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2022, Decision to Leave)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어쩌면 어두운 극장 안보다도 평단의 책상 위에서 더 깊고 길게 울렸을 영화일지 모른다. 관객이 느끼는 감탄과 애도의 여진이 있다면, 평론가들은 그 여진의 결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더듬어 가며 오래 붙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마음속 울림의 파장이라기보다, 단체 대화방에서 메시지가 끊임없이 울리는 것처럼—서로의 언어가 겹치고 진동하며,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그저 계속되는 말의 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말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반복되는 한 문장이 있다. ‘영화적인 영화의 진수.’ 그 말은 어디선가 번역어처럼 부유하며, 때때로 찬사로, 때로는 일종의 암호처럼 쓰인다. 그러나 영화라면 영화이지, ‘영화적인 영화’란 또 무엇인가. 이 수식에는 식자(識者)의 은근한 우월감이 묻어 있다. 흥행과 무관하게, 아니 오히려 흥행과 무관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명예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프로필 속 단어 하나에 부력을 주는, 보이지 않는 공기의 압력. 나는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다소 도발 섞인 제목의 작품을 떠올린다. ‘영화적인 영화’를 향한 신랄한 반박이자, 동시에 그 집착을 부정할 수 없는 자기 고백처럼 느껴지는.
영화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이제 너무도 진부하지만, 박찬욱의 영화를 마주할 때마다 새삼 소환된다. 영화는 이야기의 예술이다. 이야기란, 시간을 붙잡아 하나의 윤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인물들을 걷게 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하나는, 관객이 그 이야기를 실제처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핍진성’이라 부른다.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장면의 밀도와 연결의 설계가 너무도 정교하여, 관객의 시공간 감각이 잠시 왜곡되는 순간. 마치 꿈을 꾸면서도 그것이 꿈임을 모르는 상태처럼.
또 다른 길은 정반대다.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관객을 향해, 끊임없이 ‘깨어 있으라’고 손가락을 튕기는 방식. 불쑥 튀어나오는 내레이션, 스크린을 가로질러 배우가 던지는 방백, 혹은 일부러 드러내는 스튜디오 세트와 장비들.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효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장치들이다. 그 순간, 관객은 서사에서 튕겨 나와, 이 이야기가 이야기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때 필수처럼 따라붙는 수사가 있다. 미장센. 그리고 클리셰. ‘그놈의 미장센과 클리셰’라 말하며 비웃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쾌감을 부정하지 못한다.
박찬욱의 영화는 이런 의미에서 ‘영화적인 영화’의 완성형에 가깝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인’ 혹은 ‘영화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가장 기꺼이 탐닉하는 영화다. 그리고 나도 그 부류에 속한다. 그의 영화에는 영화 교과서의 주석이 될 만한 장면들이 차고 넘친다. 시그니처처럼 반복되는 사방무늬 벽지와 70년대 단독주택의 질감, 가끔씩 불쑥 삽입되는 내레이션, 원형(prototype)과 그 변주로 배치된 인물들, 대칭과 비대칭을 오가는 화면 구성, 그리고 봉우리 정상에서 내려다본 부감샷까지. 일반 관객이 무심히 흘려보낼 세공이, 그의 영화에서는 거의 모든 장면마다 조용히 빛난다.
그러나 그 정교함이, 때로는 관객을 지치게도 한다. 숨 쉴 틈조차 없이 밀려오는 완결된 이미지와 의도된 장치들—그 과잉의 미학은 경이롭지만, 동시에 피로를 낳는다. 마치 너무 잘 정리된 방에 오래 머물다 보면, 편안함보다 어쩐지 불편한 감각이 스며드는 것처럼. 박찬욱의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늘 경외와 피로를 동시에 선사한다.
복수의 변주, 사랑의 위장
박찬욱의 영화에는 오래 전부터 하나의 키워드가 붙어 다닌다. 복수. 그러나 그의 화면을 채우는 것은 단지 복수라는 단일한 감정만이 아니다. 가혹한 고문과 체벌, 비정상적인 성적 표현과 그 끝에서 터져 나오는 기묘한 웃음,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며드는 블랙 코미디의 한 점. 그 모든 괴상함들이 그의 세계관의 골격을 이룬다. 그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온전하지 않다. 나사 한두 개쯤은 빠진 듯,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이들이 서사의 중심을 잡는다. 그 결핍이야말로, 박찬욱의 영화에서 사건을 움직이는 힘이다.
이를테면 〈복수는 나의 것〉의 유괴범 류(신하균)는 청각장애인이고, 〈박쥐〉의 상현(송강호)는 사제이자 동시에 뱀파이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폭력과 허무의 한가운데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굴레에 갇힌 남자다. 이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사건과 맞닥뜨리지만, 그 사건을 감당하기엔 한참 모자란 존재다. 박찬욱은 이런 인물들을 전면에 세워,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는 감각과 관념을 의도적으로 뒤흔든다. 마치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는 세계의 바닥을 살짝 들춰, 그 밑에서 꿈틀대는 비정상의 질감을 보여주듯.
〈헤어질 결심〉에서 가장 낯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다. 사랑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전면에 서는 일이 드물었다. 나이가 들어서 찾아온 변화인지, 아니면 그가 평론가들이 흔히 언급하는 ‘기독교적 구원의 정수’를 사랑이라는 복음으로 바꾸어 들고 나온 것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 전조는 이미 〈아가씨〉에서 보였다. 다만 그때의 사랑은 소수자의 성애라는 한 겹의 필터를 씌운 채, 여전히 비주류의 영역에 머물렀다. 이번에는 훨씬 노골적이다. 제목부터가 사랑의 결단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노골성이야말로 오히려 낯설다.
많은 비평가들이 박찬욱의 세계를 ‘기독교적 원죄의식에 의한 구원’이라는 틀로 읽는다. 그의 영화 속 리벤지 배틀—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인물들이 주고받는 폭력과 보복—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죄의 기원을 변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담과 하와의 반역 이후, 선과 악의 경계가 불가피하게 흐릿해진 세계에서, 그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위치를 바꾼다. 한때 피해자였던 자가 가해자가 되고, 정의로웠던 자가 잔혹해진다. (그의 제작사 이름이 ‘모호필름’이라는 점은, 그 세계관의 핵심을 은근히 드러낸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박찬욱의 영화에는, 그 모든 종교적·윤리적 해석을 뚫고 지나가는 복수의 플롯이 있다. 복수를 빼면 이야기의 긴장은 헐거워진다. 초기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는 ‘복수 3부작’은 그 명백한 예다. 갚고, 또 되갚는 이야기. 치밀하게 조율된 인과 속에서, 한 번 던진 폭력의 돌멩이가 끝없이 물결을 일으킨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그 복수의 형식이 점점 모호해지고 변주를 거듭하지만, 근본적인 에너지원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박쥐〉에서는 종교적 의무와 인간적 욕망을 넘어서는 존재들의 복수가, 뱀파이어라는 형상으로 변주된다. 〈아가씨〉에서는 세계가 강요하는 선입견과 권력의 틀을 향한 복수가, 에로틱하고도 장난기 있는 미장센 속에 감춰진다. 그렇다면 〈헤어질 결심〉에서 복수는 어디에 있는가? 처음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 이야기로 읽히는 표면에서는 그 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영화의 잔상이 서서히 침전되자, 나는 그 속에서 복수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헤어질 결심’—이 말은 어쩌면 ‘복수심’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했기에, 그리고 그 사랑이 불가능해졌기에, 남는 것은 오직 결심뿐인, 부드럽고 치명적인 복수.
이별의 심연, 복수의 표면
스웨덴 추리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베크 형사처럼, 해준(박해일)은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는다. 그 품위는 단순한 인격적 미덕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지탱하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그러나 그 방어선은 자살 변사 사건의 유가족이자, 곧 두 건의 살인 사건(결과적으로)의 범인이 될 서래(탕웨이) 앞에서 은밀하게 흔들린다. 해준의 시선은 서래의 매혹을 완전히 외면하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금단지(禁斷地)로의 첫 발걸음이다.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히 ‘불륜’이라는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어쩐지 겉핥기에 가깝다. 육체적 격정이 거의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는 오히려 더 치명적으로 ‘불륜적’이다. 그 이유는 서로가 서 있는 자리 때문이다. 한쪽은 사건의 용의자이자 비밀의 소유자이고, 다른 한쪽은 그 비밀을 벗겨내야 하는 수사자(搜査者)다. 미셸 푸코가 말한 ‘시선의 권력’은 이 관계에서 복잡하게 뒤틀린다. 권력은 해준에게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서래가 그것을 역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다.
서래의 호감과 적극적 구애가 진실한 사랑인지, 아니면 자신의 불안정한 처지를 반전시키기 위한 전략인지, 영화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둔다. 반대로 해준은 그녀를 처음부터 ‘용의자’가 아니라 ‘유가족’으로 대한다. 아니, 유가족으로 대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이미 ‘사건’은 수사자의 마음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변질이 깊어질 무렵, 서래는 돌연 ‘헤어질 결심’을 선언한다.
연인 사이에서 이별 통보는 종종 예의 바른 문장으로 포장된 일종의 배신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계약의 단절을 알리는 폭력이자, 그 폭력의 이유는 대개 시간이 지나면 서사로 정당화된다. 상대의 선행한 배반에 대한 응징이거나,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균열에 대한 봉합이거나. 그러나 그 모든 경우에 이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감정적 보복의 기미, 즉 복수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서래의 ‘결심’은 단순한 관계 청산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끝낼 결심”이다. 그녀는 가정으로 돌아간 해준을 따라, 일부러 안개의 도시 이포로 찾아온다. 해준의 아내(이정현)가 “이포는 떠나는 곳이지, 찾아오는 곳이 아니다”라던 말은 곧 영화의 아이러니가 된다. 서래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 앞에서 더 확실하게 결심을 시각화하기 위해 그곳에 온다. 사랑을 완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이 관계는 두 사람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다. 해준에게 그것은 과거의 명성과 현재의 안정에 균열을 내는 위험이며, 서래에게는 현재의 정갈함과 미래의 희망을 무너뜨릴 위기다. 정신분석학적 언어로 말하자면, 서래는 ‘결핍’의 자리에 서 있다. 그녀의 이력—밀항한 독립운동가의 손녀, 출입국 관리와의 기묘한 결혼—는 이미 그녀가 역사와 사회의 변두리에서 유동하며 살아왔음을 드러낸다. 이 불안정한 삶에 필요한 것은 해준의 ‘품위’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품위란 공기처럼, 안정된 조건 위에서만 숨 쉬듯 존재한다. 서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품위를 지탱하는 세계 전체와 결별하기로 한다. 그것이 곧 그녀의 복수다.
결국 ‘헤어질 결심’이란, 사랑의 이름을 빌린 복수다. 대상은 해준 개인이 아니라,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든 모든 상황과 제도, 그리고 시간들이다. 그 모든 것들과의 결별을 통해 그녀는 역설적으로 자기 주체를 회수한다. 이별이 단순히 감정의 사망선고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해체이자 생존 전략이 되는 순간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 작품을 ‘서정적인 멜로’라고 규정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위에서 “당신은 절대 그런 이야기는 못 쓸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만들어낸 ‘멜로’는 결국 ‘복수’의 변주였다.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피막 아래 숨겨진 날카로운 칼날. 이것이야말로 박찬욱식 서정이다.
영화미학적 층위에서 본 ‘결심’의 장면들
박찬욱의 연출은 이 복수의 서사를 직설적으로 표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사를 통한 선언이 아니라, 장면의 배치와 프레임의 구도, 그리고 시각적 은유 속에 잠겨 있다. 이포의 바다, 그곳을 뒤덮는 안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가 사라진 공간’의 시각적 상징이다. 바다와 하늘, 육지와 수면, 너와 나의 구분이 흐려지는 장소. 시야를 가리는 안개는 서래와 해준이 서로를 완전히 규정할 수 없는 상태를 드러내며, 동시에 그 흐릿함 속에서 관계의 도피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 도피의 무대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것은 복수의 종착지로, ‘결심’의 형식이 실현되는 현장으로 변모한다.
이 영화에서 공간은 감정의 투사체다. 해준의 아파트, 경찰서, 사건 현장은 선명한 빛과 질서 정연한 구도로 배치된다. 반면 서래와의 만남이 깊어질수록 공간은 복잡해지고, 촬영각은 낮아지거나 비스듬해진다. 특히 계단과 절벽, 바다의 빈번한 등장은 상징적이다. 계단은 인물 관계의 기울어진 권력 구도를, 절벽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지점을, 바다는 전부를 삼키는 복수의 심연을 의미한다.
박찬욱은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감정 몰입 방식을 의도적으로 해체한다. 관객이 두 인물의 감정에 빠져들 만한 타이밍마다, 그는 수사 절차, 형사 보고서, CCTV 영상, 도청 장면 같은 ‘차가운’ 이미지를 삽입한다. 이것은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의 현대적 변주다. 관객은 멜로의 감상적 속도에 몸을 맡기지 못하고, 그 관계의 도덕적·정치적 의미를 자꾸만 재고하게 된다. 사랑의 서사 속에 범죄의 논리가 끊임없이 개입함으로써, 두 층위—감정과 윤리—는 결코 합쳐지지 않은 채 병치된다.
색채 또한 이 영화의 결심과 복수의 미학을 이끈다. 이포의 푸르고 회색빛이 도는 톤은 냉정과 불안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서래가 해준과 함께 있는 장면에는 부드러운 조명이 사용되지만, 그것은 따뜻함이 아니라 안개처럼 포근한 ‘가림’의 기능을 한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종종 인물의 얼굴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고, 반투명한 유리창이나 물결 너머로 포착한다. 이것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끝내 파악하지 못하는 관계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마지막 바다 장면은 전통적 멜로드라마의 클라이맥스와는 정반대의 미학을 취한다. 그것은 사랑의 완성이나 재회가 아니라, 의식된 사라짐과 자기 매장이다. 카메라는 서래를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다는 그녀를 삼키고, 해준의 시야는 안개와 파도에 막혀 있다. 이 장면은 사랑의 파국을 슬픔으로만 환원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서래의 선택이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 서사를 스스로 끝내는 적극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력 관계의 마지막 전복이며,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린 복수의 종결이다.
따라서 박찬욱이 말한 ‘서정적인 멜로’는, 표면의 잔잔한 파문과 달리, 깊은 수면 아래 잠복한 날카로운 칼날을 품고 있다.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수용하되, 그 안에서 복수와 결별의 형식을 변주한 것이다. ‘헤어질 결심’의 서정성은 감상적 눈물의 연못이 아니라,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심연이다. 그리고 그 심연은 관객이 안전하게 위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불현듯 자신이 발 딛고 있던 모래사장을 삼키는, 서서히 다가오는 조류에 가깝다.
마침내의 변주, 신파와 복수의 교차로
영화에서 ‘마침내’라는 단어는 처음엔 ‘결국’의 의미로, 서사의 당도에 가까운 중립적인 말로 쓰인다. 중간에 이르면 그것은 ‘이제야’의 의미로, 지연된 약속이 성취되는 듯한 온기를 띤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는 ‘기어코’의 뜻을 품는다. 그 기어코에는 다짐과 집착, 의지와 파국이 모두 섞여 있다. 그렇다면 박찬욱은 〈헤어질 결심〉을 통해, 세상에 소소히 복수하는 사랑 이야기를 마침내—기어코—이루어낸 것일까.
‘신파극’이라는 형식은, 원래 일제강점기 개화기 시절 유행하던 멜로드라마 연극을 지칭한다. 대개는 무르녹은 연애, 엽기적인 사건, 비극적인 운명 같은 강렬한 정서적 자극을 앞세운다. 주인공은 어려운 처지에 몰려 관객의 눈물을 짜내다가, 끝에는 행복을 되찾는다. 권선징악의 통속적 윤리관을 품었고, 지금은 ‘신파조’라는 말로, 감성을 억지로 자극하는 졸속 서사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멸적 별명 속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뻔한 사랑 이야기에 화내고, 울고, 기뻐한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어쩌면 복수를 덧댄 신파극이었을지도 모른다. 완성되기 어려운 사랑들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줄지어 서 있다. 가족을 위한 헌신이 범죄로 변질되는 이야기(〈복수는 나의 것〉), 사랑이라 속여온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의 함정(〈친절한 금자씨〉), 근친이라는 금기에 부딪친 누이와의 사랑(〈올드보이〉), 관능과 욕망, 그리고 소명 사이에서 찢기는 관계(〈박쥐〉), 금지된 모든 것에 사랑이라는 수단을 대입하는 이야기(〈아가씨〉)까지. 신파의 법칙처럼, 사랑은 어려울수록 제맛이라는 듯이.
〈헤어질 결심〉에서 그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모호함은 이포의 안개처럼 더 깊어지고, 사랑에 입혀진 복수의 플롯은 더 은밀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어쩐지 심심해졌다. 초기작 〈해가 뜨는 달〉은 논외로 하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미 주춤거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한층 의도된 듯 보인다.
제목만 보아도 그렇다. 설명 없이 단호히 서는 작품들이 있었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처럼 타이틀 그 자체가 선언인 영화들. 그런데 〈헤어질 결심〉이라니. 다시 수식어를 붙여야만 할 것 같은, 다시 주춤거리는 뉘앙스다. 혹시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번 도약한 이야기가 또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형식일까.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감독을 꼽자면, 봉준호와 박찬욱이 있다. 두 감독 모두 필모그래피 전체가 상호 텍스트처럼 서로를 비추고, 이전 작품과의 대화를 이어간다. 봉준호의 영화는 웹툰 같다. 시놉시스는 단순해도, 그 안에서 영상과 인물 관계가 끝없이 비틀리고 풍성해지는 ‘삑사리의 미학’이 있다. 반면 박찬욱의 영화는 소설 같다. 시각적인 것들이 가득 차 있지만, 곧 텍스트로 번역되어 관객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시나리오 책을 읽는 재미가 있다. 봉 감독이 학창 시절부터 만화를 즐겨 그리고 읽었다는 사실, 박 감독이 작품 구상에서 소설과 문학적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레퍼런스한다는 사실이 서로 대응된다.
영화를 보는 맛과 읽는 맛을 동시에 주는 것—그것이 ‘영화적인 영화’의 한 정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두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그리고 박찬욱의 이번 ‘마침내’가, ‘결국’인지, ‘이제야’인지, 아니면 ‘기어코’였는지는, 어쩌면 다음 작품이 알려줄지도 모른다.
지연된 사랑, 기어코 완성된 복수
〈헤어질 결심〉에서 복수는 더 이상 단순한 플롯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끝난 후의 잔열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의 한 형식이며, 동시에 사랑을 재구성하는 미학적 장치다. 서래가 바다 속으로 몸을 감추는 마지막 장면은, 단순한 자살이나 도피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를 ‘해체’하는 미학적 행위이며, 관계와 정서의 균형을 완전히 뒤흔드는 장치다. 사랑이라는 장이 종결될 때, 박찬욱은 그 끝을 관계의 파괴로 연출함으로써, 사랑과 복수를 결코 분리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서 복수는 단지 사건적 귀결이 아니라, 감정적·관계적 긴장 속에서 고유한 의미를 띠며, 관객에게 내밀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복수는 일종의 ‘지연된 사랑’의 변형태로 작동한다. 해준과 서래 사이의 감정은 결코 즉시 소진되지 않고, 안개처럼 흩어지며 틈새를 만든다. 사랑과 복수는 시간의 지연 속에서 서로를 비추며, 마침내(혹은 기어코) 서로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 브레히트적 소격 효과가 배치된 장면들—수사 절차, 형사 보고서, 도청 장면—은 감정적 몰입을 깨뜨리고, 관객에게 ‘왜 이런 결말을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을 강제한다. 이로써 사랑은 단순한 서정적 체험이 아니라, 복수와 얽힌 윤리적 행위, 곧 미학적 선택으로 전환된다.
더 나아가, 복수는 시대적 감정 구조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초기 박찬욱 영화의 복수는 명확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구도로 정의될 수 있었지만, 〈헤어질 결심〉의 복수는 모호하고, 주저하며,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은 감정의 집합이다. 현대의 사랑이 점점 더 불확실성과 자기소멸의 감각을 내재하듯, 이 영화 속 복수 또한 감정의 명확한 기표를 상실하고, 사랑과 엉켜 한 몸처럼 흐른다. 즉, 복수는 이제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관계와 세계에 대한 ‘섬세한 반격’이며, 사랑의 또 다른 이름으로 읽힌다.
시간성 또한 중요한 미학적 축이다. 서사의 결말이 지연되면서, 사랑과 복수는 동시에 현재적 체험이자 회상적 사유로 존재한다.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순간의 감정적 결정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교차하고 변형되는 감정의 층위를 드러낸다. 관객은 장면 하나하나에서 결정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의 파동과 감정적 잔류를 체감한다. 이때 복수는 과거와 현재, 개인적 감정과 사회적 구조가 얽히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적·미학적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헤어질 결심〉의 복수 서사는 계보학적 의미에서 박찬욱 영화의 오래된 테마의 귀환이자, 현대적 의미망으로 변형된 최신형이다. 관계 해체의 미학, 사랑과 복수의 상호침투, 지연된 시간성, 안개처럼 퍼지는 시대적 감정 구조가 서로 교차하며, ‘헤어질 결심’은 곧 ‘복수심’이라는 등식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 복수는 누군가를 향한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관계와 세계를 향한 섬세하고도 치밀한 반격이자,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