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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 많던 복숭아는 어디 갔을까?

<파과> (2025, The Old Woman With Knife)

by 박 스테파노

구병모의 동명 소설 <파과>는 많은 이들의 애정을 받아왔다. 민규동 감독은 그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에 도전했다. 원작 텍스트를 영상으로 변주하는 일은 흔하지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종이 위에 평면적으로 눌린 글자는 독자의 눈과 마음을 통과하며 다시 부풀어 오르는 잔상으로 남는다. 상상으로 그려낸 이미지는 때로 깊고 선명하여, 영상화는 그 잔상의 관성 혹은 선입견을 유지하거나 깨뜨리며 진일보하는 과정을 뜻한다. 말처럼 쉽지 않은 길이다.


소설 <파과>는 말의 리듬 속에서 호흡한다. ‘파과’라는 단어부터가 그러하다. 단단히 익어 스스로 터져버리는 열매, 그 순간은 파괴와 완성, 끝과 시작이 미묘하게 뒤섞인 경계 위에 서 있다. 작가는 그 경계를 따라 조용히 걸으며, 삶의 가장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노년의 암살자를 말과 말 사이에 정교하게 빚어낸다. 문장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인물의 호흡이며, 삶의 궤적이자 정서의 표면이다. 이런 문장이 감각의 부피와 결을 머금고 흐르는 서사를 영상으로 옮길 때, 그 언어의 밀도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는 감독 민규동에게 가장 난해한 과제였을 터다.


예컨대 이 문장.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 소설 <파과> 중에서


그러나 영화 <파과>는 이 핵심 과제를 다소 느슨하게 안아내는 듯하다. 노년 여성 킬러라는 독특하고 상징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녀 내면의 깊이는 얼굴 위에 얹힌 가면처럼 평면적이고,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함께 서사 안에서 깊이감 없이 흘러간다. 영화는 소설이 품고 있던 리듬과 침묵, 그리고 미묘한 감정들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지 못한 채, 단선적인 플롯의 흐름에 기대고 있다. 장면은 이어지지만 감정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 이야기는 전진하되, 인물들은 숨 쉬지 못한다.


소설이 영화로 되면 그 행간은 살아 있을까. Perplexity


앞서 인용한 ‘복숭아’와 ‘파과’는 원작에서 강렬한 은유이며 상징적 기표로 작동하지만, 영화 안에서는 그것을 발견하거나 체득하기 어렵다. ‘파과’라는 단어가 품은 중의적 다층성, 그리고 영화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복숭아는 이 작품의 심연을 건드리는 중요한 단서임에도, 영화는 그 단서를 놓친 채 흘러간다.



파과, 시간에 대하여 바라보는 두 시선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는 ‘으깨진 과일(破果)’이라는 뜻을 염두에 뒀는데, 결말을 맺은 뒤에는 그 안에 ‘이팔청춘(破瓜)’의 의미도 함께 담았다.”


구병모 작가가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이 고백은, 흠집 난 과일로서의 부패와 동시에 찬란한 청춘의 불꽃을 한 제목 안에 병치하며, 굳이 한자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확장했음을 시사한다. ‘파과’는 이중의 시간을 가리키는 다층적 기표다. 쇠락과 부활, 상흔과 번뜩임, ‘지나침’과 ‘죄’의 무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다. 누군가 해석한 대로 ‘흠집 난 과일’의 상처와 ‘二八’이 비추는 청춘과 노년의 교차는 작품이 품은 존재론적 모순을 선명히 드러낸다. 특히 소녀의 시간에서 노인의 나이까지 생존의 도구로 살아 온 조각(이혜영)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파과’라는 제목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구병모 작가는 소설 창작 초기 ‘破果(으깨진 과실)’의 이미지와 결말 직전 ‘破瓜(이팔청춘)’의 찬란한 청춘성을 결합하며, 이 서사가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시간의 무게임을 분명히 한다. 이 멋들어진 은유는 시간이라는 무거운 중첩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을 환기시킨다. 과일 중 가장 맛있고 아름다운 복숭아조차도 시간의 힘, 중력에 무너져 떨어져 상처 입은 낙오자가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저 썩어 문드러지는 퇴행만이 남는다. 소설 내내 ‘노인’이라 불리는 늙은 킬러 조각은 바로 그 후퇴와 미련의 기의이자 이름이다.


민규동 감독의 영화는 이 중의적 제목이 품은 부피를 화면에 풀어내려 했으나, 소설 문장의 내밀한 감각을 온전히 따라잡지 못한다. 전반부 느슨한 서사는 부패한 과실의 단면만 희미하게 드러내고, 그 속에 숨은 청춘의 열기를 놓쳐버린다. 중반 이후 서사의 조급함은 ‘부패와 파괴’가 아닌 ‘단절과 공백’으로 읽히며, 관객에게 메워야 할 해석의 틈을 남긴다. 그 여백마저도 관객이 스스로 채워야 하는 질문으로 남는다. 바로 그 틈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깨진 과실 너머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를 관객 스스로 묻도록 만드는 장치인 셈이다. 다층적 제목의 무게를 화면에 완전하게 옮기지 못했다는 역설적 고백이다.


파과라는 말의 의미. AI Sora


‘破果(으깨진 과실)’는 붉게 속살이 부서지는 순간의 상흔을 가리킨다. 존재가 깨어질 때 남는 갈래들, 상실이 흘려보낸 잔해들은 문장 속에서 계속 부풀어 오른다. 특히 ‘破瓜(청춘의 시간)’는 소년·소녀의 미묘한 생명력을 은유한다. 16세 빛나는 시간과 60대 노인의 퇴장하는 시간이 미묘하게 포개지며, ‘노인’의 고독 속에 청춘의 불꽃이 비집고 들어온다. ‘흠집 난 과일’과 ‘二八의 교차’는 작품 내재의 시간성과 존재 모순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영화 <파과>는 이 두 겹의 의미를 모두 화면에 담으려 하지만, 정작 절정에 이르러서는 ‘깨짐’만을 강조하고 ‘재생’의 여운은 관객에게 남긴다. 미장센의 구현이 서사의 중심을 빼앗은 탓이다. 여린 ‘손톱’이 억센 ‘짐승의 발톱(조각)’으로 자라나는 동안, 그 많던 복숭아들은 결국 파과가 되었을 터다.



복숭아 알러지, 관계의 독성과 달콤함


조각은 아버지를 죽인 살해자이며, 동시에 투우(김성철)를 보살피고 감싸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투우에게 조각은 도피처이자 이상향인 놀이공원 ‘해피랜드’에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며, 그래서 ‘맛있지만 먹으면 탈이 나는’ 복숭아처럼 양가적인 감정의 기표로 읽힌다. 이 감정은 복수와 용서 사이, 인간 내면 깊숙이 뿌리 내린 모순의 결을 드러낸다.


원작에서 복숭아 알러지는 투우의 몸이 기억하는 통증이다. 달콤한 과일을 입에 대는 순간, 알러지는 살갗 깊숙이 파고들어 감각을 마비시킨다. 이 이중적 체험은 투우가 조각에게 느끼는 ‘사랑과 증오의 교차’를 상징한다. 복숭아 알러지는 단순한 신체 반응을 넘어선다. 입술과 혀에 닿는 달콤함은 곧 고통으로 전환되고, 투우의 몸은 복수와 용서 사이를 떨면서 오간다.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는 욕망’이라는 극적 반전이 여기 깃들어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복숭아 알러지를 꽃가루 알러지로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복숭아가 지닌 존재론적 고뇌에서 멀어진 셈이다. 이는 일종의 의도하지 않은 디커플링 오류라 할 만하다. 영화는 과일가게 장면에서 복숭아를 비추고, 투우의 미묘한 표정을 잡지만, 알러지 발작 대신 ‘망설임’과 ‘흩어진 시선’을 보여준다. 복숭아는 단순히 먹을 수 없는 과일이 아닌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관계’의 상징으로 전환된다.


스크린에는 과일가게의 정적과 투우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클로즈업된다. 알러지 발작 대신 은은한 떨림이 남아, 관계의 독성과 달콤함이 어깨동무하는 듯 펼쳐진다. 복숭아 알러지는 곧 ‘사랑과 증오, 치명적 매혹’의 은유다. 그 껍질을 벗길 때마다 내밀한 감정의 지층이 드러나려 했으나, 결과는 아쉽게도 미완에 머문다.


투우는 사랑과 증오가 교차하는 양가의 존재다. AI Sora


기표는 조각(살해자) 대신 투우(피해자)의 감각을 통해 온전히 드러난다. 달콤함과 독성의 이중성, 혀끝에 맺힌 욕망과 몸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의 이질적 공존은 결국 ‘사랑과 증오가 교차하는 구조’를 상징한다. 복숭아 알러지는 투우가 조각에게 느끼는 연민과 원망, 분노와 그리움이라는 양가감을 응축하는 복합적 메타포로 기능한다.


이 기표는 복수와 용서, 욕망과 거부 사이에 걸린 인간 감정의 복합적 구조를 드러낸다. 달콤함은 유혹하지만, 그 안에 치명적 독성을 품어 도망치고 싶어진다. 투우와 조각의 관계는 이처럼 복숭아 알러지로 구체화된 메타포 위에 놓이며, 텍스트와 화면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잔향으로 남아야 했다.


민규동 감독과 구병모 작가 모두 인터뷰에서 ‘파과’라는 제목이 내포한 이중적 의미, 즉 ‘깨짐’과 ‘부패’, ‘시간의 죄’에 대해 언급했다. 알러지라는 양가 감정의 연결 고리는 복숭아라는 과일을 통해 조각과 투우의 어제를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 문장이 가진 미묘한 생기와 내면의 질감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했다. 영화 미학은 서사의 뼈대에 머무르고, 내면의 유기적 결합과 심층적 심리 묘사는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은퇴자의 고독 — ‘노인’이라는 이름의 시간적 단절


소설 속에서 자주 부르는 조각에 대한 또 다른 명명, ‘노인’은 단순한 생물학적 연령을 넘어서 서사의 핵심 키워드이자 존재론적 표식으로 작동한다. 킬러 조직에서 은퇴하며 ‘쓸모없음’의 경계로 밀려난 그에게 ‘노인’이라는 호명은, 곧 ‘과거와 단절된 시간’이라는 무거운 짐을 부여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시간’의 분열처럼, 폭력의 과거와 고독의 현재가 그의 존재 안에 겹겹이 얽혀 부유한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며, 미래로 열린 시간 속에서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멈춰 선다. 이로써 ‘은퇴’는 단순한 퇴장이 아니라 시간의 균열 속으로 몸을 던지는 심연의 행위가 된다.


은퇴한 울버린 이야기 <로건>. AI Sora


현실 세계에서 60대는 흔히 ‘은퇴 세대’라 불리지만, 경제적·사회적 구조는 ‘일해야만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가혹한 조건으로 그들을 내몬다. 이들은 2030 세대보다 더 오랜 시간 사회를 지탱하고 부양했지만, 이제는 각자도생의 문턱에 서 있다. <파과> 속 ‘노인’의 고독은 이 구조적 소외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나, 그가 화면 너머 관객에게 투사하는 외로움은 나이 듦과 단절, 그리고 여전히 살아내야 하는 숙명 앞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근원적 공포와 닮아 있다.


영화는 ‘노인’이라는 명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백발의 성성한 머리칼, 척수 문제로 떨리는 손끝, 은퇴한 킬러로서의 고독과 단절을 통해 존재의 무게를 드러낸다. ‘노인’은 단지 연령의 표상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과 싸우는 존재론적 주체로 존재한다. 그는 과거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시간은 그를 짓누르지만, 동시에 새로이 시작할 가능성을 은밀히 속삭인다. ‘파과’라는 제목이 품은 ‘깨진 과실’은 은퇴라는 시간의 파편 속에서 상실된 자아와 단절된 관계를 향한 은유가 된다.


은퇴자의 이 딜레마는 고전과 현대 영화·문학 속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된 주제다. 미즈 미켈슨의 <폴라>와 조지 클루니의 <아메리칸>은 은퇴한 킬러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결국 그 굴레를 벗지 못하는 존재임을 그려낸다. 최근 넷플릭스가 내놓는 은퇴 킬러 서사 또한 이 계보를 이어간다. 은퇴는 단순한 직업적 퇴장이 아니라, 정체성과 삶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시간이다. 울버린의 서글픈 영웅담 <로건>처럼,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자들이 세상의 ‘퇴물’로 치부되는 현실을 스크린은 묵묵히 비춘다.


은퇴자의 복수 이야기 <폴라>. AI Sora


<파과>가 그려내는 ‘노인’의 고독은 사회적 소외의 상징에 가깝다. ‘노인’은 단순한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 사회적 낙인과 구조적 배제를 짊어진다. 이 현실은 ‘은퇴’를 개인의 선택이나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으로 보지 않고, 강제된 단절로 규정한다. ‘노인’은 시대와 구조에 맞서 존재론적 항변자로서, 복수와 용서,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특히 여자의 몸으로 그 시간의 무게를 감당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중첩된 차별과 소외를 부여하며 그 고독의 깊이를 더한다.



문학의 언어에서 영화의 언어로의 번역


문학 원작을 영화로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은 결코 새롭지 않다. 수많은 텍스트가 지면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부피를 얻어 스크린과 브라운관으로 스며들었다. 그중 일부는 원작의 감흥을 충실히 재현했고, 또 다른 작품들은 원작을 뛰어넘는 재해석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이 모두가 ‘번역’이라는 행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라 할 수 있다. 문학이라는 출발어가 창조적 변형을 거쳐 영화라는 도착어로 재생산되는 과정은 언제나 고뇌와 실험의 연속이며, 그만큼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구병모의 원작 소설은 섬세한 문장과 깊이 있는 내면 묘사를 통해 ‘노인’의 삶에 무게와 질감을 부여한다. 문학은 언어의 미세한 리듬과 정서의 파편들을 한 줄 한 줄에 녹여 내는 데 탁월하다. 반면 영화는 시각적 이미지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면을 펼쳐 내야 한다. 이 전환의 과정에서 <파과>는 서사가 다소 납작해지는 한계를 맞닥뜨린다. ‘칼 끝에 사정을 두지 마라’와 ‘총으로 나비를 쏘지 마라’ 같은 대사는 작품이 품은 폭력과 연민의 긴장 관계를 응축해 보여 주지만, ‘복숭아 알러지’와 같은 다층적 기표가 시각적 미학에서 사라진 점은 깊은 미학적 숙고와 실험을 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파과>가 전혀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병모의 문장은 무수한 감정의 파편을 목소리 삼아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한 줄 한 줄의 문장 안에 ‘시간의 결’과 ‘기억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는 그 문장을 직접적인 언어로 풀어내기보다, 여백으로 남기고 이미지와 소리 속에서 부유시키려 시도한다. 이로 인해 서사의 단면은 납작해 보이지만, 동시에 관객에게 해석의 여백—제목이 지닌 다층성, 대사의 여운, 화면의 침묵—을 열어젖히는 미덕을 발휘한다.


킬러 은퇴물은 대개 ‘가족’, ‘복수’, ‘일상 회복’을 중심으로 다양한 결말을 제시한다. <파과>는 이 전형적 서사 틈새에 ‘양가적 감정의 파편’을 흘려 넣는다. 복숭아 알러지처럼 뜨겁고 치명적인 관계 위에 은퇴자의 외로움을 포갠다. 복수와 용서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미세하게 떨린다. 조각은 더 이상 살육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음을 깨닫지만, 과거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도 못한다. 이 지점에서 <파과>는 전통적 은퇴 서사를 ‘단절’이 아닌 ‘잔류하는 시간’ 위로 옮겨 놓으며, 서사의 깊은 잔향을 남긴다.


시간의 결과 기억의 상처가 담긴. AI Sora


복수는 <파과>에서 단순한 응징을 넘어선 존재론적 사유의 장으로 펼쳐진다. 조각의 복수는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고독을 꿰뚫는 행위이자,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며, 동시에 치명적인 자기 파괴의 서사이기도 하다. 그는 단지 가해자를 처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가 품은 상흔과 마주하며 그 무게를 견디려 한다. 이 과정에서 복수는 일차적 분노의 표출을 넘어 내면의 균열과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복합적 감정의 편린으로 작동한다. ‘깨진 과실’이라는 중층적 은유처럼, 복수는 상처 입은 존재가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다. 이 몸부림은 단호하면서도 애잔하다. 그래서 복수는 서사의 폭발점이자 동시에 치유의 가능성을 품는 역설적 공간으로서 <파과>의 내밀한 미덕이 된다.


더불어, <파과>의 복수 서사는 ‘관계의 재구성’이라는 미묘한 지평을 열어 놓는다. 투우와 조각의 관계는 복수와 용서가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의 그물망 위에 세워진다. 복수는 단절과 파괴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나, 동시에 남은 자들의 생존과 소통, 심지어 연민과 화해의 가능성을 내장한다. 복수의 서사는 죽음과 재생, 단절과 잔류, 그리고 끝내는 새로운 시간의 진입을 알리는 부름이기도 하다. 이처럼 <파과>는 복수를 ‘끝내 버려야 할 짐’으로만 그리지 않고, 고통의 자리에서 존재를 재성찰하고 관계의 새로운 형식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그려낸다. 복수가 지닌 이중적 구조는 우리 모두가 지닌 내면의 모순과 양가성을 드러내면서, 깊은 인간성의 풍경을 펼쳐 보인다.



상흔의 기호와 잔류하는 시간의 미학


<파과>의 두 중심 인물, ‘조각’과 ‘투우’라는 이름은 그것만으로도 해석의 기호가 된다.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부서진 ‘조각’은 무엇인가로부터 깎여나온 존재의 파편이며, 동시에 그 존재를 형상화하는 흔적이다. 아버지를 죽인 자이자, 투우를 돌보는 보호자로서, 증오와 그리움이 교차하는 이중적 인물. ‘조각’은 온전한 이름이라기보다 쪼개진 정체성을 드러내는 부재의 자국이다.


반면 ‘투우’는 들이받는 자 같으나, 실은 감정을 온몸으로 떠안고 견디는 자다.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도 멈추지 않는 존재, ‘투우’라는 이름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내닫기보다, 계속 부딪혀 오는 시간과 관계의 물결에 흔들리는 삶을 반영한다. 이 양가적 긴장 관계가 바로 〈파과〉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의 핵심 진동이다. 떨어진 과일과 지나간 시절, 복숭아와 알러지, 달콤함과 독성, 노인과 소년, 그리고 복수와 용서라는 이분법 속에 숨겨진 미묘한 떨림이다.


이 감정의 진동은 자연스레 철학적 사유로 확장된다.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 존재는 ‘자기 앞에 던져진 존재(Dasein)’다. 조각과 투우는 과거의 폭력과 상처를 몸에 품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던져진 자’다. 여기서 과거는 단순히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몸과 감각에 새겨진 알러지처럼 반복적으로 현재를 침범하는 구조다. 복숭아 알러지는 바로 이 점에서 기표이자 기의다. 달콤했던 관계가 고통으로 변질되는 경험, 애착과 증오가 분리할 수 없이 얽힌 양가적 기억. 레비나스가 말했듯, 타자는 나에게 상처를 남기면서도 동시에 나를 책임지게 만드는 존재다. 조각은 투우에게 바로 그런 타자다—피해자이자, 응답해야 할 존재로 남는다.


‘파과(破果)’라는 제목은 시간의 형이상학으로 확장된다. 깨진 과실은 단순히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정적 순간 이후 더는 이전 자신으로 머무를 수 없는 존재 분기점을 가리킨다. 청춘의 절정인 ‘破瓜’일 수도, 노년의 쇠락과 침묵인 ‘破果’일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나 이 두 시간 사이, 중첩된 경계 위에 서 있다. 〈파과〉는 바로 그 시간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존재의 균열과 윤리적 딜레마를 조명한다.


영화는 이 균열을 시각적으로 포착하려 했으나, 소설이 담아낸 문장이라는 시간의 결을 온전히 옮기지 못한다. 조각이 복숭아를 손에 쥐지 못하는 순간, 투우가 복숭아를 바라보다 멈칫하는 클로즈업에서 관객은 비로소 그 기호가 전하는 바를 듣는다. 복숭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관계의 기호다. 먹고 싶지만 먹으면 탈이 나는 것, 즉 사랑하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관계를 상징한다. 바르트의 기호학을 빌리자면, 복숭아는 ‘부드러움과 위험’이라는 이중적 의미망으로 관객의 무의식과 교감한다.


나아가 〈파과〉는 미학적으로 ‘잔류하는 시간’의 구조를 탐색한다. 대부분 킬러 은퇴 서사는 과거와의 단절 혹은 미래로의 이행이라는 서사 틀을 따른다. 그러나 〈파과〉는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진입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그린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오히려 ‘남아 있는’ 시간으로 존재한다. 조각과 투우는 파과된 과실처럼 썩어 가는 현재에 붙들려 있다. 시간은 전진하지 않고, 그 무게는 고통의 층위로 쌓인다. 이 정체된 시간 안에서 윤리는 단선적 복수의 구도로 환원되지 않고,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잔향으로 잔존한다.


분노와 증오의 종착지는 늘 허무다. AI Sora


결국 〈파과〉는 폭력의 기억과 돌봄의 기억이 겹쳐진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타자를 응시하고 응답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존재는 깨지지만, 깨진 존재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파과〉는 그 깨진 존재들을 단순히 치유하거나 구원하는 것을 넘어, 상흔에 의미를 부여하는 미학적 제안을 던진다. 과거를 잘라내는 일이 아니라,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묻는다. 파과된 시간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들—그들이야말로 이 시대 가장 섬세하고 위태로운 윤리적 실존이다.


복수는 〈파과〉에서 단순한 응징이나 정의의 실현을 넘는 허무한 행위로 그려진다. 조각과 투우의 내면에 새겨진 분노와 증오는 끝내 자신을 잠식하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마저 희미하게 만든다. 복수의 칼끝은 결국 자기 자신을 베는 칼날이 되고, 그 행위는 새로운 고통의 씨앗을 심는 일이다. 이 허무는 단지 서사의 비극적 결말로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지속되는 시간의 무게와 불가해한 인간 감정의 미묘한 파동으로 펼쳐진다. 그리하여 복수는 시간의 잔류 위에서 증폭하는 고통과 갈등의 층위를 드러내는 미학적 장치가 된다.


이 미학적 허무 속에서 〈파과〉는 ‘깨진 존재’가 스스로의 균열과 상흔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복수의 순환이 아무리 무의미해도, 그 무의미함마저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존재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 상처 입은 존재들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증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잔류하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감응과 연대를 모색한다. 복수의 허무함은 그렇게 관계의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용서도, 파괴도 아닌’ 애매한 중간자적 자리를 점유한다. 〈파과〉는 이 허무의 미학을 통해 인간 존재가 결코 단순한 선악의 구도로 환원되지 않는 복합적 심연임을 서늘하게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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