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진은 왜 '야구'를 중계하지 않을까?
2025년 봄, 한국프로야구 중계의 한순간은 마치 무대 위에 던져진 불씨처럼 팬들의 입들을 타고 순식간에 타올랐다. 어느 방송사의 대표 해설위원은 특정 팀 선수의 실수는 의도적으로 숨기고, 반면 다른 구단의 플레이어의 부진에는 유난히 무게를 실어 비판의 언어를 쏟아냈다. 이는 지속적인 느낌이 들었고 특정 팀 선수가 홈런 치면 흥분해서 소리 지르지만 다른 팀이 이기고 있으면 해설 안 하고 입 닫고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구체적 지적까지 있었다.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진 그 목소리는 진실을 왜곡하는 증폭기로 기능했고, 시청자는 순간적으로 중계의 공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해당 방송국과 해설진은 공개사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더 깊은 양상 속에 숨어 있다. 그날의 캐스터는 더 이상 엄격한 사실 전달자가 아니었다. 그는 해설자의 감정을 충실히 옮기는 통로로 전락했고, 중계실 안팎의 경계는 금세 허물어졌다. “정말 이 장면을 이렇게 봐야만 하는가.” 시청자의 의심은 훨씬 더 깊은 문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한두 발언의 오류나 실수가 아니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본래 기능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중계 전체를 왜곡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례에 불과했다.
캐스터와 해설자, 그 역할의 본질
캐스터라는 말은 고대 노르드어 kasta(던지다, 흩뿌리다)에 영어 접미사 -er(행위자)가 결합해 탄생했다. 원래 ‘무언가를 던져 정보를 퍼뜨리는 자’를 뜻하던 이 단어는 야구 중계에서는 곧 매 순간의 타구 궤적을 시청자에게 실시간으로 보내는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 중계에서는 캐스터가 마치 해설자의 언어 전달자처럼 감정과 편견을 고스란히 옮겨 왔다. 싸늘한 사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방향을 제시해야 할 자리에, 과도한 찬양과 무분별한 평가만이 넘실댄다.
반면 해설자, 즉 commentator는 라틴어 commentarius(논평, 숙고를 담은 기록)에서 이어져 온 존재다. 이 어원은 사건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비평과 통찰을 더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경기의 서사를 해석하고, 상황을 다층적으로 읽어내며, 맥락을 풍부하게 설명하는 것이 해설자의 본분이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해설진의 발언을 들어보면, 근거 없는 단정이나 표현만이 무게를 차지하고, 깊이 있는 통찰은 결여되어 있다. 이 같은 상태에서 캐스터의 중립성과 해설자의 전문적 해석이 뒤엉키면, 시청자는 마치 거울 없는 복도에서 어리둥절 걷는 것처럼, 사실과 해석을 구분하지 못한 채 정서의 파고 속으로 휩쓸리게 된다.
해외 사례와 비교를 통한 문제적 제기
먼저 영국 BBC는 공영방송의 사명으로 ‘중립성의 성역’을 지킨다. 그럼에도 잉글랜드 국가대표 경기에서 종종 잉글랜드 선수에게 과도한 칭송이 쏟아져 “British Biased Commentary”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BBC는 즉각 내부 검증 절차를 가동해 문제 발언을 되짚고, 수정 지침에 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편파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 스스로 중계 언어를 점검하고 공공의 신뢰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미국 프로스포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식 중계와 팬 중계를 분리하는 방식을 취한다. NBA와 MLB에서 공식 방송사는 풍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공정한 해설을 제공하는 반면, 별도의 ‘팬 중계’는 주관적 열정을 마음껏 드러낸다. 이 구조는 시청자 스스로 중계의 성격을 선택하게 하고, 편파와 공정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나눈다.
공식 중계는 ‘공정’을 기치로 삼아, 경기장 음향, 심판 판정 논란, 서플먼트 출처 등 다양한 데이터를 동원한다. 반면 팬 중계는 ‘열정’을 내세우며 주관적 감정에 푹 빠진다. 양자 체계는 ‘팬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스포츠의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편파를 자연스럽게 걸러내는 장치가 된다.
영국 스포츠 저널 The Athletic은 “편파 중계는 팬의 열망을 부추기지만 스포츠의 진정성을 파괴한다”는 관점에서 비평을 이어가며, 해설자들이 자신의 언술이 어떤 파급력을 지니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도록 촉구한다. 미국 ESPN의 컬럼리스트들은 “선수 개인의 명예와 리그 전체의 신뢰성을 동시에 훼손하는 발언은 장기적으로 리그 브랜드에 치명적”이라고 경고한다. 이들은 분석과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발언을 평가하고, 시청자가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이들은 축적된 통계와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해설자 발언의 파급력을 분석, 비평하며 시청자를 보호한다. 이를 통해 중계 자체가 하나의 공론장이자 문화비평의 장으로 기능하도록 유도한다.
언어와 학습의 부재가 드러낸 중계의 그림자
한국의 현 중계 환경은 정작 산업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표면적인 찬양과 비난으로 얼룩져 있다. 구장 신축이나 전광판 교체를 찬양하고 제2 구장 인프라 투자 부족을 지자체의 의지라 평가하는 장면은 마치 경기 자체보다 경기장 시설이 더 중요한 듯이 포장된다. 그 모습은 마치 축구 경기를 해설하는데 경기 후 인터뷰를 대신해 구장 매점 메뉴만 읊어대는 것과 같다.
프로야구가 차지하는 산업 현황, 이에 따른 연봉 협상의 이면, 셀러리캡의 산업적 의미, 중계권 수익 배분, 선수 복지와 빈부 격차의 문제, 지역사회와 기업환경에 기여 같은 핵심 주제는 마치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시청자는 야구라는 커다란 세상 자체를 통째로 보여 주려는 노력보다, 일부 찬사에만 중독된 채 진짜 서사를 놓치게 된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해설자들의 언어 훈련 부족이다. “대박”, “쩐다”, “미친 존재감” 같은 유행어는 다반사고, 본인도 소화하기 힘든 일상과 괴리된 단어 "공교로운", "협업", "상쇄", "재질(사람의 자질이 아니고 재질이라 칭함)"들의 언어 적요성에 한참 벗어난 단어를 억지 만들어 뱉는다. 순간의 흥분을 고조하고 식자의 그럴듯한 수사라 여길지는 몰라도, 한국어의 정제된 아름다움을 갉아먹는 말들이다. 문법적 오류와 억양 조절의 실수는 중계라는 서사를 흔들고, 지역 사투리 남용은 마치 난해한 암호처럼 들린다. 한국어뿐 아니다. '빅볼'도 아닌 축구용어 '롱볼'을 연발하고, 투심(two seam)을 잘 던지는 투수를 '투시머'도 아닌 '투심러'라고 지칭한다.
해설자의 언어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청소년 팬들도 무의식적으로 흡수하는 문화적 코드다. 문법적 오류, 어조의 부조화, 지역 사투리 남용은 시청자가 중계라는 서사를 따라가는 흐름을 흩뜨린다. 이러한 언어 능력, 부재는 중계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장기적으로는 세대 간 소통마저 단절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방송사가 주도적으로 일상의 언어를 오염시키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계진은 스스로 학습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최소한 연간 언어 능력 검사를 통해 맞춤형 교육을 이수하고, 경기 전후 사전 브리핑을 통해 리그의 통계와 산업적 맥락을 숙지해야 한다. 방송사와 제작인은 해설자와 캐스터에게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통찰을 요구하고, 정기적인 워크숍을 통해 외부 전문가들의 피드백을 반영해야 한다. 또한 AI 기술을 활용한 실시간 편파 탐지 시스템을 도입해, 감정적 편향이 과도해지면 즉각 경고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해설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방송이라는 공기를 운영하는 주체의 면밀한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중계라는 서사장치를 제자리로
캐스터는 원래 ‘사실을 객관적으로 던지도록’ 설계된 인간형 기계다. 그러나 최근 그는 해설자의 감정을 대변하며, 게임의 격랑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때 캐스터는 “이 공은 스트라이크 존 정중앙, 홈플레이트 정가운데를 찍었습니다”라는 식의 정밀 묘사를 책임졌지만, 이제 그는 “와, 이거 진짜 아깝습니다, 저쪽 팀 기대주가 대단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들려오는 건 ‘진심의 울림’이 아니라 ‘감정의 폭탄’ 일뿐이다. 감정적 해설과 사실적 중계가 뒤섞이면, 시청자는 감정적 동조를 강요당한다. 그것이 패배한 팀 팬이라면 배신감으로 돌아올 테고, 승리한 팀 팬이라면 뻔한 찬사의 진부함에 공허함을 느낀다.
해설자는 경기의 맥락을 짚어주어야 할 책사처럼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감탄사 중독’이다. 순간의 안타 한 방에 “한국 야구 역사상 이 장면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라며 불현듯 장대한 은유를 구사하기도 하고, 선수 기록 하나를 분석하기보다 “내가 어제 본 그 기사에서는 뭐더라?” 같은 미검증 루머를 인용한다. 이는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고, 야구라는 텍스트를 해체한다. 더 나아가, 연봉 협상이나 선수 노조, 구단의 재정 구조 같은 산업적 배경 지식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야구 장인으로서 경기를 해체하고 재구성할 능력을 갖추기는커녕, 언어 훈련과 기본 통계조차 학습하지 못한 채 중계를 이어 간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역할 경계가 흐려진다는 것은 단지 중계 품질의 문제가 아니다. 그 밑바탕에는 역할 수행 능력의 부재, 산업과 문화에 대한 무지, 언어 훈련의 결핍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캐스터가 사실을 왜곡하고, 해설자가 객관적 근거 없이 해석을 남발할 때, 그 틈새로 언어의 야만이 스며들고, 팬들은 환상의 파편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진정한 중계는 캐스터가 “사실의 창” 역할을, 해설자가 “의미의 거울” 역할을 담당할 때 완성된다. 이 두 축이 건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만, 중계는 단순한 경기 전달을 넘어 야구라는 문학적 서사를 온전히 그려낼 수 있다. 이를 위해 방송사와 리그 관계자, 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만 한다. 중계의 언어를 가꾸고, 역할을 분명히 하며, 비평의 장을 열어젖힐 때, 한국프로야구는 비로소 ‘언어의 책임’을 다하는 문화로 거듭날 것이다.
그리고 중계는 더 이상 무의미한 잡담이나 감탄의 무리만을 퍼트리는 기계가 아니며, 야구라는 거대한 서사를 빚어내는 공공의 창이 되어야 한다. 팬과 언론, 중계진 모두가 함께 책임의 자리를 분명히 하고, 언어와 자세를 점검하며, 중계 문화의 진일보를 이뤄내길 기대한다.
비평적 제언: 중계라는 공공연극에 담긴 책임
중계진의 책임 의식 회복은 윤리 강령의 제정과 자격 인증 제도 도입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캐스터와 해설자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행동 기준을 명문화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무근거한 찬양이나 음해성 비방, 확인되지 않은 루머의 사용을 금지하는 조항을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발언의 신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캐스터에게는 사실 전달 시 오차 범위를 분명히 밝히도록 요구하고, 불필요한 감정 이입을 경계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매년 언어 능력과 야구 지식, 리그 운영 전반에 대한 이해를 평가하는 자격 인증 시험을 도입한다면, 중계진 스스로가 스스로의 역량을 점검하고 보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계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층적 검증 시스템과 정기적인 워크숍이 필수적이다. 경기 전 브리핑에서는 리그 통계와 구단 운영 현황, 선수 노조 상황, 리그 재정 구조, 그리고 산업의 기본 이해와 같은 산업적 배경을 공유함으로써, 해설자가 상황을 종합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경기 중에는 AI 기반 편파 탐지 시스템을 활용하여 발언 패턴과 감정 이입 정도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기준치 이상의 편향적 발언이 감지되면 즉각적인 경고를 보내야 한다. 스포츠 미디어 선진국에서는 경기 후에는 중계 내용을 텍스트로 전사하여 외부 전문가—스포츠 철학자나 언론학자, 스포츠 저널리스트 등—와 함께하는 메타 해설 세션을 개최한다. 이 워크숍에서는 중계진의 언어 사용과 분석 방식에 대한 비평적 성찰이 이루어지며, 보다 나은 중계를 위한 구체적인 개선책이 논의된다.
언어 훈련과 정기 평가는 중계진이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다. 맞춤형 언어 교실을 열어 중계에 적합한 문법, 어휘, 억양, 방송 어법 등을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최소한 연 1회 이상 언어 능력 검사를 통과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불분명한 표현이나 과도한 유행어 사용을 줄이고, 한국어의 품격을 회복하는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동시에 스포츠 철학, 비평사, 문학적 수사법에 대한 독서 클럽을 운영하여 해설자의 언어적 깊이를 강화함으로써, 단순한 경기 설명을 넘어 야구 서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팬 참여와 투명성도 중계 문화 개선의 중요한 열쇠다. 시청자 설문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팬들이 느끼는 편파성이나 언어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중계진과 공유하여 개선에 반영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 모니터링을 통해 실시간으로 팬 반응을 확인하고, 중계의 즉각적인 수정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일 역시 필요하다. 연말에는 중계 품질 지표—예컨대 편파 지수, 언어 적합성, 산업적 배경 언급 정도 등을 포함한 보고서—를 공개함으로써, 중계진과 방송사는 팬들에게 투명성을 약속하고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제언들은 모두 중계진이 자신의 언어와 태도, 그리고 지식수준을 스스로 돌아보게끔 한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경기라는 무대를 통해 시청자에게 제공해야 할 ‘진실의 창’과 ‘의미의 거울’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중계 전후의 철저한 준비와 검증, 언어 훈련, 그리고 팬과의 소통을 통해 한국프로야구 중계는 그저 감탄과 환호를 전달하는 기계적 장치가 아니라, 야구라는 서사를 깊이 있게 풀어내는 공공의 창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무게, 감정의 울림, 그리고 책임의 자리
편파 중계란 단순히 한쪽으로 기울어진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 밑바탕에는 역할 수행 능력의 부재, 산업과 문화에 대한 몰이해, 언어 훈련의 부족이 얽혀 있다. 캐스터가 중립의 말을 쓰지 못할 때, 해설자는 공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틈새로 언어의 야만이 스며든다. 그러므로 캐스터는 “사실의 창”이어야 하고, 해설자는 “의미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둘 사이의 건강한 긴장은 중계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야 비로소 균형 잡힌 서사가 완성된다.
또한, 야구 종사자들과 중계진들은 훈련된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 중계가 던지는 단어 하나하나를 낱낱이 분석하고, 풍자와 은유를 통해 그 안에 숨은 권력과 욕망을 드러내야 한다. 마치 빛과 그림자 사이를 정밀하게 오가는 검은 볼펜 선처럼, 캐스터와 해설자의 언어는 공정과 열정이라는 거대한 스펙트럼을 내포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중계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 위에서만 존재하는 환영에 속아 넘어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를 위해 방송사와 리그 관계자, 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중계의 언어를 가꾸고, 역할을 분명히 하며, 비평의 장을 열어젖힐 때, 한국프로야구는 비로소 ‘언어의 책임’을 다하는 문화로 거듭날 것이다. 그리고 중계는 단지 시청자의 눈과 귀를 채우는 기계가 아니라, 언어와 감정의 심연 속에서 야구라는 거대한 서사를 빚어내는, 진정한 공공의 창이 될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은 야구 문화의 자정과 발전을 위한 작은 촉매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의 팬심이다. 모두의 한계와 끊임없는 노고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하지만 변화는 필요하고 그 변화는 모두에게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