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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시간은 아들의 시계에는 흐르지 않는다

HBO 드라마 <석세션> 리뷰

by 박 스테파노

회색빛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고요히 서 있는 로건 로이(브라이언 콕스)의 얼굴은 거대한 신전의 파사드 같다. 그러나 그 신전은 속이 텅 비어 있다. 바깥바람만이 차갑게 속삭일 뿐이다. HBO 드라마 <석세션(Succession)>은 권력이라는 망루 위를 타고 내리는 균열과, 그 균열 뒤에 숨은 고전적 전형 -가부장적 군주, 선택받은 후계자, 배반과 귀환-을 동시에 드러낸다.


드라마의 서사 구조는 권력의 세습과 파괴, 가족 내 갈등과 배신, 인간적 허위와 자기기만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모티프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셰익스피어 비극, 토마스 만의 몰락 서사, 뚜르게네프의 세대 갈등, 탕자 비유와 종교적 상징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얽히면서, 오늘날 MZ세대와 기성세대가 맞닥뜨린 크로노토포스적 충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서사가 던지는 궁극적 질문은 “어른이 사라지는 시대에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 시간을 채울 것인가”라는, 시대의 소명이 되어간다.


세 시즌을 엮어낸 HBO 드라마 시리즈 <석세션> 포스터. HBO, 쿠팡플레이


가부장의 불안, 지배의 실패


로건은 스스로를 ‘제국의 기둥’이라 칭하지만, 그 기둥은 이미 속이 썩어 문득 무너질 것 같다. 그는 거대한 이사회 테이블의 중심에 앉아 후계자를 지명하겠다고 선언한다.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리어 왕>의 광야 위에 서 있는 듯하다. 마치 셰익스피어 비극의 현대적 변주처럼 시작된다. 독자적인 왕국을 물려주려는 노회한 거물은, 결핍된 야망을 품은 자식들을 린다 고프의 쇼트렌즈처럼 불러 모은다. 그러나 그 무대는 곧 회의실이자 군중석이자, 차갑게 깔린 이사회 룸 바닥이 되었다가, 다음 순간엔 흔들리는 요트 위로 이식된다.


회의실의 커다란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형광등 불빛, 벽에 걸린 초상화 너머로 비치는 유리창 너머의 빌딩 숲. 로건은 그곳에 앉아 후계자를 지명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자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리어 왕> 속 리어가 딸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요구하던 장면처럼, 로건도 자식들에게 ‘충성의 서약’을 요구한다. 그 순간 잠시 귀 기울여 보자.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베토벤 현악 4중주는 고전적 장엄함을 품고 있지만, 곧 곡조가 깨지고 비트가 바뀌며, 이 서사가 비극을 넘어 ‘비극의 반복된 해체’임을 직감하게 한다. 리어가 딸들의 경솔함을 깨닫기보다 늦게 분별력을 잃듯, 로건도 권좌라는 가면 너머 자신이 만든 셈법 속에 갇혀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리어가 딸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요구하며 파멸을 향해 걸음을 옮겼듯, 로건도 자식들에게서 진정한 충성을 끌어내지 못한다. 자식들은 회의실을 떠나 요트 위로, 다시 빌딩 숲 속으로 흩어지지만, 권력의 허상은 그가 딛고 선 모든 공간을 이미 비워 버렸다. 공간이 겹겹이 교차할 때마다 우리는 <리어 왕>의 후광 아래 서 있음을 재확인하지만, 이야기가 나아가는 방향은 고전적 전개가 아닌 ‘비귀환의 유희’다. 리어가 세 딸의 충성을 시험하며 스스로 길을 잃듯, 로건 로이도 아들·딸에게 던진 질문을 통해 자신이 만든 질서가 무너졌음을 자각한다. 그 순간, ‘가부장’은 더 이상 굳건한 신이 아니며, 남은 것은 권력의 공허함뿐임을 깨닫는다.


로건 로이는 자녀들이 서로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죽어도 완전히 죽은 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사진: 피터 크레이머 / HBO 제공


로건은 더 이상 군림하는 신이 아니다. 그가 축조해 올린 제국에 스스로 얽매이고, 지키려는 권위가 곧 주저앉을 것임을 예감한다. 셰익스피어가 비극적 운명을 빚어냈던 그 언어들은 이 세계에서 ‘회귀 없는 몰락’으로 고스란히 변주된다. 그는 뿌려진 밑거름 위에 자식들이 든든히 자라나길 바랐지만, 그 뿌리는 이미 말라 기울어져 버렸다.



죽음과 부활 없는 아들


둘째 아들이자 실질적 장남인 켄달 로이(제레미 스트롱)는 햄릿과 아트레우스 가문이 오롯이 얽혀 있는 현대판 비극적 후계자다. 그는 가문의 부패를 폭로하려 자살을 모의하고, 실패 후 더욱 절박하게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다. 햄릿이 “to be or not to be”의 내면적 고뇌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면, 켄달의 고백은 결국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의 내면에 그림자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켄달이 복도에서 얇은 흰 가운을 입고 술기운에 흔들리는 장면은 마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속 톰과 같다. 세습해야 할 무게를 과도하게 짊어진 채,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번민한다. 토마스 만이 묘사한 ‘몰락하는 부르주아의 초상’이 오늘날 미디어 제국의 상속자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진실을 둘러싼 미생(未生)의 존재적 사유를 환기시킨다.


복수와 자기 회의 사이에서 무너지는 비극적 지식인 햄릿의 외양을 지닌 켄달은, 아버지를 넘어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지만 결국 그의 자기 인식이 새로운 오이디푸스적 운명을 잉태한다. 리어 왕에게 진심을 품었으나 권력을 얻지 못하는 코델리어처럼, 켄달도 아버지를 사랑하면서 반역을 도모하는 굴레를 쓴다. 고전 속 인물들은 진실을 말하거나, 진실에 도달하거나, 진실을 견디는 자들로 존재의 비극성과 언어의 무력함, 가족과 권력의 얽힘을 드러낸다. 이들은 모두 질문을 남기고 사라지는 자들이며, 우리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의 형상이다.


켄달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그가 우리 내면의 햄릿과 코델리어를 호출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Nepobaby(금수저)일지라도. 제공 HBO


“I’m not a killer”라는 선언은 자기 구원도, 아버지의 몰락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는 바다를 응시하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허망함을 뼛속 깊이 체감한다. 마지막 장면은 구스타프 아센바흐가 물가에서 숨을 거두던 순간을 연상시키며, 선택받은 자의 메마른 자의식을 상징한다. 켄달은 칼끝을 자신에게 겨누었지만, 그 칼날은 자신을 깊숙이 찌른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지닌 기대와 면죄부를 모두 허물어버린다. 토마스 만이 묘사한 ‘몰락하는 부르주아의 초상’은 이렇게 최신 미디어 제국의 상속자로 이어진다.



레이디 맥베스의 허상과 비극


이미 언급한 서사는 곧 셰익스피어로 향한다. 시브(사라 시누크)는 레이디 맥베스의 그림자를 현대에 불러낸 인물이다. 그녀는 남편 톰(매슈 맥퍼딘)을 ‘권력의 사다리 중 하나’로 삼아 자신의 내면에 깃든 야망의 전장으로 내닫는다. 그러나 맥베스가 던전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에도 마음속 공허를 감추지 못하듯, 시브도 자신이 짓이기는 권력이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와 자신을 빛바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브와 톰의 관계는 권력의 결탁이 아니라 ‘소멸된 연대’의 역설이다. 톰이 회심을 거쳐 은밀히 로건에게 칼끝을 겨누는 순간, 우리는 딱딱한 궁정 복도에서 벌어지는 암투의 비극성보다, 그 비극을 향유하는 희극적 아이러니에 주목하게 된다. 맥베스 부부가 던진 칼끝은 희극의 웃음 속으로 사라지듯, 시브와 톰이 획득한 권력도 곧 스스로 만든 무덤으로 돌아온다. 권력을 쟁취하는 신화는 이들에게 희극적 아이러니로 작용하며, <맥베스>가 그려낸 ‘야망의 무덤’이 이 공간에 피어나는 순간이다.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피가 아니라, 스스로를 향해 번뜩인 허무라는 참혹한 사실이다.


시브의 야망은 레이디 맥베스적 서늘함을 닮았지만, 맥베스가 되지 못한 채 반복되는 좌절 속에서 파멸을 맛본다. 아버지에게 충성하면서도 자신만의 정의를 고수하는 여성형 주인공의 모습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소환한다. 시브는 남성 중심 세계에서 스스로의 윤리와 권력을 동시에 쟁취하려 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그녀는 로건 로이라는 절대적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초국적 기업 왕조의 후계 구조에 도전하지만, 내부로 진입하려 애써도 계속해서 외부에 머문다. 결정적 순간마다 진입을 거부당하거나 스스로 입장을 유보하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처럼 그녀는 남성 중심 세계에 ‘입회’하려 하지만, 결국 경계선 위에 멈춰 선다.


딸 시브는 남자가 되고픈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투쟁은 의미를 상실한 채 부유하고 만다. 제공 HBO


안티고네는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 윤리와 가족의 도리를 선택하며 비극적 주체가 되었다. 그녀의 선택은 절대적이었고 되돌릴 수 없었다. 시브는 훨씬 더 복합적인 윤리적 입장을 취한다. 페미니스트적 이상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회사 권력 안에 진입하려다 자신도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그러나 그 반복은 애매하며, 결정적 순간마다 선택을 유예하거나 타자에게 위임한다. 시브 로이는 안티고네의 현대적 잔향이자 왜곡된 유산이며, 윤리적 선택 대신 생존 전략이 요구되는 자본주의적 비극의 여성상이다.



광대의 아이러니, 진실의 목소리


로만(키에란 컬킨)은 셰익스피어 광대의 음영을 이어받았다. 그는 <리어 왕> 속 광대처럼 진실을 농담으로 전하지만, 그 농담조차 누구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코리올라누스적 충성이 사라진 시공간에서, 로만의 위트는 순간의 해방일 뿐, 곧 잔인한 무관심 속으로 스며든다. 아무도 그의 농담 뒤에 숨은 고통을 읽지 못한다. 로만은 ‘아이러니의 위치’를 애써 즐기려 하지만, 그 위치마저 자꾸만 흔들린다. 그는 텅 빈 자신을 채울 다른 무엇을 찾으려 하지만, 거울은 언제나 빈 칸만을 반사한다.


“진정한 권력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나타난다”라는 그의 나직한 속삭임은, 권력의 무게를 낭만처럼 여기는 이가 고독을 견디기 위해 내뱉는 간절한 주문 같다. 그러나 그 주문은 오래가지 않는다. 거울 속 로만은 텅 빈 사막을 응시하며, 반복된 우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자신을 붙잡아줄 무언가가 남아 있지 않다.


로만은 <석세션>이라는 거대한 부계 제국의 희극 속에서, 그 누구보다 아이 같고 그 누구보다 잔인하며, 그 누구보다 불쌍한 인물이다. 그는 웃기지만 슬프고, 경멸스럽지만 상처 입은 존재다. 이런 다층적 인격은 고전 문학에서 하나의 인물로 쉽게 집약되지 않는다. 로만이 지닌 분열된 내면과 반(反)성장 서사 때문이다. 극중 가장 ‘웃긴’ 인물이지만, 웃음은 비극을 감당하지 못한 자가 택하는 마지막 보호막일 뿐이다. 로만은 계승자의 조건을 모두 갖춘 듯 보였지만, 끝내 어떤 것도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왕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쓴 인물이다. 아니, 왕이 되고 싶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인물이다.


"I'm dumb, but I'm smart." 로만은 광대이자 비극의 아이러니다. 제공 HBO


그는 정치적 괴물도, 윤리적 반역자도, 고전적 비극의 영웅도 아니다. 그저 사랑받지 못했고, 자라지 못한 채 늙어버린 아이일 뿐이다. 그는 비극을 꿈꿨지만, 비극조차 되지 못한 남자다. 이 때문에 로만은 세습제 사회가 낳은 가장 현대적인 파탄의 얼굴이다. 그는 비극을 감당할 심리적 밀도도, 윤리적 책임의 감각도 없다. 결국 그는 마지막 회에서 황금 계승권의 문턱에서 스스로 물러나 시브와 켄달의 언쟁을 중재하며, 마치 유년기의 농담처럼 웃는다. 그 웃음은 끝내 성장하지 못한 인간의 자기 포기에 가깝다. 비극 없는 비극, 광대 없는 왕, 결말 없는 결말. 그것이 로만이다.



돌아오지 못한 탕자와 배신의 승자


장남인 콘너는 뚜르게네프의 바자로프와 탕자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 ‘돌아오려 해도 돌아갈 수 없는 아들’로 존재한다. 바자로프가 부모에게 버림받아 방황하듯, 콘너도 회의실에도, 요트 위에도 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방황은 단순한 무능이 아니다. 그는 되묻는다. “돌아갈 곳이 어디인가?” 탕자의 귀환이 본래 종교적 구원으로 이어진다고 했다면, 현실에서 그의 귀환은 불가능이라는 비극을 폭로할 뿐이다.


그는 마치 ‘백치의 언덕’에 홀로 남겨진 존재 같다.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해 부유하며, 카프카적 풍경 속에 갇힌 듯 자신의 이름조차 알리지 못한다.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순진한 이들’을 닮아 세상의 폭력과 무관해 보이지만, 동시에 그 무관함 자체가 세상과의 첨예한 분리를 드러낸다. 그의 방황은 교향곡 한 악장의 음표처럼 짧고 불완전하다. 콘너의 등장은 결코 주변부의 존재론적 장난이 아니다. 오히려 중심의 붕괴를 비추는 거울이며, 성취를 향한 모든 욕망이 무너진 뒤에도 남은 ‘허무의 자국’을 보여 준다.


장남 콘너는 스스로 망각과 망상으로 현실에서 탈피하려 한다. 제공 HBO


부모의 품은 이미 흔적조차 사라졌고, 신화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 콘너가 “아버지여, 제가 돌아왔습니다”라고 외쳐도 돌아오는 것은 고작 무심한 공기뿐이다. 그는 탕자의 비유가 더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안식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에 던져진 존재로, 그 질문의 메아리는 ‘회복 없는 귀환’의 울림이 되어 끝없이 맴돈다.


시브의 남편 톰 왐스갠스(매슈 맥퍼딘)는 <석세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형식적으론 최종 승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그 승리는 전통적으로 이해해온 승리와는 거리가 멀다. 탈의미적 승리, 혹은 공허한 왕관 같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승리는 '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권력의 수단'으로서 완성된 형태다.


톰은 애초에 로이 가문의 일원이 아니었고, 늘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했다. 그는 로건에게 아첨했고, 시브에게 이용당했고, 사촌 그렉과 권력의 찌꺼기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반기를 들거나 직접 권력을 쟁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로건이 원하는 말을 해주고, 고조(GoJo) CEO 매튜슨이 원하는 얼굴을 보여주며, 결국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자”로 보이는 능력으로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 점에서 그는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의 버킹엄 공작처럼, 권력을 보좌하되 욕망하지 않는 자로 연기하며 끝까지 살아남는 ‘기생형 정치인’과 닮았다.


톰의 승리는 패배 없는 승리이며, 욕망 없는 왕국의 관리권이다. 그는 성공했지만 존경받지 못하고, 살아남았지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이 시대 가장 현실적인 승자다. 바로 결정을 미루며 살아남는 자다. 그는 신자유주의 하위 권력자의 전형이다. 변화하지 않고, 고발하지 않고, 오직 알아서 기는 능력으로 자리를 확보한다. 윤리도, 비극도, 충돌도 없는 승자다. 말하자면 윤리와 비극의 시대가 끝난 뒤 등장한, 포스트드라마적 리더십의 모형이다.


결국 톰은 승자이되 그 승리는 의미가 없다. 그는 왕이 되었지만 어떤 서사도 감당하지 않는다. 그의 승리는 그 무의미함 속에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꿈꾸는 성공의 초상, 바로 그것이 그의 얼굴이다. 비극 없는 왕, 의미 없는 계승. 그게 톰이다. 이런 톰이 마지막 과실을 따먹자 사람들은 분노와 허무를 느끼지만, 사실 그들은 매일 같은 성공을 꿈꾸며 살아간다.


승자이나 승리가 없다. 제공 HBO



시간과 공간의 파열, 서로 다른 리듬의 충돌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세대 갈등 -MZ세대의 ‘나약함’과 기성세대의 ‘경직됨’-은 단순한 개인적 갈등이나 사회문화적 충돌이 아니다. 역사적 시간과 문명적 지체가 중첩된 ‘크로노토포스(chronotopos)’의 문제다.


바흐친이 말한 크로노토포스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 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형식이다.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존재와 정체성의 조건이며,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구성하는 틀이다. 현대의 세대 갈등은 단지 ‘젊음 vs 늙음’, ‘진보 vs 보수’가 아니다. 서로 다른 시간 감각과 공간 경험이 충돌하는 사건, 즉 크로노토포스의 충돌이다.


로건의 시간은 직선적 성장 서사다. 성장은 피라미드 구조이며, 권력은 정점에 쌓아 올린다. 공간은 폐쇄적 위계구조로 상징된다. 이는 산업화·냉전·성장주의 시대의 크로노토포스이며, “성취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존적 감각을 낳았다. 탑, 빌딩, 회의실, 요트, 고급 저택은 그가 쌓아 올린 ‘완성된 제국’의 증표였다. 그러나 이 제국은 이미 균열을 드러낸 채 스스로 동력을 잃었다.


반면 자식들의 크로노토포스는 파편화된 유동성이다. 켄달과 시브, 로만 그리고 오늘날의 MZ세대가 공유하는 시간은 파열되고 반복된다. 기회의 순간은 늘 파괴적이며, 자기 정체는 끝없이 미끄러진다.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은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호텔 로비, 비행기 안, SNS 타임라인, 공항 라운지는 이들의 시간·공간이다. 고정된 실체를 허용하지 않는 유동하는 장이다. 이 두 크로노토포스는 서로 만나지 못할 뿐, 충돌만을 확인한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진정으로 자신을 내보일 무대는 늘 가짜다.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은 언제나 다르게 흐른다. 제공 HBO


<아버지들과 아들들>, 탕자 비유, 셰익스피어 <리어 왕>, 그리고 <석세션>까지, 모두 귀환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러나 현대의 아들들은 어디로도 귀환할 수 없다. 아버지의 집은 불타 버렸고, 형은 돌아온 동생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귀환 불가능의 크로노토포스 속에 살고 있다. 이는 곧 공유된 시간의 해체를 의미한다. 공통의 역사, 공통의 종말, 공통의 신념이 사라진 시대에, 각자는 고립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호흡한다. 이것은 시간의 진행이 아니며, 공간의 개방이 아니라 공간의 파편화다. 바흐친이 말했듯, 진정한 시간은 서사 안에서 사건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오늘 우리는 사건 없는 시간, 의미 없는 반복 속에 갇혀 있다.


현재의 세대 갈등은 ‘진보 대 보수’가 아니라, 공통의 미래를 상실한 존재들의 퇴행적 대립이다. 젊은 세대는 실패한 아버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약하고 더 계산적이 되며, 아버지 세대는 무너진 권위의 유령을 지키기 위해 더 경직되고 더 배타적이 된다. 기성세대가 꿈꾼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곧장 이어지는 선형적이고 목적론적인 서사였지만, MZ세대의 시간은 실패와 재도전, 불안과 회의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원형의 고리다. 이 충돌은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세대 간 불통’으로 나타나며, ‘세대 갈등’이 심연처럼 자리 잡게 한다.


서로 대화해서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야. 스틸샷을 조합해 이미지 생성Google Sora


그렇다면 회복 가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다성적 소설에서, 서로 다른 시간 감각과 가치 체계가 충돌하고 대화할 때 새로운 크로노토포스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오늘 우리가 다시 열어야 할 질문은 이렇다. 어떻게 서로 다른 시간들 -실패의 시간, 성취의 시간, 유예의 시간-을 대화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공간을 권력의 장이 아니라 환대의 장으로 배치할 수 있을까? 세대라는 이름의 ‘타자’를 파괴가 아니라 관계의 시간 안으로 어떻게 초대할 것인가? 이 질문에서 비로소 ‘탕자의 귀환’은 은유가 아니라 실재로 가능해진다.


<석세션>은 하나의 ‘귀환 불가능 서사’이며, 오늘날의 세대 갈등은 크로노토포스를 상실한 시대의 고통이다. 이 고통은 단지 문화의 문제가 아니며, 서사적·신학적·시간적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은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공간, 새로운 관계의 언어다. 어쩌면 그 일은 문학이, 영화가, 그리고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끝나지 않은 계승, 남겨진 파편: 승계 없는 시대의 여운


셰익스피어 <리어 왕>이 선언한 “왕이 사라진 뒤 그 자리는 텅 비어 있다”는 진술은 <석세션>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모든 권력 이양 시도에 스며들어 있다. 로건이 그 자리를 떠난 뒤 남은 것은 오직 왕좌의 공허함뿐이다. 왕관은 의미를 잃은 채, 누구에게도 빛나지 않는다.


토마스 만이 묘사했던 가부장적 가문의 몰락 서사는 한 세기를 거쳐 다시 반복되지만, 전혀 동일한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뚜르게네프가 그린 세대 충돌과 탕자의 귀환은 이제 ‘회복 없는 현상’으로 전환되어, 누구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대를 예고한다. 이 서사는 오늘날 MZ세대의 나약함과 기성세대의 경직됨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공백을 드러낸다. 그 공백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우리는 그 공허 위에서 여전히 서사적 귀환을 갈망한다.


드라마는 고전 비극의 언어를 빌려와 희극적 아이러니를 쌓아 올린다. 핸드헬드 카메라는 인물들을 고정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떨리는 손, 떨리는 목소리, 맥락을 잃은 눈빛을 낚아채듯 화면에 담는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이들이 만들어내는 비극적 결말을 예측했다가, 빠르게 뒤집히는 순간들을 함께 호흡하게 된다.


Season 1 – “Nobody Is Ever Missing”. 제공 HBO


셰익스피어적 장광설은 곧 속어와 비속어로 전환되며, 가부장적 언어와 일상의 허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말과 동시에 스마트폰 화면으로 전환되는 장면은, 인물들이 고전적 무대 위에 서 있음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현실 속 콘텐츠로 소비됨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러한 미학적 형식은 고전과 현대의 간극을 이어 주면서도, 그 사이사이를 파헤쳐 보여준다. 비극의 미학, 희극의 아이러니가 질문을 던진다.


오늘의 우리는 묻는다.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그러나 <석세션>은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무의미함, 대답 없는 질문에 불과함을 일러준다. 승계는 이미 불가능해졌고, 남은 것은 탑이 무너진 잔해와 흩어진 파편뿐이다. 그 파편 속에서 우리는 끝나지 않은 서사의 메아리를 듣는다. 셰익스피어, 토마스 만, 뚜르게네프, 탕자의 비유가 어우러진 메아리 위에서 오늘의 크로노토포스는 ‘회복 없는 파토스’를 증명한다.


<석세션>이 남기는 것은 ‘회복 불가능의 서사’다. 과거 없는 가문, 미래 없는 왕국, 귀환 없는 탕자들. 이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시대에 신화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신화 속에는 더 이상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구원의 은총은 사라졌고, 살아 있는 자들은 서로를 짓밟으며 끝없이 돌 뿐이다. 이 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아버지 세대의 경직과 MZ세대의 나약함이 뒤얽힌 현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현실은 누구도 구원하지 않는다. 구원의 전거(典據)들은 이미 무너진 탑 위로 버려진 종이 조각처럼 바람에 흩날릴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승계가 아닌 파편으로 마무리 되었다. 제공 HBO


<석세션>의 비극은 고전적 서사의 재생도, 세대 간 화해도 아닌, 균열 속에 던져진 자들의 무기력이다. 권력의 유령이 사라져도 공허는 남고, 계승의 언어가 무너진 자리에는 새로운 서사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들리는 탑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 위에 서사를 꿈꾼다.


그렇다면 이 파편 위에서 어떤 새로운 서사가 솟아날 수 있을까? 왕좌가 흔들린 지점이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탑이 무너진 지점에서, 우리는 또 무엇을 꿈꿀 것인가?” 그 질문 위에서, 우리는 귀환 없는 시대의 아이들이자, 흔들리는 왕좌 위에 내던져진 채 ‘새로운 문제’를 모색하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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