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말하지 못하는 감정의 지연
- 복수의 플롯으로 감정의 언어이자 윤리적 실천의 기로를 말하기
복수는 흔히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해악을 가해자에게 동등하거나, 더 큰 강도로 되돌려주는 행위”로 정의된다. 복수의 이러한 상식적 정의는 사실상 고대 문명에서 형성된 윤리적 원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함무라비는 법률을 제정하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문구로 대표되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의 원리를 앞세웠다. 겉으로는 정의의 균형을 상징하는 이 원칙은, 그러나 박철현 종교학 교수의 통찰처럼 실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정의의 철퇴’에 가까웠다. 법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루어진 복수는 오히려 불균형을 고착시키고, 정의를 계층화하는 기제로 기능했던 것이다.
박 교수는 『심연』에서 함무라비 법전의 동태복수법이 결코 만인을 향한 정의의 구현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격차가 극심했던 고대 바빌로니아 사회에서 이 법은 같은 계급 사이에서만 엄격히 적용되었으며, 하층민이 상층민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엔 동등한 복수가 아니라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복수가 법이라는 외양을 쓴 채 자본과 신분의 위계 속에서 거래되는 구조, 다시 말해 ‘무전유벌, 유전무벌’의 질서. 복수의 정의는 이미 처음부터 공정의 외피를 뒤집어쓴 차별의 논리였다.
한국 정치사 역시 이러한 복수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선거가 끝나면 어김없이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의 응징이 시작되고, 그 응징은 다시 다음 정권의 복수로 되갚아진다. 이른바 정의의 순환이라 불리는 이 대립의 연쇄는 실은 동태복수의 심리적 구조가 정치 이념 속에 내면화된 결과다. 본전을 돌려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 마음. 억울함과 손해의 기억이 집단의 정체성이 되고, 복수는 단지 상처의 치유가 아니라 정체성의 유지를 위한 의례처럼 반복된다. 그러니 대선은 언제나 후퇴 없는 싸움이 되고, 민중은 분노의 기표를 안고 세대와 지역, 계층과 직업, 심지어 성별에 이르기까지 진영의 깃발 아래 동원된다. 복수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시대의 기호가 되어, 민주주의마저 진영화된 감정 정치로 잠식해간다.
그러나 진정한 복수란, 그대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로 거두어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상처를 물려주기보다, 그 상처를 품에 안고 말없이 넘어가는 것. 보복의 유혹을 끊어내는 자리에 고요히 머무는 것. 어쩌면 성숙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가장 내밀한 의미는, 그 복수를 더 큰 품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단순한 인내가 아니다. 오히려 복수의 감정이 가지는 고유한 에너지―억울함, 수치, 분노, 갈망―를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행위다. 이를테면 ‘품의 윤리’로서의 복수, 혹은 ‘복수 너머의 형벌’이라 할 수 있는 윤리적 비약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우리가 흔히 아는 잔혹한 응징의 화신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의 과오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인과응보의 질서를 상징한다. 네메시스의 복수는 감정의 배설이 아니라 질서의 복원이다.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경계―‘홉리스(ὕβρις, 오만)’―를 범했을 때, 그 넘침의 대가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윤리. 이로써 복수는 타자를 향한 것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향한 물음으로 전환된다. 나는 왜 복수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되찾으려 하는가. 그 질문 끝에서 복수는 오히려 용서와 성찰, 그리고 무력해지는 법을 배우는 과정으로 변모한다.
복수는 끝내 행해져야 할 감정이 아니다. 끝내 포기되어야 할 감정 또한 아니다. 복수는 누군가를 처벌하는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상처의 순환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감수성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복수는 ‘행위’가 아니라 ‘태도’가 된다. 정치를 포함한 오늘의 삶은 여전히 동태복수법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는 ‘정의’는 어쩌면 더 깊은 어른됨의 언어 속에서, 아직 말해지지 않은 방식으로 태어나야 할지 모른다.
복수란 되갚는 것이 아니라 거두어 들이는 일
눈을 뜨면 복수로 인해 파열된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균열이 뉴스로 흘러들고, 눈을 감는 깊은 밤엔 복수를 소재로 한 막장 드라마가 스크린 너머에서 또 다른 상처를 재현한다. 이토록 복수가 일상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은, 단지 미디어의 자극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쉽게 복수의 감정에 젖는가. 복수는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복수의 서사에 정서적으로 공명하는가.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이지만, 이 불투명함 자체가 복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실마리가 된다. 우리는 종종 복수의 부작용과 그 병폐를 열거하며, 정의의 이름으로 그 감정을 억누르려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버스에서, 사무실에서, 또는 댓글 하나로 소소한 복수를 꿈꾼다. 법이 대리해주지 못한 정서의 균형을, 우리는 일상적인 감정의 교환 속에서 되찾고자 한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인간이 복수와 용서에 대해 진실이라 믿어온 것들―그 많은 경전과 법전, 도덕 강령들이―실은 하나의 관념에 불과했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마이클 맥컬러프는 『복수의 심리학』에서 이러한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복수심이 단지 인간을 잔혹하게 만드는 독이나 질병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복수는 인류가 공동체 안에서 부당한 손실을 입었을 때, 그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선택한 일종의 사회적 해결 전략이라고 말한다. 복수는 불의를 응징하고 억울함을 바로잡기 위한 감정의 메커니즘이었고,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고 배신을 억제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복수는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가 관계의 파열을 복원하고자 하는 충동일지도 모른다. 그 복수심이 공격성으로 치닫기 전에, 우리는 그 내면에 깃든 기억의 윤리와 회복의 욕망을 읽어야 한다. 복수는 피해자의 몸에 각인된 부정의 흔적이자, 세계와 다시 연결되려는 몸짓이다. 결국 우리는 복수의 시비를 따지기 이전에, 복수라는 감정이 품고 있는 복잡한 층위―억울함과 공정, 관계의 균열과 회복, 기억과 잊힘 사이의 진자 운동―을 충분히 고심해야 한다. 복수는 그 자체로 미성숙하거나 사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품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오래된 응답이었을지도 모른다.
21세기에 접어든 이후, 한국 극장에서 상영된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복수는 더 이상 낯선 테마가 아니다. 굳이 복수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많은 영화들이 갈등과 전개를 밀고 나가기 위해 복수의 플롯을 전략적으로 끌어들인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도구로서 복수는 도식화되었고, 동시에 감정적 흡입력을 담보하는 서사의 보증처럼 사용된다.
2010년대 이후의 극장 개봉작들만 훑어보아도 이러한 경향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복수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용서는 없다>, <파괴된 사나이>, <해결사>, <죽이고 싶은>, <이끼>, <황해>, <혈투>―은 단지 나열만으로도 하나의 정서를 형성한다. 이것은 장르의 목록이라기보다, 시대의 표정을 읽어내는 지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특정 영화 몇 편의 선택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감정구조가 일정한 패턴으로 복수의 서사를 요청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많은 영화들이 복수를 서사의 축으로 선택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하나의 가정이 가능하다. 영화는 예술인 동시에 산업이기 때문이다. 예술로서의 완성도와 산업으로서의 시장성이라는 두 축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매체의 숙명 속에서, 복수의 서사는 일종의 ‘검증된 플롯’으로 기능한다. 이야기의 구조상 긴장을 극대화하기에 용이하고, 관객의 정서적 몰입을 유도하며, 극단적 감정의 폭발을 정당화할 수 있는 내러티브의 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잘된 영화’라는 평가는 대부분 이 두 기준―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충족했을 때 부여된다. 흥행성과 영화제의 수상 실적, 혹은 평단의 평가가 한 작품 안에서 만날 때, 우리는 그것을 ‘잘된 콘텐츠’라 부른다. 그리고 이 잘된 콘텐츠는 다시 동시대의 관객들로부터 정서적 공명을 받아야 하며, 기억에 남는 스토리로 회자되어야 한다. 복수는 이 점에서 시대의 정서를 압축하고 전달할 수 있는 효율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무엇보다 복수극의 플롯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식화된 형식미를 갖고 있다. 억울한 피해, 권력의 남용, 고통의 침묵, 그리고 그것이 인내 끝에 폭발하는 응징의 카타르시스까지. 이 구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되며 장르의 문법으로 자리 잡았고, 동시에 관객의 심리 안에 복수의 감정을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복수극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장르적 안정성과 정서적 친숙성을 동시에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복수의 장르화’를 탁월하게 드러내는 감독들이 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는 단순한 응징을 넘어, 복수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비애와 맞닿아 있음을 서늘하게 드러낸다. 복수는 정의가 아니라 운명이며, 윤리의 실천이 아니라 감정의 독성으로 작동한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복수는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는 파국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이렇듯 한국 영화 속 복수는 단순한 플롯이 아니라, 시대가 욕망하는 정의의 변형된 얼굴이다. 사회적 정의가 법과 제도 안에서 실현되지 못한 시대, 복수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서사의 장치로 자주 호출된다. 그것은 정의의 대체물이며, 복수라는 이름으로 잠시 허용된 감정의 권리다. 그러나 그 권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하고,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래서 복수는 항상 이야기된다.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들, 실현되지 못한 정의, 보상받지 못한 기억들을 복수가 대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생의 정의, 복수의 서사화: 영화 속 복수극 플롯의 윤리적 역설
프랜시스 베이컨은 복수를 "야생의 정의"라 불렀다. 그 말은 복수의 정서를 야만적으로 단죄하기보다는, 그것이 문명의 경계 바깥에서 자라나는 원초적 정의감임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 복수심은 언제나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오른 고통과 분노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내면의 화산이 폭발하지 않도록, 문명은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개인의 복수를 사회화한다. 그러나 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다시 야생으로 회귀한다. 자신이 당한 만큼을 되돌려 주려는 정서는, 그렇게 다시 고요히 복수극의 서사로 되살아난다.
서사학자 로널드 토비아스는 저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20가지 플롯』에서 복수극의 플롯을 세 단계로 요약한다.
1) 끔찍한 사건의 발생
2) 복수의 계획과 추적
3) 대결
그 가운데 많은 복수극은 첫 번째 단계, 즉 끔찍한 사건의 묘사에 비상한 공을 들인다.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 고통을 겪었고, 그것이 어떻게 그의 존재를 바꾸었는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고통은 단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되고 체화되어야 한다. 관객은 그 고통을 느껴야만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복수극은 후반부, 곧 복수의 수행 과정에 집중한다. 왜 복수를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어떻게 복수가 실현되는지를 따라간다. 이 두 방식은 종종 혼합되며, 그 혼합의 방식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복수의 윤리와 감정을 규정짓는다. 대체로 복수극의 서사는 등장인물의 내면이나 윤리적 고찰보다는 복수의 ‘실행’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 해결 장치로 기능해야 할 법과 제도가 침묵하거나 무력할 때, 복수는 다시 개인의 몫으로 되돌아온다.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혼자 집행하는 ‘야생의 정의’. 그러한 복수는 관객에게 윤리적 동조를 넘어서 감정적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는 이 복수 감정의 심연을 가장 정교하게 서사화한 사례로 꼽힌다. 두 작품은 복수의 정당성과 당위성, 더 나아가 복수의 정서적 효능에까지 천착한다. 흔히 ‘복수는 건강에 해롭다’고 말하지만, 박찬욱은 복수야말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가능하게 하고, 때로는 개인의 정서적 회복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를 위해 그는 고전 신화와 문학의 원형을 빌려온다. <올드보이>에서 우리는 쉽게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미도(강혜정)가 쓰는 채팅창에 등장하는 대화명 ‘에버그린’(류지태), 그리고 그가 오대수(최민식)에게 건네는 "몬테크리스토 백작, 더 넓은 감옥에서의 삶은 안녕하신지요?"라는 말은 이 영화가 고전 복수 서사를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모함에 의해 감금되고, 그 감옥에서 복수를 준비한 뒤, 자신을 파멸시킨 자들에게 정밀하게 응징을 가하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기본 골격은 <올드보이>의 서사구조와 평행을 이룬다. 단, 박찬욱은 이 고전의 구조 위에 현대적 상상력과 한국 사회의 정서적 맥락을 덧입힌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납치되어 15년 동안 갇힌다. 그 안에서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고립과 환각을 경험하며 복수를 벼린다. 오대수의 고통에 관객이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그가 너무도 ‘평범한’ 소시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부당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또한 그와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자각이, 관객을 복수의 정서에 참여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가 된다. 또한 이 익숙한 플롯은 마지막 반전의 증폭제가 되기도 한다.
한편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의 정당성을 한층 더 직접적으로 묻는다. 청각장애인 노동자 류(신하균)와 애인 영미(배두나)는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한 류의 누나(임지은)를 위해 중소기업 이사 동진(송강호)의 딸의 유괴를 감행한다.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사법 실패를 향한 개인의 복수였다. 그러나 그 복수는 다시 다른 개인에게 복수로 돌아온다. 사회를 향한 복수는 결국 개인에게 환원되고, 개인은 또 다른 개인을 향해 복수한다. 여기에서 복수는 ‘나의 것’이 된다. 복수는 공동체를 통하지 못한 정의의 잔재이며, 고통의 사유화다.
현실에서 힘없는 개인에게 ‘사회에 대한 복수’는 불가능한 일이다. 거대한 사회 시스템은 미약한 개인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 책임은 불분명하고 분산되어 있다. 복수하고 싶어도 도달할 대상이 없다. 그래서 복수는 흔히 왜곡되고, 방향을 잃고, 다른 개인에게로 향한다. 이 복수는 개인 간의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정서를 얻는다. 사회가 부정한 고통을 유발했기 때문에, 그 고통에 대한 모든 반작용은 하나의 사회적 해석틀 속에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는 복수극의 플롯 가운데 특히 ‘끔찍한 사건’의 묘사에 집중한다. 이후의 복수 계획과 대결의 방식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복수가 어떻게 수행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복수하게 되었는가, 그 정서가 얼마나 공유될 수 있는가다. 복수극은 바로 그 지점에서 관객의 윤리와 감정을 건드린다.
복수의 허망함과 허무성: ‘계획과 실행’ 서사의 전개
복수극의 서사는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하나는 ‘복수의 계획과 추적’에 방점을 찍으며, 다른 하나는 ‘끔찍한 사건’과 그 사건이 주는 내적 고통에 집중한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과 <악마를 보았다>는 전자에 속한다. 이 두 영화는 복수를 ‘소모적 해로움’으로 바라보며, 복수 행위 자체의 참혹함과 허무함에 집중한다. 복수의 정당성을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복수의 현실적인 계획과 실행을 냉철하게 드러냄으로써, 복수의 내밀한 폭력성과 그 이면에 자리한 인간 존재의 파멸을 묘사한다.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이병헌)는 조직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지만, 보스의 어린 애인과 얽힌 사건으로 인해 배신당하고 제거된다. 이 서사는 권력과 배신, 신뢰와 욕망이 교차하는 조직 사회의 모순과 그 속에서 소외된 개인의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선우의 복수는 단순한 감정 분출이 아니라, 조직의 붕괴와 개인적 파괴가 맞물린 비극적 행위다.
<악마를 보았다>는 법의 한계와 제도의 부재 속에서 개인이 취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 선택을 강렬하게 그린다. 수현(이병헌)은 약혼자의 죽음에 분노하며, 잔인한 연쇄살인마 장경철(최민식)에게 처절한 복수를 감행한다. 영화는 핏빛으로 일관된 복수 행위를 통해 복수의 본질적 폭력성과 그 불가피성을 예술적으로 구현한다. 동시에 이는 국가 권력과 개인적 응징 사이의 긴장관계를 은유하며, 복수라는 행위가 지니는 윤리적 딜레마를 탐구한다.
두 영화는 복수의 정당성에 대해 길게 논하지 않는다. 고전 신화에서 복수는 명확한 원형적 정당성을 지녔지만, 현대 복수극은 그 정당성을 ‘이미 주어진’ 듯이 간주하거나, 아예 그 정당성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대신 복수 행위에 내재한 폭력, 고통, 그리고 파괴가 그대로 노출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불확실성과 박탈, 그리고 인간관계의 해체가 불러온 복수의 새로운 윤리적 풍경을 반영한다. 복수의 동기는 극도로 단순하다. ‘나의 삶이 크게 상처받았다’는 결과이며, 이에 대해 ‘되갚겠다’는 단순한 의지다. 그러나 복수는 결코 자로 잰 듯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복수의 끝은 언제나 허망하며, 또 다른 희생과 파멸을 낳는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수현의 약혼자 아버지인 장반장(전국환)의 죽음이나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의 파멸은 복수가 남기는 치명적 잔재다.
반면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는 복수극에서 ‘끔찍한 사건’에 집중한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이 끔찍한 사건으로 파괴되는 순간을 섬세히 그린다. 이 과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이 받은 신체적·정신적 고통의 깊이를 체감하게 하며, ‘왜 복수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영화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기한다. 주인공이 공식적인 정의 체계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할 때, 스스로 복수에 나서기로 결심하는 서사는 근대 사회의 법과 윤리, 개인 정의 실현 사이의 균열을 은유한다. 복수는 단순한 보복을 넘어서, 자기 구원과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 탈바꿈한다. 개인적 상처가 사회적 구조와 맞물리며, 복수는 개인과 사회의 갈등과 긴장을 내포한 행위가 된다. 복수에 내재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박찬욱 감독은 ‘왜 복수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복수 행위 자체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결국 복수의 가르침은 용서라는 구원의 행위에 닿는다. 불완전한 인간 욕망과 실수 속에서 반복되는 불행의 고리를 끊는 것은 복수가 아닌 용서임을, 영화는 암시한다.
<달콤한 인생>과 <악마를 보았다>의 후반부 플롯은 ‘복수의 계획과 실행’에 집중한다. 주인공은 복수할 방법을 치밀하게 계획하며, 적대자를 찾아 나서 대립한다. 이 과정은 두 힘의 팽팽한 긴장과 충돌을 통해 자극적 복수 행위를 보여주고, 관객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영화는 복수 행위의 이유나 정당성을 묻지 않는다. 복수는 설명이나 합리화 없이 단지 행해질 뿐이며, 그 결말은 허망함으로 귀결된다. 복수란 부질없는 행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복수극이 가진 근본적 아이러니—복수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효과와 의미를 부정하는 태도—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다학제적 사유와 복수극
복수극의 서사는 문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이 교차하는 다학제적 사유의 장이다. 고전 신화에서 복수는 정의 실현의 원형적 신화였으나, 현대 복수극은 그 원형을 해체하고 변주한다. 현대 사회의 복수는 불확실성과 소외, 배신이 뒤얽힌 복잡한 구조 속에서 인간 실존의 불안과 고통을 드러낸다. 철학적으로 복수는 정의와 복수심, 용서의 윤리학을 관통한다. 복수의 당위성과 허무성, 그 끝에 도달하는 용서의 가능성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모순과 갈등을 보여준다. 사회학적으로는 권력과 배신, 조직 내 위계와 관계망 속에서 복수가 어떻게 발생하고 개인을 파괴하는지 탐색된다. 심리학적으로는 트라우마, 분노, 복수심의 동력과 그것이 초래하는 내면 갈등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여전히 묻게 된다. 우리는 왜 복수 서사에 이토록 끌리는가. 복수는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새로운 충격과 흡입력을 부여하며, 일종의 관습이자 클리셰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유효한 감응을 선사한다. 복수극은 단순한 개인 감정의 해소가 아니라, 감정의 덩어리들이 구체화된 행위로 이행되는 내면적 드라마다. 서사의 말단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대결은 흔히 주인공과 적대자의 직접적인 충돌로 귀결되며, 이 장면은 정서적 격발과 동시에 내러티브의 정점을 이룬다. 계획은 번번이 틀어지고, 주인공은 더 절실하고 절도 있는 복수의 기획을 새로이 수립해야 한다. 성공 여부를 떠나, 복수는 항상 어떤 부채감의 환수처럼 작동한다. 그리고 그 행위의 양식 자체가 관객에게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요청한다. 감정의 지형이 솟구쳐 오르고 무너지는 이 격랑은 단순한 쾌감이 아니라, 고통과 정의, 윤리와 자기 파괴라는 복합적 층위를 동반한 미학적 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같은 작품들이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인물의 동기나 연출의 참신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들 영화가 복수라는 내러티브의 구조적 긴장을 감정의 구조와 맞물리게 만들어낸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은 복수라는 고전적 구조를 감각적으로 갱신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겨냥한 깊은 응시를 놓치지 않는다. 복수는 언제나 반복 가능하고, 그러므로 변주 가능한 이야기의 기본형이 되며, 이러한 반복 가능성 속에서 창작자는 정동과 도덕, 서사와 미학의 교차지점을 탐색하게 된다. 복수는 곧 장르의 윤리다.
복수의 모티프는 특정 시대나 지역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 희곡에서부터 현대 장르 영화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서사의 중심을 점유해 왔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오레스테스의 복수는 개인의 사적 응징을 넘어 신의 심판과 법의 제도를 탄생시키는 신화적 전환의 지점을 형성하고, 『햄릿』의 복수는 근대적 주체의 내면화된 망설임과 윤리적 균열을 드러낸다. 그러한 계보 위에서 복수는 단지 개인적 감정의 발산이 아닌, 문명과 제도의 경계를 묻는 일종의 문명적 리트머스지 역할을 한다. 문학과 영화는 그 질문의 장에서, 복수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윤리와 충동, 정의와 욕망 사이에서 얼마나 분열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은 여성 서사의 복권이자 복수극의 형식을 가장 현대적으로 전유한 작품이다. 폭력의 양식을 미학화하고, 장르의 규칙을 장난스럽게 해체하면서도, 주체의 서사를 절대적인 상실로부터 회복해내는 이 영화는 복수라는 행위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능동적 서사의 구축임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하이 눈>, <요람을 흔드는 손>, <케이프 피어>, <돌이킬 수 없는>, <몬테크리스토 백작>, <써든 임팩트>, <매드맥스>, <메멘토>, <갱스 오브 뉴욕>, <트로이>, <자토이치>,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존 윅> 시리즈까지, 복수의 서사는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거듭 재구성되어 왔다.
한국 영화 또한 예외는 아니다. <지구를 지켜라>, <실미도>, <가위>, <살인의 추억>, <범죄의 재구성>, <하녀>, <방자전> 등은 직접적인 복수를 그리지 않더라도, 복수의 충동이나 정서적 원형을 변형하여 서사에 심층적으로 배치한다. 이러한 서사들은 모두 되돌릴 수 없는 사건에서 출발해, 그것을 마주하거나 넘어서려는 시도를 통해 인물의 윤리적 성장을 혹은 파괴를 드러낸다. 복수는 여기서도 변함없이, 시간의 되돌림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의 유일한 정서적 출구이자, 내면적 질서를 복원하려는 행위로 자리잡는다.
서사학적으로 말하자면, 복수극은 매우 뛰어난 서사적 추동력을 지닌다. 모든 이야기 예술은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된다고 했을 때, 복수는 그 '만약'의 전제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이야기 구조이다. 스타니슬랍스키가 언급한 '매직 이프(Magic If)'는 인물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사건을 주체화시키는 원리이다. 복수는 바로 이 상상력, 즉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되돌리고 싶은 욕망의 응결체다. 인물은 그 사건을 다시 쓰고자 하며, 관객은 그 되돌릴 수 없음의 슬픔에 감응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판타지 장르가 아니기에,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으며, 복수는 그 불가능성 앞에서 고통스럽게 자신을 실현한다.
복수는 결국,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인간의 정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정념은 윤리적으로는 모호하나, 미학적으로는 언제나 강력한 긴장을 발생시킨다. 창작자에게 있어 복수는 다루기 쉬운 도구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서사적 선택이다. 그 속에는 억제되지 않은 감정의 표류와 함께, 서사의 응축과 파열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복수극은 인간의 심연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예술이 질문할 수 있는 윤리의 마지막 선이다.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유로의 전환
복수심은 본질적으로 극도로 사적인 정념이다. 그것은 어떤 타인에 의해 훼손된 자존과 존엄, 혹은 회복 불가능한 상처에 대한 응결된 응시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내면의 감정이 외부로 발현되는 순간, 복수는 단지 개인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힘을 띠게 된다. 개인적인 분노는 공공의 장으로 옮겨지며, 복수는 사적인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전환된다.
이때 사회는 법과 제도를 통해 복수의 충동을 억제하거나 방향을 수정하려 한다. 그러나 수많은 복수극이 보여주듯, 현실의 법과 규제는 복수심을 진정시키기에 너무 무디거나, 때로는 아예 무능하다. 법의 집행은 더딘 정의 혹은 불완전한 정의를 제공하며, 그 틈으로 복수는 다시 개인의 몫으로 되돌아온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복수는 제도 너머에서 부활한다.
영화 속 복수는 인간 존재의 가장 잔혹한 내면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복수는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파괴의 미학이다. 피, 고통, 처절함의 연쇄 속에서 복수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직면하게 만든다. 관객은 복수의 정서적 동기에 공감하면서도, 그 폭력적 행위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영화는 이 양가적인 감정 구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도덕적 한계와 윤리적 혼란을 응시하게 만든다.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에서 수현이 흘리는 눈물은 단지 복수의 종결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통해서도 치유받지 못한 고통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용서는 이따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호출되지만, 그것은 결코 쉽게 도달하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과 용서는 모든 잔혹함이 다 소진된 후에야 겨우 언급될 수 있는 최후의 감정이며, 영화는 그 점에서 복수 이후의 미학적 잔여물을 사유하게 만든다.
복수가 철저히 개인의 것이었다면, 용서 또한 마찬가지로 개인의 몫이다. 누군가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준다는 명목 아래 자행되는 또 다른 폭력은 복수의 연쇄만을 지속시킬 뿐이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복수의 동기를 그리지만,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복수의 종착지는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파괴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복수를 통해 복수를 멈출 수는 없다. 그 점에서 영화는 복수라는 장르적 형식을 빌려, 그것이 얼마나 무력하고 비생산적인지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인간의 추락을 보여주면서도, 그 밑바닥에서조차 구원을 말하려는 이 모순된 태도야말로 예술이 가능한 윤리의 지점이다. 복수의 고리를 끊는 행위는 오히려 그 부질없음을 체화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오늘날의 우리는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일상의 사소한 충돌들 앞에서 쉽게 분노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극단적인 언어와 과장된 감정 표출이 일상화된 시대에서, 복수는 너무도 간편하고 직접적인 해결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매듭을 원한다면, 그것은 복수라는 이름의 반복을 멈추고, 그 감정의 기원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질문은 다시 이렇게 돌아온다. "복수는 정말 나의 것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 묻는다. "이 복수의 감정이 나를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또 다른 사슬로 옭아매는가?" 복수는 복잡하고도 거대한 감정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야말로 예술이 인간에게 허락하는 가장 윤리적인 미학이다.
복수는 언제나 주체를 전제로 한다. 고통받은 자, 상처 입은 자, 파괴된 자는 응당 그 파괴의 균열 위에서 ‘되돌림’의 욕망을 품는다. 그러나 이 되돌림이란, 단순한 보복의 순환이 아니다. 그것은 파괴된 주체가 스스로를 수립하려는 비명이며, 무너진 질서를 자기 손으로 다시 쌓으려는 충동이다. 다시 말해, 복수는 단순한 응징이 아니라 주체성의 복원 욕망이다. 하지만 이 ‘복원’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완전할 수 없기에, 복수는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포스트구조주의 철학, 특히 푸코와 데리다의 사유는 이러한 실패의 지점을 조명한다. 푸코는 권력과 주체의 관계를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역사적 구성물’로 본다. 복수의 주체 역시 자율적인 판단자라기보다 사회적 담론과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태어난 허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복수를 감행하는 자는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개인의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것은 이미 제도와 문화,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교차점 위에서 생성된 집합적 감정의 부산물일 수 있다. 복수의 주체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구조에 내장된 것이다.
데리다에게서 복수는 ‘차연(différance)’ 속에서 무한히 지연된다. 복수는 특정한 결과, 즉 고통을 상쇄할 정당한 반환으로 기획되지만, 실제로는 결코 동일한 고통이나 정의를 돌려줄 수 없다. 그저 또 다른 고통, 또 다른 결핍만을 낳을 뿐이다. 이로써 복수는 자기 폐기를 포함한 수사학적 장치가 된다. 마치 원래 있었던 정의와 질서를 되살리려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을 더욱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수는 철저히 비생산적인 기획이다. 그것은 해결이 아닌 지연이며, 회복이 아닌 반복이다. ‘왜 복수하는가?’라는 질문이 반복될수록, 그 질문은 점점 더 공허해진다. 복수는 원인을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고, 상처의 기억을 제거하려다 또 다른 기억을 심어놓는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이 지점을 강조한다. 복수란 언어처럼, 기호처럼 끝내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것은 해체되어야 하는 신화이며, 결국 질문으로 남겨져야 할 미해결의 상태다.
한국 영화 속 복수극—<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등—은 이 지점에서 철학적이다. 이 작품들은 복수를 단순한 감정의 환기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실패의 여정, 고통의 반복, 비극의 구조로 제시함으로써 질문의 수위를 높인다. 복수는 해결의 이름이 아니라 파국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피해자의 것인가, 가해자의 것인가, 혹은 관객의 것인가. 그 누구도 완전히 소유할 수 없기에, 복수는 되묻는 구조로 존재한다. 복수는 정당화되기보다 해체되며, 재현되기보다 지연된다. 그러므로 복수란 특정 인물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와 담론이 호출한 유령 같은 것이며, ‘정의’라는 말의 공백에 기생하는 허상일지도 모른다.
복수는 되돌림의 이름으로 포장된 실은 또 다른 소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소외는 결국 인간의 조건 그 자체에 가깝다. 무너진 정의의 허무, 용서를 말하기에 너무 늦은 파국, 사랑조차 불가능한 잔혹함의 잔해들. 복수극은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잔해를 응시하게 만든다. 그곳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해결이 아닌 사유이며, 대답이 아닌 더 깊은 질문이다.