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빌보드> (2017, Three Billboards...)
한 여인이자 어머니,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남편과 이혼한 뒤 아들과 딸을 키우며 고단한 일상을 버텨 왔다. 일상은 고단했지만, 견딜 수 없는 절망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말다툼 끝에 집을 나간 딸이 강간당한 뒤 불에 탄 채 발견된다. 형언하기 힘든 참혹함 속에서 범인은 잡히지 않고, 수사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간다. 시간이 흐르자 사건은 세상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그 자리는 무심함과 침묵이 채운다.
그때, 밀드레드는 외곽의 한적한 도로 옆,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대형 광고판 세 개(쓰리 빌보드)를 임대한다. 그리고 그 위에 경찰의 무능을 직접 겨냥한 도발적인 문구를 세 줄로 새긴다. 그 메시지는 마을의 고요한 표면을 갈라놓는다. 언론과 주민들의 시선이 쏠리고,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보안관 윌러비 (우디 해럴슨)와 그의 부하 경찰 딕슨(샘 록웰)은 무능과 직무유기의 비난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평화를 유지하길 원하는 주민들은 오히려 밀드레드의 편에 서기를 주저한다. 그녀는 홀로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그녀의 질문은 단 하나다. “누가 내 딸을 죽였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정의의 이름으로 원한을 풀 수 있는가 하는, 더 오래된 질문으로 확장된다. 질문으로 밀드레드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범인을 찾아내어 법의 심판대에 세우고, 딸이 당한 고통을 갚아주는 것. 하지만 복수는 늘 ‘나의 것’일 뿐, 결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복수는 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몇 해 전만 해도, 개봉작 중 특히 주요 수상작들은 놓치지 않고 시기에 맞추어 보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삶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고, 코로나라는 격리의 시대가 이유가 되어 그간 미뤄두었던 영화들을 깊은 서랍 속에 오래도록 묻어 두었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갈증은 생존의 허기보다 먼저 다가왔고, OTT가 결합된 통신 요금제는 쉽게 바꾸지 못했다. 덕분에, 마치 봉인된 편지를 조심스레 뜯듯, 오랜 시간 손대지 않은 작품과 조우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2018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쓰리 빌보드>였다.
영화는 한 여인이자 어머니인 주인공이, 겪기 힘든 비극을 맞닥뜨린 뒤 흐르는 시간을 그려낸다. 밀드레드와 딸의 관계는 애틋함이나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소중한 생명을 강간과 불태움이라는 잔혹한 방식으로 잃은 어머니가 느끼는 고통은, 그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이해하기 어려운 심연의 절망이다. 더욱이 사건을 수사할 책임을 지닌 이들이 편견과 무능으로 일관한다면, 그 고통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삶 자체를 무너뜨리는 지옥의 날들이 된다.
말기 췌장암에 걸린 보안관의 처지나 마마보이, 내부의 편견과 폭력을 내면화한 인종주의자, 게이라고 불편한 눈총받는 말단 경찰관 나름의 사정과 삶은 밀드레드의 불행 앞에서는 무력하다. 모두가 나의 불행과 고통을 초래한 당사자들이거나 적어도 방관자라고 생각이 드니까. 그래서 어머니이자 여인은 광고판에 그들을 도발하고 힐난하며 사건 수사의 진도를 재촉한다. 그들은 밀드레드에게 불행을 가져온 원인으로 보인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가해자, 혹은 침묵하는 방관자의 중첩된 얼굴로 다가온다. 이에 밀드레드는, ‘복수’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무관심과 무능에 맞서기 위해 광고판이라는 공개된 공간에 그들을 향한 메시지를 던진다. 도발적인 메시지를 담아, 수사의 진척을 압박하며, 공개적으로.
그러나 기묘한 운명처럼, 말기 암에 처한 보안관은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쓰리 빌보드’가 그의 죽음을 부추겼다며 손가락질한다. 상심한 밀드레드를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고립시킨다. 순간, 인간들은 고립과 절망 속에서 ‘우리’라는 연대 대신 ‘적’이라는 경계로 자신과 타인을 구분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논리와 감정으로 편향된 확신을 굳히며, 사회적 제도와 법 집행을 불신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가해진 악을 되갚기 위해, 똑같거나 심지어 증폭된 고통을 상대에게 전가하고자 한다.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갈등의 폭발점이며, 가장 위태로운 시기다. 결국 밀드레드는, 딸의 죽음을 복수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보안관 사무실에 화염병을 던진다. 그녀의 눈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만이 유일한 정의이며,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확신이 자리한다. 이처럼 복수는 개별적인 감정과 경험에 깊이 뿌리내린 내밀한 영역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단언은, 복수가 공유되고 확장될 수 없다는 점을 내포한다. 복수의 행위는 감정적 주체의 고통과 결부되며, 집단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상호 이해나 연대와는 다른 차원의 개인적 영역이다. 이것은 복수의 행위가 공동체의 법과 윤리로 치환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가 ‘법’을 통해 복수를 제도화하려는 시도는, 감정의 격랑을 통제하고 무한 보복의 사슬을 끊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드러나듯 법 집행자들의 편견과 무능은 오히려 복수의 감정을 증폭시키며, 법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은 또 다른 폭력의 씨앗이 된다. 복수는 개인의 내면에 내재한 심연이며, 사회적 제도와 긴장 관계에 있다. 이 영화는, 복수라는 본능적 욕망이 어떻게 사회적 무관심과 법적 한계 속에서 더 큰 비극을 낳는지를 절절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정의’와 ‘복수’가 혼재하는 복잡한 윤리적 갈등을 드러낸다. 밀드레드의 행위는 ‘복수’지만 동시에 사회에 대한 도발이며, 법의 태만에 대한 비판이자 개인의 고통에 대한 절규다.
복수의 본질은 단순한 가해자에 대한 보복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피해자의 상실과 분노, 그리고 법과 사회가 실패한 정의 구현에 대한 무거운 응답이다.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증오를 낳고, 증오는 눈을 멀게 하며, 결국 공동체의 균열을 심화한다. 그리하여 ‘복수는 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명제는, 개인과 사회의 갈등, 감정과 이성, 정의와 폭력 사이에 놓인 복잡한 경계를 함축한다.
이 사유는 곧, 복수가 단순한 개인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제도의 부재 또는 실패에 의해 증폭되는 현상임을 역설한다. 복수라는 감정은 종종 개인의 고립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연대는 오히려 해체된다. 복수와 정의 사이,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쓰리 빌보드>가 던지는 질문은, 복수와 정의, 분노와 법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갈등을 향한다. 복수는 개인의 영역에 머무르는 한, 사회적 연대나 정의로 전환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한계 속에서, 복수는 또 다른 증오와 폭력의 씨앗으로 남는다.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은 인간의 눈을 멀게 하며, 결국 파괴적 고리를 끊지 못한 채 더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남길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 균열을 넘어선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는 절박한 숙명을 지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복이 아닌 중재
이 영화의 중심에 자리한 복수는 고대부터 인간 사회를 관통해온 심오한 윤리적 문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lex talionis)의 법칙은 기원전 1750년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바빌로니아 법전에서 유래한다. 피해만큼 동일한 손해를 가하는, 즉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칙이다. 한 인간이 타인에게 입힌 해악을, 동일한 방식과 강도로 되갚아야 한다는 이 원리는, 법의 기초로서 고대부터 존재했다.
예를 들어, 부모를 구타한 아들의 손목도 잘려야 하고, 사람을 죽인 자는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엄벌주의를 시사한다. 1901년 프랑스 탐험대가 페르시아의 고도 수사에서 발견한 이 법전은 한동안 인류 최초의 성문법으로 통용되었으며, 그 전에는 이라크 남동부 우르에서 발견된 우르남무 법전(기원전 2115~2095)이 가장 오래된 법전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복수는 인간 사회의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본능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더욱 증폭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오래된 성문법이 기술한 동해보복의 원칙은, 단순한 엄벌주의를 넘어, 오히려 본능적인 야생성을 제어하고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였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수렵과 유목이라는 긴 유랑의 세월을 지나, 비옥한 토지와 농업기술이 발달하며 인간은 한 지역에 머물러 공존하기 시작했다. 얼굴 붉히는 일이 있어도 거주 지역이라는 경계 안에 갇혀 서로 부대끼는 삶은, 원시 노매드의 본능에서 비롯된 동물적 감정과 보복의 연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손해를 손해로 갚는 행위는 자신의 소유와 생존을 지키려는 본능적 반응에서 비롯하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이나 공동체의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지배계급은 중재와 조정을 꾀했으리라. 감옥도 없고 화폐경제도 태동하지 않은 원시사회에서, 중재자가 개입할 수 있는 ‘동해보복’의 틀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사회적 통제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에서 동해보복을 집행받는 자들은 주로 권력이나 재력이 없는 일반 서민이었다는 점이 이 법의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진실이다. 기득권층은 손해에 대한 보상과 속죄를 경제적 배상으로 대체함으로써 법의 엄격한 잣대를 자신들에겐 유연하게 적용했다.
우르남무 법전 역시 주로 금전적 배상과 벌금형에 집중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컨대 유아 납치범은 은 15세켈(1세켈은 약 8.3g) 세켈의 벌금을 내야 했고, 남자가 첫 아내와 이혼할 때도 1미나(약 500g)의 은을 지불했다. 다른 이의 눈을 상해하면 은 0.5미나를 내야 했으며, 다리를 해친 자 역시 10세켈의 벌금형을 치러야 했다.
결국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의 원칙은, 표면적으로는 엄정한 형벌의 틀로 보이나, 실제로는 통치자의 권력 유지와 공포 통치의 수단이자,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장치였을 가능성이 크다. 재산과 권력을 지닌 기득권층은 손해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 보상하는 반면, 아무것도 없는 하층 서민은 자신의 신체 일부를 걸어야 했으니, 범죄에 따른 기회비용은 계급에 따라 극명하게 달랐다.
이러한 맥락에서 흔히 인용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인간 본성의 야생성과 원시적 복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기에 너무나 부족하다.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낳는 악순환을 끊지 못하며, 복수라는 이름 아래 고통과 파괴만이 증폭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대의 법문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법과 질서, 정의의 자리는 단지 ‘응보’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그 이면에 사회적 합의와 중재,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존엄의 존중이 함께해야 한다는 점이다. 증오가 순환하는 세계에 정당한 중재와 연대의 끈을 놓지 않는 한, 우리는 또다시 고대 법전이 그려낸 암울한 광경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증오의 순환과 용서의 가능성
영화 <쓰리 빌보드>는 이러한 원초적 복수의 충동과 더불어, 그 안에 감춰진 인간 존재의 다층적 갈등과 고뇌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밀드레드는 딸을 잃은 뒤, 형사와 지방사회를 향해 끝없이 분노와 복수를 요구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내건 ‘쓰리 빌보드’는 고대 법전의 ‘동해보복’처럼 일종의 ‘직접적 응징’을 요구하는 표상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응징의 실체가 단순하지 않음을, 복수가 곧 정의의 완성일 수 없음을 무심한 카메라와 담담한 서사로 서서히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철학적 사유가 깊어진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제기한 ‘정의와 복수’의 이중성, 즉 복수심이 종종 정의의 미명 아래 개인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모순적 힘이라는 점이다. 밀드레드의 행위는 정의를 향한 간절한 외침이자, 그와 동시에 자신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증오의 순환’을 불러온다. 이 양면성은 ‘동해보복’이 내포한 ‘응보의 윤리’와 맞닿아, 복수와 정의의 경계에서 인간이 겪는 존재론적 불안을 형상화한다.
또한, <쓰리 빌보드>의 미학적 특징—차분하고 현실적인 플랫톤과 어둡고 정적인 화면 구성, 긴 호흡의 내밀한 대사, 인물들의 일상적 행동에 깃든 감정의 파동—은 이러한 철학적 긴장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복수라는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외부로 폭발하는 대신, 인물들의 내면과 관계 맺음 속에서 점진적으로 해체되고, 때로는 돌파구를 찾아가는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을 형상화한다. 이는 ‘동해보복’이 단순한 법률적 응보를 넘어, 공동체 내에서 ‘중재’와 ‘용서’라는 또 다른 윤리적 가능성을 모색했던 역사적 맥락과도 겹쳐진다.
한편, 들뢰즈와 가타리의 ‘복수의 악순환’ 개념을 빌리자면, <쓰리 빌보드>는 증오가 쌓이고 쌓여 결국 ‘사회적 기계’로서의 복수 시스템이 작동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하지만 영화는 이 체계의 붕괴와 재구성을 통해, 복수 너머의 새로운 윤리적 지평—서로의 상처를 인정하고 공유하는 관계의 회복—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는 마치 ‘동해보복’ 이후 공동체가 갈등을 중재하고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시도와 평행한다.
종합하면, ‘눈에는 눈’이라는 고대 법칙에서 시작한 복수는, 영화 <쓰리 빌보드>의 서사 안에서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을 비추는 거울로 확장된다. 복수는 정의의 요구이면서도 그 실천은 파괴와 증오의 악순환을 낳는다. 하지만 그 악순환 속에서 인간은 ‘중재’와 ‘용서’의 미묘한 가능성을 탐색하며, 새로운 관계와 연대의 맥락을 열어간다.
복수는 단지 ‘눈에는 눈’으로 귀결되지 않으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고통과 갈등, 그리고 화해의 과정까지 응시할 때, 비로소 정의는 거대한 응보가 아닌, 인간 존엄과 사회적 연대의 자리로 이행한다. <쓰리 빌보드>가 그러했듯, 우리의 눈길은 증오와 복수 너머, 그 공간의 희미한 빛과 그림자까지 응시해야 할 것이다.
복수와 용서, 그 불완전한 만남
영화로 다시 시선을 돌려보면, 개인의 단정적 확신에서 비롯된 사적 보복은 결국 또 다른 증오의 불씨를 지핀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진정한 용서란 증오로 가득 찬 보복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내면의 단단함을 요구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영화의 결말은 제법 반전의 여운을 남긴다. 거대한 사건이나 극적인 변혁 대신, 가장 하찮고 보잘것없게 여겨진 인물의 작은 행동이 오히려 무게 있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해와 편견 속에서 증오의 표적이 되었던 딕슨에게, 밀드레드는 억울함이 서린 누명과 부당한 보복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이에 대해 그는 단호하고 ‘심플’하게 응답한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봐요?
나를 바보로 아나.”
이 말은 증오가 증오를 낳는 순환의 고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그 반대편에 놓인 냉정하고 단순한 진실을 포착한다.
인간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스스로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그 피해는 말 한마디로, 복구를 위한 구체적 노력이나 경제적 배상으로 메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영구히 회복 불가능한 상처가 될 때, 그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단죄와 복수가 아닌, 진정 어린 반성과 사과가 아닐까 한다. 그 반성은 막연하고 두루뭉술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며 내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적요하게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는 그 순간, 비로소 마음은 움직인다.
그리고 그다음은 온전히 피해 당사자의 몫이다. 그 진심 어린 반성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복잡하게 분석하거나 냉정히 판단하기보다, 아주 간단히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한 방법일 터이다. 때로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사실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은밀히 드러내기도 하기에. 용서할 만큼 충분치 않다면, 사회와 법이 규정하는 처벌과 배상을 구하는 편이 더 낫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상대에게 똑같이 갚아주려는 마음으로 오늘과 내일을 아픈 과거 속에 소진할 이유는 없으니까.
영화 속 미주리주 에빙 외곽의 세 개 옥외 광고판을 불태운 이는 딸을 잃은 어머니도, 딸의 죽음에 대한 단정과 오해를 가진 자도 아니다. 그는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힌, 잊혀져 있던 주변의 평범한 인물일 뿐이었다. 증오로 시작된 ‘쓰리 빌보드’는 결국 불타버리며, 증오가 아닌 냉정한 단죄와 단순한 용서로 그 역할을 마무리한다. 이처럼 영화의 원제인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복수와 증오의 악순환 속에서, 가장 하찮게 여겨진 한 사람의 ‘작은 행동’이 얼마나 큰 울림이 될 수 있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 울림은, 복수라는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불신과 오해를 깨뜨리는 작은 빛줄기처럼, 희미하지만 분명한 길을 제시한다.
용서하는 자가 강한 자
영화 <쓰리 빌보드>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지 ‘복수’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복수가 낳는 증오의 끝없음,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깊은 상처와 고독을 경험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비로소 맞닥뜨려야 하는 ‘용서’의 무게와 불가피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밀드레드가 세운 광고판은 절규와도 같은 복수의 외침이며, 그 안에는 정의의 이름으로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곧 자신과 공동체를 갉아먹는 증오의 불길을 지피며, 영화는 그 파괴적 힘을 냉철하게 포착한다.
철학적으로 용서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나 도덕적 선택에 머물지 않는다. 파울로 프레이리와 같은 사상가들은 용서를 ‘해방의 행위’로 이해한다. 즉,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얽매고 있는 복수의 사슬을 끊고, 고통의 기억 속에서도 새로운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여는 ‘생성’의 실천이다. 또한, 마틴 부버가 강조한 ‘나-너’ 관계의 윤리는 용서가 단지 일방적인 관용이 아니라, 서로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깊은 만남임을 말해준다. 용서는 상대의 인간됨을 완전하게 수용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도 인간임을 인정하며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내려놓는 내적 전환이다.
영화 속 ‘작은 행동’으로 용서의 문턱을 넘은 인물은, 오해와 편견으로 쌓인 증오를 단호하면서도 담담하게 끌어안는다. 그의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봐요? 나를 바보로 아나”라는 말은, 용서가 단순한 수동적 굴복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 말 속에는 자존과 진실의 힘이 담겨 있다. 진정한 용서는 자신의 상처와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위에 서서 나아가는 힘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용서하는 자는 강한 자’임을 선언한다. 복수와 증오에 갇힌 자는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 굴복하는 반면, 용서는 그 고통을 넘어서 ‘초인’적 자아를 향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용서는 결코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깊은 고독과 분노를 견뎌내고 스스로를 초월하는 극복의 길이다.
용서의 실천은 또한 공동체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사회적 장치이기도 하다. 공동체가 ‘눈에는 눈’이라는 응보의 법칙에 머문다면, 끝없는 증오의 악순환은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 그리하여 중재와 화해, 그리고 용서는 인간 사회가 스스로를 존속시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도달해야 할 윤리적 진보인 셈이다.
<쓰리 빌보드>가 그려내는 세계는 바로 이러한 복수와 용서의 이중적 긴장 속에서 불완전하고도 불가피한 인간의 현실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복수의 불길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편, 용서의 싹은 아주 미미하나마 천천히 자라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우며 때로는 더 큰 고독과 분열을 낳지만, 궁극적으로는 관계와 공동체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용서의 여정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책임’의 윤리와도 닿아 있다. 용서는 타인의 악행을 무조건적인 관용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행위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자신 역시 그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지는 ‘상호책임’의 윤리다. 이 책임은 나와 타인의 분리된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를 묶는 연대의 끈을 놓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이다.
따라서 용서는 복수를 넘어선 ‘진정한 자유’의 실현이며, 복수로부터의 해방이자 내적 평화의 도달이다. <쓰리 빌보드>가 그려낸 증오의 풍경 속에서, 용서는 불현듯 찾아오는 작은 깨달음, 사소한 인정과 진심 어린 고백,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연대의 희미한 빛줄기처럼 느껴진다.
이 빛줄기는 우리가 연대와 화해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가장 작지만 가장 견고한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