에 감염병의 사실과 감정은 늘 분리되어 분석되어야 한다.


정보의 비대칭은 두려움의 이유가 된다. A24스튜디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간다. 이 일상이란 것이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패턴이라면, 동시에 느슨한 안정감 속에 긴장을 흡수하는 완충지대이기도 하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사람과 만나고, 정해진 공간을 오가는 일상은 예측 가능하기에 편안하다. 그러나 이 일상이 무너지거나, 그 안에 낯선 요소가 침투하게 될 때, 사람은 자신감을 잃고 불안에 휩싸인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거나, 정보는 있으나 맥락이 낯설면, 불확실성은 증폭되고 공포는 빠르게 번진다.


우리의 두려움은 결국 ‘정보 없음’에서 비롯된다. 통제가 불가능해진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은 무력해지고, 그 무력은 두려움으로 변한다. 여기에 근거 없는 소문, 익명의 정보, 악의적인 조작이 더해지면 공포는 한순간에 집단적 혼란으로 증식한다.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체념조차, 더는 농담이 아니다.


낯선 세계에 마주한 인간은 그 공백을 상상으로 채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언제나 실체보다 훨씬 더 기괴하고 불안하다. 낯설게 함으로써 공포를 창출하는 방식은 감염병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는 종종 이런 감정의 진공 상태를 이용하고, 정치와 미디어는 그 틈을 비집어 구조화한다.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정보 없음’의 어둠 속에서 얼마나 조용히 버틸 수 있는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낯설게 하기로 얻어진 공포의 사회학


영화 <미드소마>는 이러한 감정의 구조를 정교하게 역설한다. 대낮의 공포라는 역전된 장르 문법, 아름다운 풍경 안에서 서서히 조여 오는 심리적 균열, 그리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반복되는 의식의 낯섦. 주인공 대니는 큰 상실을 안고 ‘호르가’라는 마을의 하지 축제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통상적인 감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동체의 논리와 예식에 천천히 스며든다. 기이하고 불편한 의식들은 낯설다. 그러나 영화는 그것들을 결코 급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차분하고 반복적으로, 그러니까 일상처럼 흘러간다. 관객은 어느새 그 낯선 질서에 감응하며, 도리어 기존의 감각을 의심하게 된다.


공포의 기호들. A24스튜디오


이 불안의 정체를 들여다보면, ‘낯섦’이라는 단어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은 일상의 생명체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는 반복의 질서 속에서 안정을 얻는다. 익숙함은 보호막이 되고, 습관은 위로가 된다. 그러니 가끔 예고 없이 등장하는 낯선 상황은, 예측 불가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공포가 된다. 낯선 의식, 낯선 공간, 낯선 사람. 이것들이 본질적으로 위협적이기보다는, 그것들을 이해하고 다룰 정보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사람을 두렵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포의 원인’이 아니다. 호르가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제도가 엽기적 이어서만도 아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는 시선, 그 안에 자리한 가치관과 사고방식, 그리고 의식. 영화의 종말은 대니가 그 세계에 완전히 편입되는 순간, 공포가 완성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도대체 무엇이 낯설어진 것일까? 아니, 우리는 무엇을 낯설다고 여기고, 무엇에 면역력을 잃어버린 걸까? 공포는 단지 병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신뢰가 무너졌을 때, 익숙하던 풍경이 뒤틀릴 때, 정보가 사라지고 믿음이 조롱당할 때 공포는 물처럼 스며든다.


믿음이 조롱 당할 때 공포는 스며든다. A24스튜디오


오늘의 공포는 낯설게 보이는 타인이 아니라, 그 타인을 이해하려는 사회적 상상력이 고갈된 자리에서 태어난다. 결국 낯섦의 공포를 잠재우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신뢰’다. 믿을 수 있는 공동체, 책임지는 권력, 투명한 언어와 반복 가능한 질서. 이것들이야말로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불신과 공포의 전염을 막을 백신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한다. 일상은 고요하지만 강하다. 오늘도 문을 열고, 누군가를 마주하고, 눈을 맞추며 나누는 말과 손짓 하나하나가 낯선 것들과 타협하고 접촉하는 장이다. 그렇게 우리는 ‘정보 없음’의 세계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때론 적응하고, 때론 다시 거부하며 살아간다.


일상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면역이다. 그러니 오늘도 반복되는 하루가 결코 작지 않다. 낯선 두려움이 우리 안에 침투하려 할 때, 바로 그 일상이 방패가 된다. 그리고 그 일상은 오직 ‘신뢰’라는 사회적 항체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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