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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죄 없는 자, 누가 돌을 먼저 던지겠는가?

<언포기버블> (2021, The Unforgivable)

by 박 스테파노

루스 슬레이터(산드라 블록)는 스무 해에 가까운 긴 수감 생활 끝에 가석방된다. 그러나 그녀를 맞이하는 세상은 환영의 자리보다 추방의 언어에 더 가깝다. 인파는 여전히 복잡하고, 소음은 예전보다 날카로워졌으며, 그 안에서 그녀의 존재는 쉽게 위치를 잡지 못한다. “경찰(보안관) 살인”이라는 낙인은 그녀를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혐의로만 부르게 만든다. 사람들의 눈빛은 차갑고, 대화는 짧으며, 인사 대신 위협이 다가온다. 그 모든 배척 속에서도 루스가 놓지 않는 한 가닥이 있다. 스무 해 전의 그날, 그 사건 때문에 찢겨나가야 했던 어린 여동생에게서 오는, 단 한 번의 ‘답장’이다. 그것은 생사의 확인이자, 안부의 회복이자, 무엇보다 ‘기억’의 귀환이다. 그녀는 그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편지가 허락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루스가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범행은 강제 퇴거 대치 중 벌어진 보안관 살해였다. 존경받던 보안관이 그녀의 집에 들어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연민에서였다. 루스와 어린 동생 케이트가 갈 곳을 잃게 될까 염려한 그는, 자신의 아들의 방을 내어줄 생각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날 총성이 울렸고, 보안관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속사정은 감춰졌다. 법정은 범행 동기보다는 결과에 주목했고, 루스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케이트는 과거의 기억과 사건을 지운 채, 안전하고 단정한 중산층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루스는 이 사실을 안다. 동생의 행복을 위해, 그저 안부만 확인하면 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그녀는 케이트의 얼굴을 떠올린다. 일을 하며 손에 힘을 다시 길러도, 우연히 미소 지을 순간이 있어도, 그 웃음의 한 귀퉁이는 동생에게로 기운다. 그리움은 종종 염치없음과 함께 찾아온다.


지키기 위해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AI Sora


보안관의 아들 두 형제에게 루스는 그저 용서 불가능한 대상이다.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병든 모친을 모시며 살아온 그들에게 ‘경찰 살인범’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라 삶을 무너뜨린 원인 그 자체다. 일반인도 경찰 살인에 몸서리치는데, 피해자의 가족이 품는 분노는 더욱 깊고 오래간다. 그들의 분노는 정의의 언어로 포장되지만, 속내에는 복수의 기도가 선명하다. 같은 고통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 같은 방식으로.



경찰 신뢰 문화 속의 용서의 부재


<언포기버블>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서사가 범죄와 처벌, 속죄와 화해라는 흔한 틀을 넘어서 ‘용서의 불가능성’과 ‘기억의 정치학’을 동시에 건드리기 때문이다. 용서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가 허락하는 의례이자, 기억을 재배치하는 집단적 작업이다. 루스의 이야기는 ‘형을 살았으니 끝’이라는 법률적 종결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회적 감정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개인의 존재는 종종 또다시 훼손된다.


루스가 동생에게 바라는 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스무 해 전의 그날을 다시 붙들어 다른 결말을 써보려는 시도일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증언되고, 받아들여지고, 때로는 거부되며, 결국 시간에 의해 변형된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회귀가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만드는 창조 행위다. 그러나 그 창조는 피해자와 가해자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공동체가 어떤 기억을 남기고, 어떤 기억을 삭제할 것인가에 따라, 용서의 문턱은 낮아지기도, 영원히 닫히기도 한다.


루스가 처음 사회로 복귀하는 장면은, 흰색 비닐봉지를 든 채 버스에서 내려 바깥 공기를 마주하는 순간으로 시작된다. 화면은 과거 회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색채는 바래 있고, 사운드는 의도적으로 눌려 있다. ‘자유’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녀 앞에 놓인 풍경은 낯설고 무채색이다. 카메라는 인파 속 루스를 가까이 붙잡지 않고, 멀찍이서 관찰한다. 이는 단순한 거리감이 아니라, 그를 환영하지 않는 세계의 시선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이 장면은 용서의 부재를 ‘관계의 거리’로 표현한다. 사회는 그녀와 물리적으로 섞여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결코 손 닿지 않는 거리에 머문다. 이후의 장면들—취업 면접에서의 문전박대, 시선이 칼날처럼 꽂히는 식당, 부서진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모두 같은 형식을 반복한다. 루스는 늘 프레임 속 중심에 있지만, 주변의 시선과 사물 배치는 그녀를 배제된 인물로 고정시킨다. 여기서 용서란 사건의 진실과 무관하게,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허락’임이 드러난다.


미국에서 경찰 살인이라는 것은 가중의 책임이 부여된다. AI Sora


미국에서 이 ‘허락’은 특히 경찰과 관련될 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문화사회학적으로 볼 때, 경찰은 단순한 치안 기관이 아니라, ‘국가-가족 서사’의 일부다. 19세기 서부 개척시대의 보안관, 20세기 대공황기 경찰영웅물, 9.11 이후의 ‘국내전선’ 서사는 모두 경찰을 국가 공동체의 ‘부모’처럼 그려왔다. 범죄자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보호자를 상실한 것—이것이 미국 사회가 ‘경찰 살인범’을 대하는 집단감정의 뿌리다.


미국 사회에서 ‘경찰 살인범’이라는 호칭은 거의 사형선고에 가깝다. 레인저, 셰리프, 폴리스—그 명칭의 다양성이 말해 주듯, 미국에서 시민의 안전은 경찰 조직에 깊이 의존한다. 해외에서 벌어지는 군사 행위는 대개 ‘멀리서 일어나는 일’로 치부되고, 일상의 위협은 총기 사회의 내부 범죄에서 비롯된다. 그래서인지 경찰은 단순한 직업 집단이 아니라, 불안한 사회 질서를 붙드는 거의 상징적인 기둥에 가깝다. 이로 인해 경찰에 대한 범죄는 국가적 모욕처럼 여겨지고, 그 범죄자는 평생 혐오와 배제의 표적이 된다. 이는 법의 형량을 넘어선, 사회적 형벌이다.


<언포기버블>은 이 지점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피해자의 가족이 루스를 응징하려는 동기는 법적 정의의 언어로 표현되지만, 그 감정의 밑바닥에는 ‘공동체의 부모를 잃었다’는 상실 서사가 있다. 이는 단순히 보복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가 자신을 지키던 상징을 되찾으려는 시도다. 그렇기에 용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용서가 전제될 수 없는 구조다. 이 맥락에서 루스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회로부터는 결코 받을 수 없는 ‘사적 허락’을 향한 요청이다. 그녀가 기다리는 답장은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공동체 서사 바깥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기억의 서두다. 경찰을 ‘부모’로 둔 미국 사회에서는, 그 기억이 공식 역사에 편입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편지는 적어도 한 사람에게, 잃어버린 관계를 되돌리는 ‘사적인 역사’를 써줄 수 있다.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하나다. 법이 끝났을 때, 공동체가 허락하지 않는 존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용서할 수 없음’이라는 집단의 감정을 어디까지 정의로 부를 수 있는가. 루스가 그 문턱 앞에 서 있다.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편지가 아니다. 그 편지에 담길, 아직 발화되지 않은 세계다.



비판하는 사람이 공범자라는 여론재판과 법감정


"국민정서법"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법감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특정 사건에 대해 한 나라의 대중이 집단적으로 드러내는 정서적 반응을 뜻한다. 법률의 형식적·합리적 틀보다도 이 정서가 더 우선적으로 작동하는 경우를 비꼬아 부르는 말이다. 사법의 객관성을 요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일종의 ‘떼법’이기도 하다. 대표적 사례가 음주운전 가중처벌을 골자로 한 이른바 "윤창호 법"이다. 언론과 여론의 강한 압박 속에 입법 발의되었으나,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보듯 ‘정서법’은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에서 긴장을 일으킨다.


이 ‘정서법’의 절정은 세법(稅法)이라는 농담도 있다. 세금 문제만큼은 여론이 언제나 정서적으로 격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서가 언제나 정의롭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여성·아동 성범죄, 스토킹, 묻지 마 살인 같은 범죄에 대해 “형량이 가볍다”, “범죄자에게 인권이 웬 말이냐”는 목소리는 종종 ‘절대선’처럼 포장된다. 그러나 이 정서에 동조하지 않으면, 그 즉시 공범이나 동종 전과자, 심지어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사회적 정의가 언제부터 ‘다수의 분노에 무조건 부합하는 것’으로 환원되었는가? 그렇다면 수사와 재판이라는 제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다수결적 단죄의 회오리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세상은 언제나 단죄한다. 단, 자기 자신이 대상이 아닌 한에서만.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신문 사회면과 방송 뉴스의 사건 중심 보도를 보면, 피의자·용의자·피고인은 거의 예외 없이 ‘죽일 놈’으로 묘사된다. 피해의 참혹함은 극대화되고, 범죄 행위의 순간은 잔혹하게 부각된다. 하지만 이런 보도는 대부분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고와 사건의 차이를 신형철은 이렇게 정리한다.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이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보안관 살인은 사건이 되어 저마다의 해석을 남긴다. AI Sora


영화 속 루스가 복역하며 동생과 생이별을 하게 된 이유는 ‘보안관 살인’이라는 사건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것은 진실을 향한 해석이 아니라, ‘경찰관을 살해했다’는 처리에 가까운 예단으로 굳어진다. 그 사회와 구성원들은 루스를 그저 ‘살인자’로만 대한다. 사건의 맥락과 결을 세밀히 들여다본다면, 과연 그 자의적인 처분은 합당한가. 영화는 그 답을 은유적으로 건넨다. 합리적 의문이 작동하지 않는 집단의 광기는, 정서법과 여론이라는 재판을 통해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이 지점에서 사회심리학의 ‘집단사고’ 개념이 작동한다. 합리적 의심은 배제되고, 여론이라는 이름의 광기가 그 자리를 채운다. 결과적으로 제도적 재판이 아니라 ‘정서적 재판’이 열리고, 그 속에서 또 다른 희생양이 만들어진다.


흥미롭게도,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 형식의 영상으로 재판 정보를 충분히 접한 2만 명의 시민들은 가장 많이 (39%) 집행유예를 선택했고 그다음으로는 (29%) 징역 3년 초과 5년 이하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 결과들은 정보들을 열람하기 전에 사건의 개요만 간략히 보았을 때의 판단과는 달라지는 것으로 조사가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가장 많은 경우 (27%) 징역 3년 초과 5년 이하, 바로 다음으로 (26%) 징역 5년 초과 10년 이하를 골랐었다. 해당 사건은 실화에 기초하며, 실제 재판부는 5년을 선고했다. 즉, 사전 정보가 없을 때는 판사보다 더 엄벌을, 충분한 정보를 접한 후에는 판사보다도 완화된 판결을 내린 셈이다. ‘국민참여재판’ 제도의 철학적 기반도 여기에 있다.


사건의 구체적 맥락과 세부를 아는 순간, 사람들은 처음의 분노에서 물러나 오히려 더 온건한 판단을 내린다. 이는 ‘국민참여재판’이 논의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판사의 판결은 이후 판례로 남아, 그 사회의 사법사에 평생 기록된다. 특히 영미법 계열에서는 판례 자체가 곧 법전으로 여겨진다. 법사회학적으로 보자면, 판결은 단순히 사건 당사자 사이의 결론이 아니라, 판례라는 형태로 그 사회의 법적 기억에 새겨진다. 판사는 원고와 피고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비판의 무게를 최소화하는 지점에서 판결을 내리려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생소할지라도, 그들에겐 ‘거래법’이 당연시된다. 그럼에도 정서적 처벌이 예외 없이 작동하는 영역이 있다. 경찰 살인, 아동 성범죄, 그리고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테러가 그러하다.



용서는 용기있는 자의 것


"용서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은 단순한 도덕적 명제 너머, 존재의 깊은 층위에서 파고드는 실존적 질문이다. ‘사고’가 처리와 복구를 통해 이전의 상태로 회귀할 가능성을 내포한다면, ‘사건’은 그 진실의 무게로 인해 시간의 역류를 거부한다. 신형철이 말하듯,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퇴행’이라는 무거운 개념과 맞닥뜨린다. 그러나 그 무력한 경계선 너머, 우리는 어떻게든 ‘용서’라는 가능성을 찾아 헤맨다.


‘용서’(容恕)라는 단어가 사전에서 제시하는 의미는 무심하게 들릴 만큼 단순하다.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이라 적혀 있다. 마치 ‘사건’이 마법처럼 사라진 듯 덮어버리는 행위라니, 이 얼마나 묘한 역설인가. 우리가 통상 말하는 ‘용서’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다. 법적 처벌이 무겁게 내려지고, 온갖 사회적 꾸짖음이 쏟아져도, 그 무게를 뛰어넘어 ‘용서’가 허락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처벌이 더욱 강화된다 하여 ‘더 큰 용서’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분노가 복수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는 방편도 아니다. 그래서 ‘용서’는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선택지 중 하나다. 때로는 ‘체념’, ‘단념’, ‘외면’과 혼동되지만, 그것과도 구별되는 깊은 내면의 결단이다.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1993년작 <The Unforgiven>과 하정우 주연의 2005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는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군상과 사건을 피해자의 시선에서 그려낸다. 가해자는 스스로 용서받기를 포기하고, 피해자는 끊임없이 ‘용서’를 호소한다. 그러나 그 ‘용서’는 좀처럼 도달 불가능한 이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넷플릭스 영화 <언포기버블>은 다르다. 그 중심에는 장기간의 수감 생활 후 사회로 복귀한 ‘가해자’ 루스가 있다. 피해 가족은 물론 사회는 ‘보안관 살인자’라는 낙인 아래 그녀를 좀처럼 용서하지 못한다. 나아가, 존경받던 경찰관의 죽음 앞에서 복수심이 극렬히 분출한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정서, “똑같은 상실을 안겨 주고 싶다”는 욕망은 결코 쉽게 누그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용서할 수 없는 너희는 오히려 ‘용서할 자격’이 없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던진다. 이 말은 단순한 도덕적 권고를 넘어서, 용서가 인간의 권한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임을 암시한다. 종교적 성인의 말씀, 부처의 가르침처럼 ‘용서’는 누구에게나 강요될 수 없는,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결단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 은밀한 반전은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용서받지 못한 자’임을 암시한다. 사건의 실체와 복합성을 외면한 채 선입견과 통념으로 타인을 단죄하는 집단 광기는 바로 ‘용서’의 자격을 스스로 박탈하는 행위다.


이민자들이 차지하는 일자리 정도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AI Sora


미학적으로도 이 영화는 ‘용서’의 불가능성, 혹은 그 껍데기를 넘어서는 인간 내면의 갈등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촘촘한 서사와 인물 심리 묘사는 ‘용서’라는 추상적 개념을 실존적 체험으로 전환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용서’에 대한 감각적 이해를 확장하게 만든다. 빛과 어둠, 침묵과 대화, 거리감과 가까움이 교차하는 공간은 ‘용서’라는 관계의 복잡다단한 구조를 형상화한다. 이는 단순히 법적 처벌과 사회적 낙인을 넘어, 인간 존재가 품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용서라는 행위는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결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차원의 복합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책임’과 ‘행위’ 개념을 통해 용서의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한 바 있다. 그녀에 따르면, 용서는 과거의 행위에 대해 그 행위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정치적 행위’다. 즉, 용서는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되, 그 기억에 사로잡혀 영원히 구속당하지 않고, 인간이 공동체 속에서 다시 관계를 맺도록 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 점에서 용서는 단순한 ‘잊음’이나 ‘무시’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사회적 기억의 한 부분으로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시간의 해방’이자 ‘관계의 재구성’으로 읽힌다. 따라서 용서는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미래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윤리적 정치적 조건인 셈이다.


한편,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용서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심리적 과정으로 해석된다. 자크 라캉이 말한 ‘타자의 욕망’ 개념은,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행위가 단순히 상대방의 행위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타자’가 우리 내면에 남긴 상처와 분노, 그리고 그 분노에 대한 자기 인식과 투쟁의 과정임을 드러낸다. 용서란 ‘타자의 욕망’과 나의 욕망이 맞닿는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자, 그로 인해 주체가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는 ‘주체화’의 한 단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용서는 내적 갈등과 사회적 기대 사이에서 복잡하게 얽힌 정신적·사회적 ‘장(field)’ 속에서 발현되는 행위이자, 자기 자신과 타자 모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용을 요구하는 윤리적 과제로 다가온다. 이처럼 용서는 개인과 사회,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다층적인 현상으로,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누가 인간됨의 조건을 감당할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으로 확장된다.


이렇듯, ‘용서’는 단순한 도덕률을 넘어 사회적, 심리적, 철학적 층위가 겹친 복합적 지점이다. 영화는 그 지점을 예리하게 파고들며,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누가 용서를 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를 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용서’는 더 이상 가벼운 말이 될 수 없다.



늘 행복하기만 할까? 삶과 용서 사이에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우리는 종종 감정이입의 깊은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약자의 자리, 그 자리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한없이 선명하다. 권선징악의 서사 속에서 ‘선’의 편에 서서 통쾌한 판결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심리다. 일상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뉴스 화면 속 피해자의 고통에 마음이 기울고, 언론이 재단한 ‘나쁜 놈’에게 분노를 쏟아내거나, 최소한 혀를 끌끌 차는 일이 허다하다. 우리는 묵묵히 믿는다. ‘나는 결코 저 악당이 될 리 없다’고. 그러나 그 믿음은 얼마나 허약하고 불완전한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복음 8장 7절의 이 구절은 여전히,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틈바닥에서 울려 퍼진다. 그 돌을 던지려는 손은 자주 흔들리고 망설이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상처와 고통으로 어루만져져야 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재빠르게 판단하고, 정의를 내리는 데 앞장서지만, 정작 나 자신의 고통 앞에서는 얼마나 자주 침묵하고 도망치는가.


용서는 쉽게 던져지는 말이 아니다. AI Sora


세상이 내게 돌을 던질 때, 그 돌에 맞는 쪽은 과연 나만이 아닐까? 그 ‘억울함’은 차갑게 돌아서는 시선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자라난다. ‘삼례 슈퍼 살인사건’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그리고 무죄로 결론 난 여러 ‘미투’ 사건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진실이 얼마나 복잡하고 왜곡될 수 있으며, 때로는 체계의 오류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는지에 관한 비극이다. 불행은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의 그늘이다. 그러므로 불행과 고통은 ‘나름 나름’이라는 냉혹한 진실 앞에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론과 사법기관이 감당해야 하는 역할의 무게를 다시 한 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들은 단편적 뉴스 헤드라인으로 축소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사람들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일탈의 실체를 품고 있다. 일상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완전한 용서’를 말할 때, 그 말의 무게와 한계를 다시금 직시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용서’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포장된 말들이 얼마나 자주, 인간적인 연민과 깊은 이해를 생략한 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변질되는지도 성찰해야 한다.


‘용서’란 쉽사리 던져지는 말이 아니며, 그 말 뒤에 감춰진 고통과 고뇌, 갈등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각자가 품는 용서는,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용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 용서의 자리에는 마침내, 단죄와 분노 너머에 놓인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독과 연대가 고요히 펼쳐진다. 그렇게 ‘늘 행복하기만 할까?’라는 질문은 우리 삶의 가장 섬세한 균열을 드러내며, 스스로에게 묻는 무거운 선언이 된다. 우리의 삶은 그 질문 위에서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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