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4 폭력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더 글로리> (2022-2023), <광장> (2025)

by 박 스테파노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세간의 관심 속에 여러 계절을 지난 지금, 작품의 완성도와 스토리텔링의 미진함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경험과 기준에 따라 엇갈릴 수 있다. 개인적으로 드라마적 구조와 연출, 작화의 영역만 놓고 본다면 솔직히 아쉬움이 크다. 김은숙 작가 특유의 번뜩이는 대사들이 살아 있기는 하나, 그것이 화면 위에 얹히면 수채화 바탕 위에 던져진 유화 물감처럼 이질적으로 튀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타이틀 롤 송혜교의 연기 또한 업력을 고려하면 한계에 다다른 채 쥐어 짜낸 흔적이 보여 안쓰럽다. 연령과 경험에 맞는 역할을 맡는다면 보다 자연스러운 호흡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흥행에 성공했다. 이전에도 영화에 대한 논의를 반복하며, ‘좋은 작품’의 기준이란 과연 식자들의 찬사로만 존재하는 난해한 영역인가, 아니면 모두가 손뼉을 치며 공감하는 순간에도 충만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 바 있다. <더 글로리> 역시 그 양가감정을 동일하게 불러일으킨다.


작품을 순수하게 비평적으로 평가하는 영역을 뒤로하면, 대중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핵심은 단연 ‘주제’에 있다. 그것은 ‘복수’다. 흔히 이 드라마를 ‘학폭 르포르타주’ 정도로 단정하는 시선이 존재하지만, 사실상 드라마 속 학교 폭력은 복수를 위한 구실, 사건을 전개시키는 도화선일 뿐이다. 그 구조적 양태와 사회적 영향, 그리고 폭력이 일상에 스며드는 타성에 대한 성찰은 철저히 생략된다.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복수라는 이름에 많은 사람이 폭력에 박수를 보낸다. AI Sora


그런 의미에서 <더 글로리>를 보고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논하는 리뷰는 어쩐지 당황스럽다. 물론 등장인물의 행위가 현행 형법에서 어떤 법적 구속력을 지니는지 분석하는 법조 콘텐츠보다는 나은 관찰이긴 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적 이슈인 ‘학폭’을 미끼로 던져놓고, 우리는 유혈 낭자한 통쾌함 속에서 단지 카타르시스를 소비하고 마는 것이 옳은가, 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통쾌함의 그림자 - 현대 복수극의 윤리적 파장


드라마 <글로리>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전형적 복수극의 플롯은 대개 전반부에서 ‘끔찍한 사건’의 서사를 상세히 그리며, 주인공이 범죄나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겪은 상처의 크기와 깊이를 보여주는 데 많은 힘을 쏟는다. 반면 또 다른 형태의 복수극은 후반부 ‘복수의 행위’에 중심을 둔다.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기보다 주인공이 복수를 계획하고, 적대자를 찾아내 맞서며 행위를 실현하는 순간에 집중한다. 두 방식이 혼합되기도 한다. 이렇게 플롯에 따라 작품이 전달하는 복수의 의미와 시선은 달라진다.


<더 글로리>는 두 플롯을 소규모로 차용했지만, 결국 후자, ‘복수의 행위’에 더 힘을 실었다. 이유는 단 하나, ‘통쾌함’이라는 카타르시스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21세기 들어 극장과 OTT 플랫폼에서 복수를 다루는 작품은 흔하다. 주제가 복수가 아니더라도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복수 장치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2010년 이후 개봉작만 살펴도 <용서는 없다>, <파괴된 사나이>, <해결사>, <죽이고 싶은>, <이끼>, <황해>, <혈투> 등이 저절로 떠오른다. 드라마 역시 <빈센조>, <법쩐>, 시리즈 연속 흥행한 복수 대행 드라마 <모범택시> 등이 그 범주에 포함된다. 그 외 콘텐츠에서도 직접적 주제가 아니더라도 사건 중심의 장르라면 크고 작게 복수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 있다.


많은 작품이 복수의 서사를 담는 이유는 분명하다. 작품성과 상업적 성공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문화적 욕망 때문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이야기를 제작하는 순간 그것은 타인에게 선보이는 공개적 생산물이 되며, 평가에 노출된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작품성과 대중적 소비의 프레임을 동시에 통과해야 한다.


복수의 서사는 두마리의 토끼를 잡는 묘약이다. AI Sora


복수는 어쩌면 인류가 뜻밖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해결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속 가해자들은, 주인공 동은의 표현을 빌리면, 죽어 마땅한 악인들이다. 입체적 존재가 아닌 평면적 ‘나쁜 놈’들. 그래서 우리는 통쾌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통쾌함 속에서 찜찜함이 남는다. 동은의 복수 또한 폭력의 연장선이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학교 폭력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직면한다’며 자신을 위로하며 말이다.


인류는 긴 유랑과 수렵, 유목의 세월을 지나 비옥한 토지와 농업의 발달 속에 공동체적 한계를 경험했다.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있어도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서로 부대끼며 살던 시절, 본능적 분노와 보복은 파괴적 연쇄를 낳았다. 손해를 손해로 갚는 행위는 초기에는 자기 소유를 지키기 위한 방어였지만, 멈추지 않으면 공멸로 치닫는다.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지배 계급은 ‘납득 가능한 중재’를 시도했을 것이고, 감옥이나 화폐경제가 없던 시절에는 동해보복이 유일한 통제 수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해보복은 법과 권력이 개입하지 못하는 곳에서 힘없고 배경 없는 이들의 폭력으로 전이될 수 있다. 나의 단정과 확신이 단지 개인적 감정의 끝에서 나온 것이라면,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낳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더 글로리>는 사회적·철학적 성찰과 사유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학교 폭력을 전면에 내세워 마케팅하면서도, 결국 그 이야기는 사라지고, 전형적 복수의 자극적 순간만 남는다. 복수 행위가 미치는 다층적 파장은 무시되며, 오직 ‘통쾌함’만 소비된다.



폭력의 반대말은 폭력이다


2014년 2월 18일, 전남 순천의 K고등학교 2학년이던 송 군은 지각했다는 이유로 담임교사에게 체벌을 받았다. 체벌 과정에서 머리를 벽에 부딪쳤고, 같은 날 오후 다니던 태권도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뇌사 상태에 빠졌다. 송 군은 뇌사 22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책임 공방은 오래 지속됐다. 교사는 체벌을 인정했지만, 그것이 뇌사의 직접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반대로 유가족은 교사의 체벌이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작은 소도시의 한 학생이 담임교사에게 체벌을 받은 날 저녁, 뇌사 상태에 빠지고 결국 사망한 사건은 네티즌들의 관심을 크게 모았다. 당시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를 차지하며, 사건은 순식간에 사회적 화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현장 취재는 제한적이었다. 기자들은 지인과 주변을 탐문하기보다 인터넷을 뒤져 사건의 경위와 네티즌 의견 공방을 살피는 데 그쳤다. 많은 사람은 체벌 교사의 폭력을 비난하며 그의 자질을 의심했고, 청원 운동으로 공분을 표출했다. 그러나 몇 달간 이어진 경찰 수사와 교육청 감사 과정에서 진상 규명은 더뎠고, 2015년 5월에는 같은 학교 학생이던 송 군의 동생이 학교 복도에서 쓰러져 뇌사 판정을 받는 사건까지 이어졌다. 형과 동생 사건의 유관 관계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추후 취재 과정에서 학교 학생들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사건의 중심에 있던 교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매일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건을 단순히 교사의 일탈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학생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가족을 돌보는 존재였다는 사실은 공분을 부채질했지만, 그것이 학교에서 발생한 폭력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의 체벌 책임을 경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건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우리 사회에 깊숙이 침윤한 폭력의 타성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교 폭력은 제도에 의한 객관적 폭력에 가깝다. AI Sora


한국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국가폭력과 사회 구조적 폭력은 빼놓을 수 없다. 관련 연구와 미디어, 출판의 조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에 쉽게 노출되고, 폭력에 둔감한 대중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던 중 매년 반복되는 ‘학교 폭력’ 이야기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폭력은 무엇인가?’부터, ‘정의라고 믿는 행위도 폭력이 될 수 있는가?’까지, 다양한 답을 낳는 논쟁적 물음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합의할 수 있는 폭력의 정의는 무엇이며, 그렇다면 폭력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이 의문은 우리의 사유 공간을 깊게 잠식한다.


슬라보이 지제크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폭력을 이해하는 사유를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준다. 부제가 ‘폭력에 대한 삐딱한 6가지 성찰’인 만큼 읽기는 쉽지 않지만, 인내하며 읽으면 폭력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얻는다. 지제크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동일선상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경험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 상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객관적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주관적으로 폭력을 지각할 때 바로 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폭력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지제크의 폭력 분류는 주관적·객관적이며, 객관적 폭력은 다시 상징적·구조적 폭력으로 나뉜다. 주관적 폭력은 행위자가 식별 가능하며, ‘누구’, ‘어떤 사람’으로 손가락질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언어를 통한 상징적 폭력, 정치·사회·경제 시스템 속 구조적 폭력이 대표적이다.


사회학자 존 도커는 폭력이 비정상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 행동 고유의 특성임을 강조한다. 개인 간 살인과 집단 간 학살은 인류사의 어느 시기에도 발생했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 경고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일신 신앙이 주류인 현대 사회에서 폭력은 종종 ‘신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객관화된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하고 소수를 학대하는 일은 고대 성경에서 현대 국지전까지 변함없이 포장된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도덕률은 흔한 구호가 되었다. 그러나 그 말은 종종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전 포석이 된다. 폭력을 증오하며 응징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되지만, 그 방법 역시 폭력이라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미국을 흔히 ‘폭력의 역사 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비판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는 그 실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평온한 시골 마을의 식당 주인 톰(비고 모텐슨)의 일상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그의 과거와 폭력적 본성이 드러난다. 톰은 주변인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지만, 가족과 아들은 그의 폭력 유전자를 반복하며 사건을 재생한다. 결국 톰은 자신의 폭력의 근원을 처단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향하고, 다시 폭력으로 폭력을 끊으려 한다. 폭력의 역사는 사슬처럼 되풀이될 뿐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AI Sora


주변 사람들이 폭력에 관대할 때, 우리는 그 관대함을 은연중에 느낀다. 특히 ‘복수’는 참 관대하게 용인된다. 나 역시 그 주변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동일한 ‘학교 폭력’의 양상도 자기모순적으로 분리하여 인식한다. 가해 집단이 폭력을 행사하면 사회적 배경과 경제적 불평등에 분노하지만, 피해자 집단의 폭력은 ‘가정 폭력’으로 치부하며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폭력 양상은 늘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종종 길 건너편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폭력의 반대말’을 찾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문헌과 영화, 드라마를 되새길수록 정답은 점점 흐려졌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대척점에 권력이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체득할 만큼의 지적 탐구력과 학문적 깊이를 갖지 못했다.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어릴 적 성당에서 강조하던 평화를 떠올렸고, 과거 비평에서 논의한 ‘용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어떤 하나를 폭력의 반대말로 확정할 수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폭력의 반대말은, 폭력이었다.



복수의 사슬, 정의와 폭력 사이에서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대중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 도사린 위험을 놓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판단을 개인의 영역이 아닌 ‘모두의 판단’이라 착각한다. 그렇게 되면 사건의 입체적 양상은 단면으로 잘려 오판되기 쉽다. 소수의 다른 의견이나 다양한 판단을 ‘사회적 비용’이라 치부하며,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칼이 답’이라 말하는 순간, 잠재적 폭력이 배어든 사고의 틈이 드러난다. 정보가 희박한 타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해외의 전쟁과 분란, 가십처럼 유포되는 사건들 속에서, 목소리 큰 사람의 주장이 곧 ‘정의’가 되곤 한다.


정의의 기준은 생각보다 다채롭다. 이해하기 힘든 세상 현상을 앞에 두고 ‘어쩔 수 없어’라 자위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순간, 시시껄렁한 ‘복수’의 마음이 얼굴을 내민다. 지금도 일구어 놓은 작은 결실을 기다리는 사이, 팔자와 신세에 대한 푸념은 여전히 마음 구석을 점유한다.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의 시선과 말들이 혹시나 ‘복수’의 마음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그리고 현재 권력을 부여잡은 이들이 정의라 믿는 것이 과연 복수는 아닌지 의문이 스며든다.


<더 글로리>의 흥행을 논하며 사적 복수를 살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복수, 그리고 그 정의가 지닌 다채로운 얼굴. 각자의 정의를 통일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전체주의’나 ‘독재’라 경계하는 바로 그것이다. 자유 민주주의가 존중하는 다원적 평가 속에서 정의는 서로 달리 나타나고, 이를 규율하는 장치가 곧 ‘권력’이다. 다수의 위임을 통해 정당화된 권력만이 정의를 규준하고, 사적 복수를 제어할 수 있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폭력의 대척점에 권력이 있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복수심은 본질적으로 사적 영역의 감정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 등장하는 순간 즉시 사회적 사건이 된다. 개인적 영역의 것이 공공화될 때 필요한 장치는 법과 규제다. 그러나 드라마나 현실은 이 테두리 안에서 만족스러운 결론을 제공하지 못한다. 결국 복수는 다시 ‘개인적 것’으로 돌아오며, 폭력의 반대말이 폭력으로 환원되는 아이러니를 재현한다.


복수는 불편과 두려움의 포르노다. AI Sora


<더 글로리>에서 인간은 가장 추악한 면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개인의 복수든 사회의 복수든, 그 잔혹함을 관객 앞에 적나라하게 펼친다. 이유는 단순하다. 관객에게 불편과 두려움을 주고, 정서적으로 복수심에 공감하게 하되, 실제 그 행위에 동의를 주저하게 만드는 장치다. 드라마는 인간의 악순환적 복수 사슬을 끊지 않고 이어가며, 관심을 모은 뒤에도 반복되는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복수와 응징만을 남긴다.


복수 플롯의 차이와 유사함을 떠나, 우리는 하나를 공감할 수 있다. 복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복수의 잔혹함을 이야기하며 구원을 말하는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순 속에서조차, 적어도 복수의 부질없음을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



허공의 광장 - 복수 서사의 재발견과 성찰


최근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가상의 스크린 위에 <광장>이 선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의 제목이 지시하는 ‘광장’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선다. 그것은 욕망과 분노가 끊임없이 부딪히고, 배신과 복수의 얼룩이 번지는 혼돈의 아레나다. 그 한가운데서 개인은 ‘복수’라는 칼날을 쥐고 저마다의 정의를 휘두르지만, 광장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복수의 불꽃은 때로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의 무게를 태워버리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내적 분열을 드러낸다. 화면을 뚫을 듯 휘젓는 통쾌함의 카타르시스가 지배하는 이 광장은, 역설적으로 점점 빈 공간이 되어간다.


한국 드라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복수 서사라는 이름 아래 익숙한 선율을 반복해왔다. 특히 웹툰과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수많은 작품이 이 텅 빈 광장을 메우며, ‘복수’를 빌려 손쉬운 통쾌함만을 좇는다. 그 속에서 복수는 더 이상 아픔을 응시하거나 갈등을 성찰하는 서사가 아니다. 단지 격렬한 감정의 폭발과 스펙터클한 응징의 무대일 뿐이다.


이야기의 깊이는 파편처럼 흩어지고, 웹툰과 웹소설 특유의 속도감과 흡입력은 역설적으로 서사의 뿌리를 허문다. 캐릭터의 내면은 단순화된 대사와 횡설수설하는 감정 속에 가려지고, 복수에 얽힌 윤리적 갈등과 사회적 맥락은 흐릿해진다. 감정은 휘발되고, 분노는 표피적이며, 시청자에게 남는 것은 순간적 카타르시스뿐이다.


복수라는 무거운 이름 아래 펼쳐진 이 허울뿐인 광장은 결국 우리 시대의 진짜 상처를 가린다. 복수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공유하는 깊은 갈등과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의 응어리를 품은 채 성장해야 할 치유의 여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는 이 여정을 등한시하고, 가벼운 자극과 피상적 감정 소비를 반복하며 허공을 헤맨다.


또 다른 복수의 서사 <광장>. AI Sora


<광장>이 그럼에도 눈길을 잡는 이유는, 복수의 무게를 짊어진 인물들이 보여주는 처절한 자기 부정과 끝없는 갈등 때문이다. 그들은 복수의 칼날에 찔리면서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수극은 이러한 내면의 균열을 은폐하며, ‘한 방’의 쾌감을 위해 얄팍한 분노만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묻는다. 왜 복수는 단순한 분노의 폭발로 끝나는가? 왜 그 안에 숨겨진 인간의 상처와 사회적 모순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가? 복수는 차가운 칼날이자, 동시에 뜨거운 불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와 공동체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다. 복수 서사의 재발견과 성찰은 단지 장르적 유행이 아니라, 삶과 공동체가 마주한 고통과 희망을 다시 쓰는 일이다. 그때야 비로소 복수는 허상의 광장을 넘어 우리 내면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다.


복수 서사가 진정한 힘을 회복하려면, 복수에 깃든 역사적 무게와 인간 심연의 복잡한 층위, 그리고 사회적 맥락을 통합하는 새로운 서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영화와 드라마가 단순히 분노와 폭력의 대리자가 아니라, 복수를 통해 인간 존재의 상처와 회복, 그리고 공동체의 근본적 물음을 깊이 성찰할 때, 비로소 복수는 무게 있는 언어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복수의 칼날 아래, 남겨진 그림자


복수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얼굴이다. 무너진 정의 앞에서 한 개인이 품은 분노는 오랜 시간 서사를 끌고 가는 검은 불꽃으로 번졌다. 그러나 그 불꽃은 누구를 태우는가. 단지 악인을 처벌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세계를 겨냥한 내면의 균열을 밝히기 위함인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어 주목을 받은 <더 글로리>는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들었다. 한 여성이 과거 학폭 가해자들을 찾아 잔혹하게 복수하는 구조의 드라마는, 한국 콘텐츠 시장의 복수 서사에 대한 집착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최근 스트리밍을 시작한 <광장>은 한때 ‘동반자’였던 주인공이 치밀하게 ‘응징자’로 탈바꿈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도덕적 불균형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정당화되는 일종의 통쾌한 장르놀이로서 복수는 소비된다. 플롯은 매끄럽게 흐르고 스타일은 자극적이지만, 서사의 골수는 비어 있다. 정의란 무엇이며, 복수는 무엇을 구원하는가 하는 질문은 제쳐진 채, 남는 것은 오직 ‘누가 어떻게 파멸되는가’에 집중된 긴장감뿐이다.


이러한 복수 서사의 범람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뿌리 깊은 경향성을 보여준다. 특히 웹툰과 웹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에서 단순화는 더욱 두드러지고, 이 경향은 오리지널 드라마 서사에도 이어진다. <더 글로리>, <복수해라>, <복수노트>, <마스크걸> 등 인기작들은 대개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 주인공은 폭력과 배신의 희생자로 살아오다, 어느 날 냉혹하고 정교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그 복수는 구조나 윤리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통쾌함이라는 감정적 지점을 겨냥하며 끝까지 단선적 리듬을 유지한다.


복수는 그저 팔리는 감각일지도. AI Sora


이런 서사에서 복수는 더 이상 ‘사회적 정의 회복’이나 ‘인간 내면의 그늘을 직면하는 서사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게임적 쾌감, 타인의 파멸을 바라보며 쾌재를 부르는 자극적 메커니즘이자, 짧고 강렬한 클립에 적합한 ‘팔리는 감정’일 뿐이다.


그러나 진짜 복수 서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에서 자식을 잃은 여성은 세 개의 광고판을 세워 침묵하는 경찰을 도발한다. 그녀의 분노는 정당하지만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또 다른 상처와 폭력을 낳는다. 결국 복수는 질문으로 남는다.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언포기버블>의 주인공은 한때 살인을 저질렀던 전과자다. 돌아온 사회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피해자 가족은 용서 대신 증오로 그녀를 가둔다. 이 복수는 물리적 폭력이 아닌 정서적 감옥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복수는 ‘정당함’이 아닌 ‘파국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은 법과 정의가 부패했을 때, 개인이 법을 넘어 정의를 구현하려는 시도를 다룬다. 그는 스스로 ‘정의의 행위자’가 되려 하지만, 결국 그 정의는 또 다른 폭력과 자기 파괴로 귀결된다. 이 서사는 복수가 언제 정의의 가면을 쓴 폭력이 되는지를 예리하게 묻는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가장 비정통적인 복수극이다. 여기서 복수는 총칼도, 물리적 폭력도 없이 이루어진다. 섬세한 심리 조작과 숨겨진 상처가 복수의 도구가 된다. 이 복수는 철저히 인간 내면—모호성, 권위 위계, 억압받은 욕망—의 뿌리에서 시작된다.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헤어질 결심>. AI Sora


이들 작품이 공유하는 것은, 복수를 단지 ‘행동’이 아닌 ‘물음’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복수는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비판이며,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욕망을 드러내는 렌즈다. 그들은 관객을 고통스러운 윤리적 딜레마 속에 밀어 넣고, 쉽게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 콘텐츠가 이러한 정교한 복수 서사를 놓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재미’가 곧 ‘성과’가 되는 시장 구조 때문이다. 자본은 철학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기획과 제작이 ‘확률 높은 성공’에 매몰된 환경에서 복수는 단지 ‘소비되기 쉬운’ 패턴으로 기능한다. 질문은 멈추고, 사유는 축소되며, 감정은 단순화된다.


결국 오늘날 한국 복수 서사 콘텐츠의 범람은 철학 없는 재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과거의 상처를 다루는 방식은 감각적 복제로 전락하고, 인간 내면의 균열과 사회 구조의 모순은 쉽게 패스된다. 그러나 복수라는 오래된 이야기는 여전히 무게 있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단 하나, 상처를 증오로만 말하지 않고, 그 속에서 구조를 보고 인간을 본다면, 콘텐츠는 그 복수의 화염 속에서 다시 묻기 시작해야 한다. “누가 진짜 가해자인가?” “무엇이 정의를 정의롭게 만드는가?” 그리고 “복수는 정말 세계를 바로잡는가, 아니면 더 깊은 균열로 이끄는가?”



복수 이후, 남은 질문들


보이지 않는 폭력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생활 속 사소한 억압과 모멸에 쉽게 분노하고, 참지 못하는 마음을 지닌다. 그 마음 속에 복수가 자리 잡으면, 확실한 응징과 통쾌함만이 받아들여지고, 용서나 회복은 심심한 이야기로 치부된다. 그러나 무엇을 극복하는 방법 중에 복수만큼 단순한 것도 없다. 설령 그 복수가 정당하다 해도, 그것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로 전환될 때, 성숙한 사유가 함께 요구된다.


영화와 드라마라는 현대적 서사 매체 속에서 복수는 관객의 감정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이자, 억압된 분노의 상징적 표출로 기능한다. 하지만 한국적 복수 서사는 감정의 폭발과 쾌감의 극대화에 머물고, 내면의 갈등이나 윤리적 모호함, 사회구조적 문제와 맞닿는 깊이는 희미해진다. 이 과정에서 서사는 단순한 원한과 권력 게임으로 환원되며, 관객에게는 빈 껍데기만 남는다.


<소년심판> 속 영악한 청소년 범죄를 손가락질하며 우리는 정의를 확인하는 듯하지만, <더 글로리> 속 피해자의 절망을 보며 움켜쥔 주먹은 또 다른 감각—연민과 분노—을 깨운다. 그러나 정작 복수 이후의 삶, 복수로 증명된 자아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서사에서 배제된다. 법과 제도의 무기력, 사회적 구조의 결핍 속에서 가해자는 면죄부를 얻고, 피해자는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채 살아가도록 강요된다.


학교 폭력, 디지털 언어폭력, 의도적 배제와 고립은 이제 단순한 ‘주관적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구조 속에 은폐된 ‘객관적 폭력’이며, 개인과 공동체의 반복적 상처로 자리 잡는다. 학폭을 이야기한다면, 피해자 개인의 서사만이 아니라, 이 구조적 폭력의 맥락까지 살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복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폭력의 고리를 깨뜨리고 사회적 구조 속 정의를 직시하는 일이다.


<쓰리 빌보드>와 <언포기버블>의 복수 너머 이야기. AI Sora


진정한 서사는 복수 이후를 상상할 때 발생한다.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에서 주인공은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하지만, 그 과정은 자기 파괴와 더 큰 혼란으로 귀결된다.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는 복수 끝에도 상실과 죄책 속에서 또 다른 질문과 마주한다. <언포기버블>의 루스는 사회가 제공하지 않은 용서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복수가 완성된 순간조차, 공허와 허무, 인간적 상흔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 콘텐츠가 놓치고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한 통쾌함, 짧은 카타르시스, 그리고 극적 폭력의 반복 속에서 복수는 끝나지만, 그 이후의 삶과 사회적 의미는 배제된다. 자본 중심의 콘텐츠 시장에서, 복수 이후의 윤리적 성찰과 인간 내면의 균열은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과 서사는 늘 자극의 반대편에서 태어난다. 상처와 폭력의 반복을 그대로 소비하는 대신, 그 이면의 구조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복수라는 낡은 서사 구조를 넘어설 준비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상처와 사회적 구조를 연결하고, 통쾌함이 아닌 성찰을 선택하는 서사. 복수의 칼날로 끝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은 질문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 상처를 기억하고, 폭력을 증오로만 말하지 않으며, 인간과 사회가 함께 서는 길을 상상하는 이야기. 그것이 지금 이 시대, 한국 콘텐츠가 맞닥뜨린 ‘다음 장’이다.


진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복수 이후, 남겨진 공허와 고통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로 상처를 기록하고, 질문하고,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복수는 또 다른 얼굴—회복, 전이, 연결—을 얻고, 서사는 진정한 무게를 되찾는다.


keyword
이전 16화13 마침내, 결국, 이제야, 기어코...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