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2013, Michael Kohlhaas)
현실에서의 사적 제재는 법정의 판결문보다 빠르게, 그리고 더 넓은 무대를 점령하며 진행된다. 특히 온라인이라는 무경계의 장에서 그 열기는 극대화된다. SNS와 커뮤니티에는 매일, 억울함이 서류 대신 게시글로 제출된다. ‘화력 지원’, ‘좌표 찍기’라 불리는 집단적 행위는 경찰의 수사보다 촘촘한 감시를 가능하게 하고, 재판보다 즉각적인 처단을 수행한다.
사적 제재를 실행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광경에 열광하는 사람들. 그들은 왜 정당한 절차를 우회하며 비공식의 정의를 택하는가. KBS 〈시사직격: 온라인 사적 제재, 잘못 새겨진 낙인은 어떡하나〉가 던진 질문은 단순한 사회현상 보고를 넘어, 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어디까지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도덕철학적 물음이다.
tvN 드라마 〈빈센조〉의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 빈센조(송중기)는 극악무도한 재벌 2세 장준우(옥택연)를 천천히 피가 빠지게 한 뒤 까마귀밥으로 만든다. 명백한 살인이자 불법 행위였지만, 시청자들은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시청률은 15%에 육박했다. 이탈리아 마피아 출신인 그는 범죄자이자 악인이다. 그러나 그가 겨눈 대상 또한 ‘다른 악’이었고, 그 맞대결은 대중의 내면에서 묘한 정당성을 얻었다. 이 구조는 SBS 〈모범택시〉, tvN 〈마우스〉, 그리고 티빙에서 스트리밍했던 웹툰 원작 〈돼지의 왕〉에서도 반복된다. 모두 제도 밖에서 응징을 실현하는 서사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주먹은 뒤에서 때리는 주먹이다. 치사한 승리는 상대에게 모멸감을 줘서 효과가 좋다.”
〈빈센조〉 속 주인공이 재벌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검사 출신 변호사에게 던진 말이다. 그는 “어느 마피아 집안의 가훈”이라며 함정을 설계하고, ‘독수독과(毒樹毒果)’ 원칙에 가로막힌 공권력이 포기한 증거를 비합법적으로 쥐어낸다. 법이 멈춘 자리에서 그는 나머지 한 발을 내디딘다. 그 발걸음은 폭력으로 빚어진 사적 정의가 왜 이렇게도 매혹적인지를 대중의 심연에 새긴다.
왜 대중은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법을 무시한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인간 본성에 잠재한 ‘복수의 충동’이 현대 사회의 불평등, 공권력과 기득권에 대한 불신과 결합한 결과일지 모른다. 여기에 사법 체계가 현실을 따라잡는 속도의 지체가 ‘국민정서법’이라는 촉매를 더한다. 심리학자 마이클 맥컬러프는 『복수의 심리학』에서 복수심을 단순한 ‘질병’이나 ‘독’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복수심이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사회적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사회에서 복수는 억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응을 통해 위험을 억누르는 방식이었고, 그 습속은 여전히 우리의 정서에 남아 있다.
문제는 이 사적인 마음이 현실의 장(場)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복수심은 본래 사적인 심연에서 발생하지만, 일단 실행되면 즉시 사회적 사건으로 변환된다. 그 변환을 차단하거나 조절하는 장치는 ‘법과 규제’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서사와 현실은 이 장치가 기대만큼 작동하지 않는 세계다. 그래서 복수는 언제나 ‘개인의 것’으로 회귀하는 듯 보인다. 정의의 제도적 경로가 막힐 때, 사람들은 다시 원시적인 해결 방식으로 돌아가고, 그때 복수는 기묘하게 달콤해진다.
개인의 손으로 돌아 온 복수는 빠른 결말을 제공하고, 피해자의 무력감을 잠시나마 해소하는 착시를 준다. 그러나 질문해야 한다. “그 복수로 무엇이 진정 회복되었는가?” 만약 우리가 매듭을 원한다면, 그 결심과 행위가 철저히 ‘나의 것’이어야 한다. 대중, 여론, 언론, 심지어 법집행자조차도 대신 매듭을 지어줄 수 없다. 복수가 마지막 수단이라면, 그것은 타인의 구경거리가 아닌, 오롯이 당사자의 고독한 선택이어야 한다.
무언가를 극복하는 태도와 행위 가운데 복수만큼 단순하고, 신속해 보이는 것은 드물다. 하지만 ‘복수로 무엇이 회복되었는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의를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라 했지만, 복수는 종종 그 몫을 넘어서거나 빼앗는다. 매듭을 원한다면, 그 결심과 행위가 나의 것이어야 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복수가 마지막 수단이라면, 그것은 제3자나 대중, 여론, 언론, 심지어 법집행의 몫일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의 몫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감당’이야말로, 복수를 정의로 오인하지 않게 하는 마지막 경계일 것이다.
'정의'의 모습은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채롭다
부당한 권력 앞에 선 한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두 갈래다. 굴종하거나, 싸우거나.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의 주인공 콜하스(매즈 미켈슨)는 두 번째 길을 택한다. 그러나 그 싸움은 결코 영웅담으로만 남지 않는다.
마부와 말 중개상으로 성실히 살아가던 콜하스는 어느 날 국경의 다리에서 뜻밖의 장벽을 만난다. 새로 부임한 남작이 불법적으로 통행세를 징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부당함에 항의했으나, 그가 얻은 대가는 여윈 말 두 필과 폭행당한 하인,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하러 간 법정에서 돌아온 아내의 차가운 주검이었다. 이제 법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권력은 그의 딸까지 위협하며, 복종을 강요했다.
그 순간, 콜하스의 마음속에서 사적 감정과 공적 정의가 뒤섞인다. 처음에는 그저 ‘나의 것’을 되찾고자 했던 분노가, 점차 권력의 부패와 불의에 맞서는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나 그 확장은 곧 다른 폭력의 형식을 낳는다. 복수의 불꽃은 쉽게 정의의 불길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남작을 향한 무장 봉기를 계획한다.
영화 속 콜하스의 선택은 단순한 개인적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법이 부패했을 때, 우리는 어디까지 싸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 싸움은 필연적으로 피를 부르고, 그 피 위에 정의는 쉽게 서지 못한다. 클라이스트의 원작에서처럼, 콜하스는 승리와 패배의 경계에 서서 처형당한다. 이 비극의 핵심은, 콜하스가 결코 무모한 폭도나 냉혹한 복수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끝까지 법을 신뢰하려 했으나, 법이 그를 배신했다. 그리고 배신당한 인간은 종종 자기 손으로 정의를 구현하려 한다. 그때부터 정의와 복수의 경계는 흐려지고, 결국 한 개인의 투쟁은 제도적 폭력과 사적 폭력이 얽힌 회오리 속에서 소멸한다.
매즈 미켈슨이 나온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보게 된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은, 예상과 달리 결코 쉬운 영화가 아니었다. 화면 속 그의 투쟁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정의’와 ‘복수’라는 두 단어가 서로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흔들리는 이야기였다.
미하엘 콜하스가 봉기에 나선 직접적인 이유는 단 하나 — 정당한 절차에 의한 심판의 부재였다. 잃어버린 말 때문도, 아내의 죽음 때문도 아니었다. 딸이 묻는다. “왜 싸우는 거냐”고. 그는 대답한다.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 말 속에서, 정의와 복수의 경계가 희미하게 겹쳐진다. 절차 없는 심판은 정의가 아니며, 정의를 잃은 자는 복수의 언어를 빌려 말하게 된다. 콜하스가 지키고자 한 것은 바로 그 ‘절차’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종종 정의를 보편의 언어로 착각하지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채롭고 때로는 상충한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불합리 앞에서, 나 역시 ‘어쩔 수 없어’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 체념의 밑바닥에는 시시껄렁하지만 지독하게 날 선 ‘복수’의 기미가 숨어 있었다. 일구어 놓은 작은 결실을 조용히 기다리는 지금조차, 팔자와 신세를 탓하는 푸념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문득 의심하게 된다.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의 시선과 말들이, 사실은 정의를 향한 열망이 아니라 오래된 앙금, 곧 복수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는지. 그리고 지금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외치는 ‘정의’가, 실은 그들만의 복수는 아닌지. 정의가 복수로 위장할 때, 복수는 또 정의를 자처한다. 그 경계에서 우리는 자주 길을 잃는다.
‘말 두 필을 원래대로’ 속 정의의 실체
미하엘 콜하스가 고집스럽게 붙들었던 ‘말 두 필을 원래대로’는 단순한 가축의 회복이나 물질적 손해 배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 ‘원래대로’라는 언어 속에는 잃어버린 세계의 온도와 시간, 복원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의 존엄과 관계가 응축되어 있다. 이 요구는 개인의 사적 분노와 욕망이지만, 동시에 그가 맞서야 했던 무능하고 부조리한 공권력과 귀족 권력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저항이자 정의에 대한 의지의 표출이다.
그러나 이 ‘원래대로’라는 이상은 귀족들의 권력 논리에 의해 이미 변형되고 왜곡되어 있었다. 그들은 콜하스가 요구하는 복원의 공간을 부정하고, 법과 제도의 외피 속에 복수와 정의 사이의 간극을 덮어버렸다. 그 틈바구니에서 콜하스의 투쟁은 ‘정의’와 ‘복수’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한 인간의 절박한 복수심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 경계의 모호성은 단지 역사적 사례를 넘어, 인간 존재와 사회 질서가 갖는 본질적인 긴장을 드러낸다. 정의가 개인의 욕망과 사회 제도의 균형 위에 성립한다면, 복수는 이 균형이 무너졌을 때 파생하는 폭력적 응답이다. 마이클 맥컬러프가 『복수의 심리학』에서 말했듯, 복수심은 단순한 ‘독’이 아니라 사회적 딜레마를 극복하는 진화적 해결책이다. 복수는 고통받는 개인이 소속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상처를 가시화하고 사회적 응징을 요구하는 본능적 행위라는 점에서, 복수와 정의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양면이다.
이 점에서 콜하스의 싸움은 ‘사적 복수’와 ‘공적 정의’의 중첩이자 충돌을 보여주는 시적 이미지다. 그가 끝까지 붙잡았던 ‘원래대로’는 법과 제도가 완전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는 ‘존재론적 균열’이다. 존재론적 균열은 법의 빈틈, 사회의 부조리, 권력의 불투명함이 드러나는 곳이며, 그 틈새에서 개인은 복수와 정의 사이를 유영한다.
더욱이, 이 균열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이다. 푸코가 말한 권력-지식 체계 속에서, 법과 제도는 단지 권력 유지의 수단일 뿐 ‘정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법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권력자의 편에 설 때가 많으며, 그 과정에서 약자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콜하스의 분노와 투쟁은 바로 이 현실에 대한 ‘심연의 분노’였고, 이는 근대 법치주의의 한계에 대한 고발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사적 복수 현상—온라인 상의 ‘좌표 찍기’나 ‘화력지원’ 같은 집단적 사적 제재—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법과 공권력이 현실의 복잡한 사건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해결하지 못하자, 개인과 집단은 자신만의 정의를 강구하고 집행하려 한다. 이는 ‘법감정’과 ‘국민정서법’이라는 비공식적 법 체계가 작동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복수는 정의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자칫 ‘잘못 새겨진 낙인’으로 또 다른 부당함을 낳는다.
한편, 헤겔이 『법철학』에서 논한 복수의 의미는 흥미롭다. 그는 복수를 개인적 감정의 문제를 넘어,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인간 정신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공동체와 관계 맺는 과정으로 보았다. 복수는 자기 인식과 타자 인식의 미완성된 투쟁이며, 결국 자기정당화를 넘어 공동체적 화해와 정의 실현으로 가야 한다고 보았다. 콜하스의 투쟁은 바로 이 헤겔적 변증법의 ‘비가역성’과 ‘돌파’를 예시한다. 복수에 머문 순간, 그는 고립되었지만, 그가 내민 정의의 요구는 사회 전체를 향한 윤리적 물음으로 번져나갔다.
이처럼 ‘말 두 필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던 콜하스의 집요함은 복수와 정의, 개인과 공동체, 욕망과 제도 사이의 끝나지 않는 긴장의 장이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정의의 불확정성과 사적 복수의 위험을 다시 바라본다. 정의는 결코 단순한 법적 절차나 형식적 판결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균열을 견디는 긴 여정이며, 그 여정에 불굴의 인간 정신과 치명적 자기 모순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우리는 콜하스가 잃어버린 두 필의 말 너머에 놓인 존재론적 균열을 응시해야 한다. 그 균열은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정의와 복수 사이의 미로를 만들어낸다. 그 미로 속에서, 우리 역시 어느 한 지점에 서서 ‘원래대로’를 갈망하는 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정의와 복수, 조화와 칼끝 사이
이 지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에 등장하는 “정의는 조화지만, 복수는 자기만족이야”라는 대사는 날카로운 성찰을 던진다. 정의와 복수는 서로 닿지 않는 평행선이지만, 우리 삶의 공간에선 그 경계가 흐릿해지며, 복수는 정의로, 정의는 복수로 쉽게 변질될 수 있는 유동적 실체다.
정의는 조화이며 복수는 자기만족이라는 말은 단호한 경계이자, 동시에 오래도록 곱씹어야 할 질문이다. 정의는 결코 단독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타자와 세계,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시간과 역사와 맺는 조화의 끈이다. 조화는 대화와 상호 이해를 전제로 하며, 개인의 욕망과 집단의 질서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망 속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반면 복수는 고독한 완결이다. 자기 내부의 울림을 반복하며 자기 자신에게 봉인된다. 자기만족이라는 말은 결코 가벼운 허영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주체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일차적으로 확인하는 행위이며, 한편으로는 그 자신을 향한 가장 치명적인 폭력이기도 하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대중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법이 공허하게 울리고, 공권력이 불신의 구렁텅이에 빠질 때, 정의는 이상에 그치고 현실은 ‘복수’의 욕망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복수심이 때로 ‘모두’의 목소리인 양 왜곡된 단면으로 대체되고, 그 단면이 전부인 양 단정되어 사회적 담론을 점령할 때다.
복잡한 사건은 단순한 분노와 적의로 축소되고, 다양한 해석과 소수 의견은 ‘사회적 비용’이라는 이름 아래 배제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칼이 답’이라는 주장에는 겉으로는 명료함과 결단이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무수한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잠재적 폭력이 도사린다. 특히 불충분한 정보 속에서 멀리서 벌어지는 타인의 분쟁이나 외국의 전쟁, 그리고 가십으로 소비되는 사건에서 이 위험은 배가된다. 거기서는 언제나 ‘목소리 큰 자’의 정의가 ‘진실’인 양 행세하고, 결국 복수와 정의가 혼종이 된다.
정의가 조화라면,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망을 전제로 한다. 관계는 균열을 품지만 또한 치유와 화해의 가능성을 담는다. 복수는 그 관계망 바깥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고립된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고 머무는 자기완결의 지점이다. 이 둘 사이에서 인간은 매번 갈등하며, 그 갈등은 언제나 우리의 사회적 현실과 맞닿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간극을 응시해야 한다. 사적 복수의 폭발적 에너지가 종종 사회적 응징으로 착각되고, 법과 제도의 빈틈을 메우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욱 깊은 분열과 폭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폭력은 결국 또 다른 정의의 균열을 낳는다. 정의란 단지 형식적 판결이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며, 조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태도다. 복수의 자기만족은 그 순간 완결되어 보이지만, 내면에 숨겨진 고독과 허무를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복수와 정의 사이의 불가분한 긴장을 감내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 ‘정의는 조화’라는 원리를 잊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복수에 내재한 자기만족의 유혹을 경계하며, 사회적 대화와 포용, 그리고 치유를 위한 노력들이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결국 우리 모두의 상처를 감싸고, 파열된 세계를 다시 잇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