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트리벌리즘에 갇힌 우리
팔로잉하던 담벼락을 리스트에서 지웠다. 승리의 도취감일까. 비판과 조롱 사이를 아슬 아슬 줄타기하면서 정치적 트라이벌리즘과 확증편향에 스스로 가둔 사람들이 제법이다.
조중동이라는 매체는 이 쪽 진영에서 쓰레기, 폐기물로 취급된다. 그러나 그 매체가 생계와 연결된 인생들도 있다. 특히 문화 예술 문학 인문학 기고자들에게는 아량 넓고 관심 깊은 레거시 매체의 해리티지 수혜를 본다.
조선의 문화 면은 아직도 최고다. 영화 평론으로 신춘문예를 낼 수 있는 곳은 동아가 유일하다. 올해 동아 신춘문예 영평 당선인은 1974년생이었다. 씨네21이 관례를 깨고 경력직을 당선시킨 것과 대비되는 일이다. 조중동은 그런 애증이 깊게 벤 공간이다.
이 매체의 글들과 기사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조롱하는 일은 저 쪽의 펨코나 일베들과 다름없다. 그저 거울상의 데칼코마니다. 오늘도 하루 하루를 글쓰기로 애쓰시는 작가의 생활담의 제목만 보고 조롱을 씌운 포스팅을 보았다. 한심하다.
정체성의 거울에 갇힌 언론 소비는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손가락질하는 극우, 극단의 모습을 똑같이 닮았다. 정치적 트라이벌리즘 시대의 감정과 사실은 뒤 섞인다. 거기에 더해 근본없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끼리 끼리 히히덕 대기 일쑤다. 재앙이다.
지금은 말줄임표의 시대다.
어느 순간부터 '읽는다'는 행위가 의심스러워졌다. 읽지 않고 안다고 믿는다. 판단보다 감정이 먼저 반응한다. '조중동'이라는 세 글자를 보는 순간, 댓글창은 기다렸다는 듯 타자기의 리듬으로 조롱과 분노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웃고, 욕하고, 넘기고, 또 같은 걸 반복한다. 기사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 언론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류가 되고, 오류이니 조롱해도 된다는 판단이 작동한다.
언제부터인가, 말줄임표가 진실을 대신하게 되었다. "어휴, 또 조선일보야..."라는 식의 멸시에는 더 이상 구체적인 비판이나 논증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집단의 정서'이며, 소속의 표식이다.
시대는 감정으로 말하고 정체성으로 듣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적 트라이벌리즘은 오늘날 공적 담론의 정서를 결정짓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다. '사회정체성이론'은 인간이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자아를 형성하고, 타 집단을 열등하게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한다고 말한다. 그 구조 속에서 언론도, 진실도, 심지어 논리조차 이분법적으로 편성된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를 묻지 않는다. '누가' 말했는가만을 본다. 조선일보가 말하면, 그것이 아무리 문학면의 조용한 시평이더라도 비판의 칼날이 향한다. 그 언론이 그것을 말했으니,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반사적 불신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인지적 부조화와도 연결된다. 나의 세계관과 맞지 않는 정보를 접하면, 그것을 재구성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심리적 균형을 되찾으려는 심성 작용이다. 그렇게 우리는 정보가 아니라 감정으로 읽고, 사실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듣는다.
결국 언론을 조롱하며 언론을 닮아간다.
그들을 비아냥 대면서 그들을 닮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중동을 조롱하는 이들조차 또 다른 확증 편향의 소비자가 되어간다. 기사는 읽히지 않고, 제목은 전장이 된다. 링크가 공유되기 무섭게, 커뮤니티는 입장을 정하고, 판단은 감정을 확증하기 위한 장치로만 작동한다.
이는 미국 정치에서 나타난 감정적 양극화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공화당 지지자는 MSNBC를, 민주당 지지자는 FOX News를 '적'으로 간주하고, 서로의 정보는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그 결과, 언론은 더 이상 사실을 전하는 통로가 아니라 정체성을 소비하는 공간이 된다. 자본은 이를 이용하여 그 틈을 더 벌린다.
한국의 온라인 공간 또한 다르지 않다. 조중동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권력 편향, 보도 왜곡, 저널리즘 윤리의 부재에 근거하여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면의 서평 하나, 일반인의 인터뷰 기사 하나조차도 '그곳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전시되고 조롱당할 때, 우리는 비판의 형식을 빌려 감정의 의식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윤리 없는 분노는, 분노 없는 윤리보다 늘 위험하다.
비판은 감정의 반사가 아니라 사유의 노동이다. 언론을 감시한다는 것은 언론이 지녀야 할 윤리적 척도와 감시의 기준을 스스로 실천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의 혐오적 조롱은 윤리의 부재를 비판하면서, 또 다른 윤리 부재를 낳는다.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에서 "뉴스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의 대부분을 결정짓는 형식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특정 언론을 소비하거나 조롱하는 방식은, 단지 언론을 향한 태도가 아니라, 곧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조롱은 해명이나 저항이 되지 못한다. 웃음은 쉽지만, 진실은 읽어야 한다.
다시, '읽기'라는 저항이 필요한 때다.
지금 우리가 조롱하고 있는 이 대상은, 정말 읽은 것인가, 아니면 내 안의 분노가 대신 읽어준 것인가. 다시 묻는다. 기사는 언제부터 적이 되었는가. 언론사는 언제부터 진영의 기표가 되었으며, 우리는 언제부터 기사 한 줄 없이도 입장을 정할 수 있게 되었는가.
정치적 트라이벌리즘은 단지 정치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이며, 인식의 문제이고, 윤리의 문제다. 우리는 언론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감정에 휘둘리는 방식으로 비판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때, 우리는 조중동을 욕하면서도 조중동을 닮아가는 역설에 직면한다.
다시 읽는 것, 다시 생각하는 것, 다시 질문하는 것. 그것이 진짜 저항이며, 감정의 정치를 넘어서는 사유의 실천이다.
한심한 글들을 멀리했다는 말이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