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온 킹 이승엽'의 씁쓸한 퇴장에 대하여
한 사람의 등장과 퇴장은 저마다 다른 의미의 잔상을 남긴다. 최근 프로야구의 판세는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순위 덕분에 흥미와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응원하는 팀인 삼성 라이온즈가 7연승, 최근 10경기 9승 1패라는 대약진을 펼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작은 평화의 기운마저 누리고 있다. 그깟 공놀이가 도대체 뭐라고 말이다.
그깟 공놀이를, 나는 40년 넘게 변함없는 기호이자 취미로 품고 살아왔다. 가장 바빴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하루 경기 결과와 리뷰, 하이라이트를 보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잠이 쉽게 들지 않는 밤이면, 저녁 경기 장면이 눈을 감은 자리 위로 아른거렸다. ‘그때 그랬더라면’의 가정법이 마음을 채우고, 복기도 아닌 후회의 재생산만 거듭되던 시간들. 그 시간의 절반 이상을 함께했던 한 선수가 있다. 나에게 가장 애정하는 선수, ‘라이온 킹’ 이승엽 전 두산 감독이다.
최근 성적 부진으로 자진 사퇴하며 일종의 불명예를 안게 되었지만, 이승엽은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의 생애는 야구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수많은 기록으로 채워진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다.
한국 야구 최고의 타자, 이승엽
이승엽은 1976년 8월 1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운초등학교, 경상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거치며 야구에 몰입했고, 고교 시절에는 좌완 투수 겸 4번 타자로 이름을 알렸다. 공을 던지는 능력과 타구의 비거리를 동시에 지닌 ‘투타겸장’으로 주목받았고, 최고 구속이 140km/h를 넘을 정도의 투수 재능도 겸비했다. 지금 같으면, 투타 겸업의 오타니처럼 길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그의 진짜 재능이 타격에 있다고 보았다. 고교 3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리는 등, 또래들과는 차원이 다른 장타력을 이미 증명한 바 있었다. 1995년, 이승엽은 삼성 라이온즈에 2차 1라운드로 입단한다. 등록 포지션은 좌완 투수였으나 입단 직후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 감독이자 KBO 유일의 4할 타자였던 백인천의 권유와 결정 덕분이다. 이 선택은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환 중 하나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그의 타격 재능은 곧 폭발했다. 데뷔 2년 차인 1997년부터 3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리그 대표 장타자로 떠올랐고, 1999년에는 KBO 최초로 단일 시즌 50홈런(54홈런)을 돌파,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세운다. 2003년에는 이 기록을 스스로 경신하며 56홈런이라는 단일 시즌 최다 홈런의 금자탑을 쌓는다. ‘라이온 킹’이라는 별명도 이때 비로소 굳어진다. 특히 2002년 LG 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동점 홈런은 지금도 나의 ‘최고의 홈런’으로 남아 있다.
2004년 그는 일본 프로야구(NPB)에 진출해 지바 롯데 마린스를 시작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한다. NPB에서도 장타력은 여전했고, 2006년에는 요미우리에서 41홈런을 기록하며 중심 타자로 자리 잡는다. 그 해 열린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4번 타자로 맹활약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011년, 이승엽은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했다. 복귀 이후에도 성실한 훈련과 경기력으로 팀을 이끌며, 삼성의 한국시리즈 4연패(2011~2014)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1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며 남긴 기록은 24홈런 118타점, '노장의 품격' 그 자체였다. 그의 은퇴식을 생중계로 보던 그 날, 눈물을 훔치는 나를 보고 아내가 놀라 놀렸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은퇴 경기에서 자신의 벽화가 그려진 라이온즈 파크 우측 담장을 향해 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며 화려한 마무리를 남긴 그 모습은 진정 ‘위대한 퇴장’이었다.
KBO 통산 홈런 467개, 타점 1,498개.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 거기까지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욕심이었을까, 부족함이었을까 ― 감독 수난사
은퇴 후, 이승엽은 해설위원, 유소년 야구 재단 활동, 방송 등에서 활약하다가 2022년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선임되며 지도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라이벌 팀 감독이 되는 장면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었지만, 그는 “선수 존중”과 “합리적 리더십”을 앞세워 두산을 재건하겠다는 포부로 시작했고, 구단 역시 지도 경험이 전무한 초보 감독에게 3년 18억이라는 파격적 계약을 안겼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다. 2023 시즌 초반 두산은 상승세를 보이며 5강 경쟁에 나섰지만, 불안한 불펜 운영과 고정된 라인업에 대한 비판은 지속되었다. 고비마다 전략의 부족, 교체 타이밍의 미숙함은 팬들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이승엽 감독은 “배워야 한다. 경험이 부족하다”고 솔직하게 말했지만, 야구는 언제나 결과로 말하는 냉정한 스포츠였다.
그럼에도 그는 2023년 팀을 정규시즌 5위로 이끌어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진출시켰고, 2024년엔 정규시즌 4위로 2년 연속 가을야구에 성공했다. 하지만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사상 최초로 5위 KT에 연거푸 패하며 탈락하자, 팬들과 언론의 비판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2025년, 계약 마지막 해. 재신임을 받아 비장하게 시즌을 시작했지만, 6월 2일 현재 두산은 58경기 23승 3무 32패. 승률 0.418, 리그 9위. 특히 최하위 키움 히어로즈에게 연패를 당하며 가을야구는커녕 추락이 예고되었다. 결국, 이승엽 감독은 자진 사퇴를 택했다.
그는 선수 시절 ‘말 대신 방망이로 말하는 사나이’였고, 경기 외적 논란 없이 야구에만 몰두한 드문 스포츠맨이었다. 그러나 감독으로선 이름값만 앞선다는 비판과 함께, 실전 전략과 경험 부족의 벽 앞에 고개 숙여야 했다. ‘투마카세’식 투수 운영, ‘인디언 기우제’식 라인업 고집이라는 비아냥과 함께, 그는 실패한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남긴 채 퇴장했다.
빛나는 방망이만으로 감독의 무게를 대신할 수 없다
나의 슈퍼스타의 씁쓸한 퇴장을 바라보며, 야구 전문기자 레너드 코페드의 명저 《야구란 무엇인가?》 속 문장이 떠오른다.
“감독이란 자리는, 그저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일본 스포츠 소설 《야구감독》(에비사와 야스히사)은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묘사로 가득하다. 소설 속 엔젤스 구단은 감독 히로오카 타쓰로가 오기 전까지는 오합지졸에 패배주의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가 오고 나서, 팀은 달라졌다. 승리와 반등. 그러나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부진에 다시 빠지며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다시 반등의 조짐. 무엇이 바뀌었을까? 신묘한 작전도, 기발한 선수 기용도 없었다. 결국 위기를 벗어난 것은 선수들의 몫이었다.
감독이 모든 경기를 좌지우지한다는 통념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야구는 감독이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 뛰는 선수가 완성하는 경기다. 오늘날 한국 야구는 ‘야신’, ‘국민 감독’ 같은 이름으로 감독에게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를 준다. 하지만 감독이 전력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는 순간, 선수 개개인의 역량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게 된다.
예컨대 김성근 감독은 야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인정받았지만, 팀 운용 방식은 끊임없이 논란이었다. 선동렬 감독 역시 강한 카리스마로 팀을 이끌었지만, 선수 개개인의 성장은 뒷전이었다. 반짝 우승은 가능했지만, 깊은 상처가 남았다.
모든 전략이 뛰어나다 해도, 실행하는 이는 선수다. 감독은 방향을 잡지만, 결국 항해는 선수들이 만들어낸다. 이 단순한 진리를 잊는 순간, 야구는 철저한 통제의 스포츠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감독이라는 자리는 무게가 아니라 고립이 된다.
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팀 운영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감독의 모든 작전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것을 결국 실행에 옮기는 건 선수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다. 그렇다면 감독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하며, 전략과 전술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라고 강변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에 대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하고 싶다.
야구 감독이란, 실패의 스포츠에서 실패를 떠안는 사람
야구는 선수 개인의 행위가 성공으로 이어질 확률이 30%에 불과한 독특한 스포츠다. 축구에서는 패스 성공률이 80%를 넘고, 배구에서 공격 성공률은 70%에 육박한다. 농구의 경우 필드골 성공률이 60%에 이르고, 어려운 3점 슛도 40% 가까이 나와야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야구에서 감독의 공격 전략과 전술이 성공할 확률이 30% 정도면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도 선수 개개인이 자신의 역량을 다 발휘한다는 가정하에서 가능한 수치다.
이런 이유로, 현대 야구에서 감독은 ‘코치(coach)’보다는 ‘매니저(manager)’로서의 역할이 더욱 부각된다. 많은 영역에서 매니저의 핵심은 ‘지도’가 아니라 ‘조율’에 있다. 수많은 인원과 긴 시즌을 함께 보내면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기술과 전술 못지않게 구성원 간의 화합, 선의의 경쟁, 목표 의식과 승부욕의 공유가 중요해진다. 이를 조율하고 유지하는 것 또한 감독의 책무다.
야구 감독은 흔히 ‘극한 직업’으로 불린다. 자의로 선택한 일에 ‘극한’이란 표현이 과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힘든 자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승률 5할은 5강의 기준이고, 감독은 늘 50%의 실패를 복기하고 분석해야 한다. 말은 쉽지만, 실패를 되돌아본다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세상살이가 그러하듯, 야구 감독이란 자리 역시 ‘잘한 흔적’은 드러나지 않지만, ‘잘못한 자국’은 유독 크게 남는 자리다. 거의 모든 영역에 개입할 책임을 지면서도, 정작 그 모든 것을 좌우할 결정권은 가지지 못한, 어정쩡한 반신반인의 신세. 그것이 야구 감독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구단 리더십의 저열함
감독이 책임을 지는 위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말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무턱대고 경질과 퇴진을 외치기 전에 복합적이고 상식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과연 팀 운영의 전부가 감독의 책임일까? 일부 구단의 단장직은 철밥통처럼 유지되거나, 구단주의 낙하산 인사로 채워지기도 한다. 지금 두산의 성적이 과연 감독만의 책임인가에 대해, 야구를 제대로 아는 팬이라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진 않을 것이다.
나는 삼성의 암흑기 동안 김한수 감독을 응원했다. 선수 시절부터 좋아했던 그는, 화려하진 않아도 팀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역대 최고의 삼성 3루수로서 ‘조용한 강자’의 이미지가 여전했다. 감독 재임 3년간, 그는 늘 고독해 보였다. 카메라 앵글을 피하듯 벤치 한켠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짠한 마음마저 들게 했다. 언젠가 수염을 기르고 좀 더 앞에 나서려 애쓰던 모습도 있었지만, 다시 꺼실어진 표정으로 돌아온 그의 얼굴은 늘 답답한 현실을 삼키는 듯한 쓴 미소였다.
그가 이끄는 팀이 생각만큼 풀리지 않을 때,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줄어든 살림살이 속에서 팀의 뎁스를 이만큼 끌어올린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물론 중계를 보며 나도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권위만으로 선수들을 억누르는 어느 팀의 감독들이나, 4년 만에 선발승을 눈앞에 둔 선수를 5점 차 앞선 경기에서 무자비하게 교체하는 냉정함과는 달랐다. 야구는 ‘장기적 관리’의 경기이지, ‘단타 승부’의 종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한수 감독이 떠난 뒤, 삼성은 허삼영 전력분석팀장을 감독으로 임명했다. 환영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경험 없는 초보 감독, 여전히 존재하는 프런트 핵심들, 이 모든 이유로 꼴찌 후보로 손가락질한 ‘가짜 팬’들도 있었다. 허 감독은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뒀지만, 팀의 암흑기를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 그래도 엉망이 된 리그 일정 속에서도 잠실이 아닌 홈 구장 라이온즈 파크에서 포스트시즌을 치를 수 있었고, 그 시절 드래프트한 선수들이 지금 삼성의 주축으로 성장한 점은 분명 공과가 교차한 시기로 평가할 만하다. ‘덕’은 없었더라도 ‘탓’은 면했으니, 이 또한 의미 있는 기록일 것이다.
감독이란 자리는 중계 화면에 비치는 몇 장면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진심으로 응원하는 팬이라면, 그 이면의 고단함까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야구단 운영의 복잡함을 모르고 ‘감’으로만 판단한 채 편견 가득한 댓글을 쏟아내는 팬들도 많다. 특히 언론 플레이에만 능한 모 구단의 단장으로 인해, 정작 팀 매니지먼트 전체가 초라하게 보이는 반사효과도 있었다.
야구는 산업이며, 구단은 기업이다. 연봉 책정과 선수 영입은 철저히 기업의 재무적 논리에 따라 결정된다. 프런트의 무능으로만 보기엔 구조적인 제약이 크다. 예를 들어 선수 연봉의 최종 결정권은 구단이 아닌 모기업의 재무기획실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듯 감독이란 자리는 자칫 팀의 모든 운영 실패에 대한 비난을 맨앞에서 감당해야 하는, 고충의 자리이기도 하다. 언젠가 미국과 일본의 야구단 운영 구조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볼 기회가 있다면, 한국 프로야구도 이제 선택해야 할 시점이 온 듯하다. 미국식 단장 중심의 분리 운영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일본처럼 감독이 실질적 단장의 역할까지 겸하는 통합형 구조를 유지할 것인가.
굿바이 투 로맨스, 안녕. 나의 전성기여
공놀이를 하던 사람 하나에 이토록 감정 이입해도 괜찮나 싶기도 하다. 그의 은퇴 경기에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단순히 팬심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사회적 전성기와 그의 전성기가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시리즈에서 극적인 동점 홈런을 치던 2002년, 나는 서른의 나이에 직장에서 최연소 관리자가 되었고, 그의 방망이가 가장 빛나던 시기, 나 또한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었다. 2017년, 그의 은퇴와 동시에 나 또한 인생의 큰 고비를 맞았다. 감독으로서의 고군분투와 퇴장 시기에는 병마와 싸우며 생사의 문턱에 서 있었으니, 그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스포츠 스타의 ‘탄생–전성기–몰락–퇴장’이라는 서사는 고전적 영웅 서사의 구조를 따른다. 그것은 인간의 야망, 명예, 실패, 그리고 상실을 다루는 미학의 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따르면, 영웅의 몰락은 오만(hubris)과 인식(anagnorisis)에서 비롯된다. 이승엽 감독의 경우, ‘전설’이라는 과거와 ‘지도자’라는 실험 사이에서 좌절을 겪고 있는 현재가, 그 구조에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새로운 시작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 씨앗이 바로 카타르시스다.
영화 <꿈의 구장>이 떠오른다. “If you build it, he will come.” 레이는 옥수수밭을 허물고 야구장을 짓고, 그곳에서 잊힌 야구 선수들과 고인이 된 아버지와 재회한다. 그 야구장은 몰락한 이들이 돌아와 다시 빛날 수 있는 제2의 시간, 제2의 무대를 상징한다. 이 영화가 떠오른 건, 이승엽이라는 이름이 ‘지도자로서의 실패’로 채점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전성기는 반짝이는 순간일 뿐이다. 그 반짝임에만 매몰되면 황혼의 아름다움을 놓치게 된다. 실패 없었던 이승엽 선수가 실패로 물든 지도자로 남게 되는 일이, 나는 안타깝다. 그러나 실패의 시간을 지나온 사람으로서, 그에게 말하고 싶다.
괜찮아. 수고했어.
다시 빛나는 방망이의 이승엽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방송도 좋고, 육성은 더 좋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좋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돌.
팬이란 무엇일까.
때로 쓴소리도 하지만, 결국엔 응원하는 존재다.
내 편이 되어주는 존재다.
그러니 오늘도 인내심 많은 모든 야구팬들에게 외친다.
모두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