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 리뷰
고대의 언어 지층 속에서 ‘슬기’는 토속어로 뿌리내렸다. 중세국어 문헌에서 이미 ‘슬기다(지혜롭다)’로 쓰이며 지식보다 깊고 정서적인 뉘앙스를 머금었다. 한자어 ‘지혜(智慧)’나 ‘총명(聰明)’이 이성의 찬란함을 강조할 때, ‘슬기’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살아 있는 분별력과 따뜻한 통찰을 함께 노래한다.
문학적 관점에서 ‘슬기’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가르는 분별력, 사물의 이면을 꿰뚫는 통찰, 그리고 그 지혜를 구체적 삶으로 구현해내는 실천적 태도를 아우른다. 고전 속 어르신들의 삶 곳곳에 배어 있는 ‘슬기로운 판단’과 ‘현명한 처신’은, 독자에게 지성 너머의 인간미를 환기시키며, 텍스트 너머의 공동체적 관계까지 선명히 떠올리게 한다.
오늘날 ‘슬기’는 다시 일상의 문제를 푸는 따스한 손길로 부활했다. 예컨대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가 그렇듯, 현대 사회의 복잡한 감정과 제도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었고, 경청과 성찰, 배려를 통합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며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 이처럼 ‘슬기’는 고대 언어의 가치를 고스란히 이어 받되, 오늘의 구체적인 삶과 맞닿아 더욱 빛날 수 있다. 결국 ‘슬기’란, 머리의 빛남에 가슴의 온기를 더해, 우리 자신과 타인을 어루만지는 지혜다. 그것이야말로 고전과 현대, 텍스트와 삶, 개인과 공동체를 잇는 문학적 보석이라 할 만하다.
이 ‘슬기’를 앞세운 드라마가 한창 방영 중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스핀오프인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이다.
‘슬기’의 그늘, 외면된 타자의 고통
완성된 전문직인 의사 이전의 전공의의 일면을 다루면서, 캐릭터의 성장과 각자의 사연을 엮어 ‘재미’라는 코드를 앞장세워 시청자들의 관심을 붙들어 두고 있다. 그러나 방구석 1열을 점령한 의료 드라마의 세계는, 이처럼 젊은 의사들의 고뇌와 성장을 눈부시게 현시하며 ‘슬기’라는 긍정적 함의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빛나는 서사 뒤편에는, 이름 없는 환자들이 희미한 배경처럼 존재한다. 그들은 주인공의 감정적 진폭을 위한 소도구로, 극적인 순간의 촉매로 잠시 등장했다가, 드라마의 흐름 속에서 쉬이 망각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절박한 고통은, 오직 전공의의 사명감이라는 빛나는 서사를 위한 희미한 배경음악처럼, 덧없이 스러진다.
미국 메디컬 드라마 <하우스>는 이러한 익숙한 드라마의 문법을 단호히 거부한다. 매회 펼쳐지는 예측 불허의 진단 과정은, 한 편의 치밀한 추리 소설처럼 시청자를 사로잡지만, 에피소드의 말미에는 반드시 환자의 삶이라는 묵직한 질문이 던져진다. 그들은 익명의 질병 사례가 아니라, 고유한 역사와 관계, 그리고 불가피한 고통을 지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우리 앞에 선다. <그레이 아나토미>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의사들의 사랑과 성장의 연대기 속에서도, 환자와 그들의 가족사는 촘촘히 직조되어 서로에게 깊은 파장을 일으킨다. 시청자는 그들의 고통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삶의 다층적인 의미를 숙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젊은이들의 성장기에 뭘 그리 근엄 진지하게 들여다 보느냐의 반론도 거세다. 하지만, 우리가 드라마 <미생>을 통해 느꼈던 깊은 공감의 근원은 무엇인가. 비정규직 사원 장그래가 냉혹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나아가는 이야기는, 주변 인물들의 다채로운 서사와 얽히며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선다. 그들이 겪는 좌절과 고통은, 장그래에게 연대의 불가피성을, 그가 짊어져야 할 윤리적 무게를 뼈저리게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동한다. 고통은 개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피상적인 장치가 아니라, 함께 짊어져야 할 현실의 질곡이며,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윤리적 요청이었다.
이기적 성장이 외면한 고통 속의 사람들
2024년 초,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라는 현실의 파도는, 드라마 속 낭만적인 서사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수많은 젊은 의사들은 집단 사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곪아온 의료 시스템의 부조리함을 격렬하게 고발했다. 그들이 박차고 나온 텅 빈 병원과 싸늘한 응급실의 풍경은, 더 이상 드라마 속 헌신의 무대가 아니라, 과중한 노동과 불안한 미래에 신음하는 젊은 의사들의 절망적인 자화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단순히 개인의 처우 개선을 넘어, 한국 의료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거대한 파문이었다.
13개월에 이르는 긴 파업의 시간은, 우리 사회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응급 환자들은 제때 치료받지 못했고, 필수 의료 영역은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드라마 속에서 젊은 의사들은 초인적인 능력으로 환자를 구원하는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현실 속에서 그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 혹은 의사로서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이기적인 시간을 고통이라 치환했다. 이 간극은 허구와 현실의 단순한 차이를 넘어선다. 그것은 의료 현장의 고통이 드라마라는 서사에 포획될 때, 얼마나 용이하게 미화되고, 때로는 철저하게 은폐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슬픈 증거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가 시작된다고 갈파했다. 드라마 속에서 환자의 고통이 주인공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장치로 전락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얼굴을 응시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들의 고통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그 무게를 가늠하고, 함께 책임을 통감해야 할 윤리적 시간마저 빼앗기는 것이다. 리쾨르는 인간의 정체성은 단일한 서사로 환원될 수 없는 다층적인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수많은 의료 드라마들은 젊은 의사의 성장이라는 단일한 서사에 매몰된 채, 환자들의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는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얼마전 마무리된 콘클라베로 인해 전대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8일, 한국 방문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이 떠오른다. 당시 교황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김영오 씨를 만나 위로하고, 그가 건넨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았다. 이에 대해 한 기자가 "정치적 중립을 위해 노란 리본을 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묻자,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발언은 교황이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다는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강조해 왔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반응을 넘어,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행동과 연대를 촉구하는 윤리적 선언으로 해석된다.
교황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전체적인 사목 철학과도 일치한다. 그는 항상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사회적 정의와 연대를 강조해 왔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그의 발언은 우리 모두가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에 무관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통 앞에 숙련된 지식과 뜨거운 연민의 조화가 필요해
드라마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은 원래 2024년 상반기 방영을 목표로 제작되었으나,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 발표와 이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 및 파업으로 인해 의료계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고조되면서 방송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당시 드라마가 의료 현실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고, 제작진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방영 시점을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진은 드라마의 주된 초점을 전공의들의 우정과 청춘 성장에 맞추었다고 밝혔지만, 현실에서는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자가 전국에 단 한 명뿐일 정도로 전공의 부족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과 드라마 속 설정 간의 괴리로 인해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드라마가 의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진정으로 ‘슬기로운’ 의료 서사는, 숙련된 지식과 뜨거운 연민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지점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한다. 드라마는 젊은 의사의 시선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환자의 절망적인 눈빛에도 주목하고, 그들의 삶의 궤적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야 한다. 또한, 의료 정책의 결정이 현장에 드리우는 복잡하고 다기한 그림자를 드라마의 내부로 끌어들여 공론의 장으로 확장해야 한다.
젊은 의사의 성장은 그들이 처한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과 분리될 수 없으며, 환자의 고통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직면해야 할 윤리적 질문이어야 한다.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이상적인 영웅의 모습만을 숭배하는 서사는 공허한 메아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공감과 성찰은, 타인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함께하려는 윤리적 의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영화란 스크린 안의 세계가 스크린 밖의 세계와 대화를 나눌 때 비로소 의미를 내포한다고 장 뤽 고다르가 말했다. 이런 의미를 확장해서 의료 드라마는 빛나는 성장 서사의 이면에 드리워진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하고, 침묵했던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젊은 의사들의 고뇌는 그 자체로 중요한 서사의 한 축이지만, 그들의 성장이 환자들의 고통을 가리는 자기 합리화의 기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건강한 의료 생태계를 위한 진정한 성찰은, 드라마 속 환자들이 익명의 배경이 아닌, 존엄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